포장지 문화와 선악과 문화

                          강기현:화학 교회목사

 

 “목사님 죄송해요”

 계란 외상 값이 아무리 밀려도 독촉하지를 못하는 순박한 젊은 집사님, 죄지은 사람처럼 쭈삣, 쭈삣 다가와 시선을 어디다 두어야 할지 몰라 당황해 하며 던지는 말,

“다른 방법이 없어서 할 수 없이 포장을 바꿨어요,”

 여기서 말하는 포장이란 계란을 10개씩 집어 넣는 두꺼운 셀로판 상자를 말하는 것인데 이는 단순히 소비자가 운반하기에 편리하게 만들어짐 소비재이다. 그런데 그 한번 담아가면 쓰레기가 되어버리는 포장용기 하나의 가격이 천차만별이다. 24원짜리를 최저가로 50원짜리, 90원 짜리, 140원짜리가 있고 심지어 200원을 상회하는 종이 포장재도 있다. 우리나라의 생명산업을 선도한다는 거창한 기업광고를 반 생명적 테크놀러지의 집적체인 TV에 짜기 때려대는 모 식품회사는 6개들이 포장재를 직접 생산해서 쓰는데 농민들이 그런 포장을 만들어 쓰려면 300원도 훨씬 넘게 먹혀 가난한 농민들에겐 그림의 떡일 뿐이다.  그러나 실상 24원짜리에 담든 300원짜리에 담든 계란 그 자체의 질은 조금도 변하지 않는다. 단지 변하는 것은 보는 이의 시선이 닿는 껍데기 일뿐이다.

 우리 교회가 추구하는 자연란이란 하나님이 주신 햇빛과 공기, 물과 흙, 그리고 풀을 양계의 가장 중요한 자원으로 생각하고 암수를 함께 길러 생명이 있는 계란의 생산을 뜻한다. 그외에는 어떤 조건들도 무시하여 버리고, 가치도 부여하지 않으며, 신경도 쓰지 않는다. 그러다 보니 자연적으로 거창한 포장을 한 유사계란들에 비해 그 외모가 시원찮을 수 밖에…  외고집 모가 때문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다가 적자를 더 이상 감당치 못해 용단을 내리고 포장을 바꿨던 모양이다. 하지만 내 보기 미안했던지 아님 본래적인 정신에 부끄러웠던지 쭈삣 쭈삣 죄송스러워 했던 것이다. 계란을 담아 보았다. 24원짜리 포장보다 50원짜리 포장이 확실히 부(富)티도 나고 귀(貴)티도 났다. 성서적인 표현을 빌리자면 보암직도 하고 먹음직도 해 보였다.

인간의 역사는 창세기의 타락기사가 쓰여진 후 수 천년이 흘러 진보와 변화를 거듭했지만 속보다는 겉껍데기를 중요시하는 인간의 원죄적 속성은 조금도 변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인간의 삶 그 근처에 더욱 확실히 그리고 더 넓게 퍼져있음을 인식하지 않을 수 없다. 기실 오늘날에 이루어지는 반 생명적이고 반 자연적인 모든 파괴적인 현상 그 뿌리에는 본질보다는 형식을 내용보다는 껍데기를, 내면성의 그 은밀함보다는 외부로 표현되는 겉모습을 중요시하는 속성과 같은 연관을 맺고 있다. 먹으면 정녕 죽으리라는 진실보다는 보암직도 하고 먹음직도 한 허위에 자신을 던진 시조를 좇아 나를 포함한 모든 인간들이 오늘도 허위인 포장지에 좇느라 정신들이 없다.

 이 포장지 문화의 꽃은 선전, 광고이다. 상품도 선전하고, 미모도 선전하고, 지식도 선전하고, 심지어 신앙의 삶인 금식기도도 선전하고 성령의 역사인 심령부흥회마저 선전하고 있지 않은가? 포장지 문화란 선악과 문화와 다름이 아니다. 무분별하게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 우리가 우리의 원죄성으로 각성하고 주의를 기울이지 않으면 우리의 삶 전체를 파멸시킬 죄악의 문하요 죽음의 문화라는 것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토마스 아켐퍼스는 그리스도를 본받으려는 모든 이들에게 이렇게 충고했다. “Ama nesciri” “숨겨져 있음을 사랑하라”고.

농촌목회의 의미

농촌목회의 의미를 묻는 이에게 “체념을 다스리는 것”이라고 시골에서 교회를 개척하여 목회하며 글을 쓰는 목사님이 대답했더란다. 그 의미, 마음 한구석 아프게 와 닿으면서도 그래 체념해야 할 용상이 있다는 것은 아직도 기대할 무엇인가가 있음을 의미하는 행복이 아닌가? 돌맹이 하나 거기 있듯이, 풀 한 포기 나무 한 그루 거기 서 있듯이 그냥 거기 서 있음을, 그냥 그들과 더불어 있음을 뜻하는 것이라고 애써 자위했던 나에게는 그 체념마저 사치로 느껴짐은 나의 무기력인가? 아니면 교만인가?

아! Imago Dei

“하나님의 형상” 인간중심적 세계관을 뒷받침하는데 이용 당해 온 기독교 인간학의 중심점인 이 하나님의 여타 피조물들을 파괴하고 살상하는 죄악에 대한 면죄부로도 이용되어 왔다. “하나님의 형상”, 이는 참으로 조심스럽게 해석되어야 한다. 이는 우리에게 주어진 권리로서가 아니라 책임이요 의무로서의 하나님의 형상이요 이제는 환경문제의 고전적 케치프레이즈가 되어있는 “창조질서 보존의 의무로서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것을…" 이 하나님의 형상을 잃어버리는 인간의 범죄는 어떻게 나타났는가? 여러 가지로 이야기되고 있지만 따지고 보면 관계의 파괴가 아닌가? 하나님에 대해서는 인간의 오만으로(하나님처럼 되려는) 인간에 대해서는 증오로(사랑하지 못하는), 자연에 대해서는 탐욕(파괴)으로서 나타났던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보라!

하나님에 대한 지극한 사랑으로 진실한 모습을 인간에 대한 극진한 사랑으로 진실한 모습을
자연에 대해 탐욕을 버린 무소유의 모습으로 그 관계를 회복하고자 하지 않았는가? 오늘날 우리들의 교회는 하나님에 대한 오만과 인간에 대한 증오를 죄라 규정하면서도 자연에 대한 탐욕에 대하서는 침묵하고 있음은 어쩐 일인가? 아니 하나님에 대한 겸손과 인간에 대한 사랑의 반대급부로 자연에 대한 탐욕을 정당화시키고 있지 않은가?
이 탐욕! 좀 더 많이, 좀 더 크게, 좀 더 편리한 것을 끝없이 찾아 헤매는 인간의 탐욕은 그 출발이 자연과의 관계 파괴로서 시작되지만 그 진행은 인간을 향한 증오로서 발전되며 그 결과는 신에 대한 오만으로서 결실하게 된다는 사실을 간과하고 있다.

 인간이 석유라는 자연물을 인간의 편리를 위해 소유하기로 결정했을 때 인간은 이 소유의 의미를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다. 석유라는 이 하나의 자연물을 모든 인간의 관계를 주도하는 신적인 존재로 선택했다는 사실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마틴 부버가 이야기하는 인간의 사물화가 (인가중심적 사고에서는 인간의 사물화가 범죄이지만) 물구나무선 사물의 인격화내지 신격화가 이루어지게 된다는 것이다, (자동차 다음에 마누라)라는 유럽인들의 삶의 구조(우리나라도 비슷하게 되어가지만) 속에 석유라는 존재의 역할은 절대적이다. 인간과 인간의 관계뿐만 아니다. 하나님과의 관계인 우리의 예배를 생각해 보자. 석유가 없어서 전기의 공급이 중단되면 우리의 마음을 가라앉혀 거룩함을 느끼게 만드는 전자 오르간의 그윽함이 사라질 것이고 기기묘묘한 테크놀로지를 통해 우리의 심령을 두들기던 스피커와 앰프의 위력이 사라지게 될 것이며 낮에도 조명해야 하는 예배실은 어두컴컴해져 잠시도 더 머물고 싶은 생각을 자시게 만들 것이다. 오늘 석유 없는 이웃과의 관계가 상상 되어지는가? 석유 없는 예배가 가능하다고 생각되는가, 인간의 편리를 위해 석유를 선택했을 때 인간은 이미 다른 인간에 대한 증오를 선택했으며 하나님 아닌 물신(物神) 숭배를 결단했던 것이다. 인간이 백년전에 석유를 선택했을 때 이미 백년후의 걸프전은 예약되었던 것이다. 이 걸프전에서 우리는 인간의 탐욕이 어떻게 인간에 대란 증오로서 발전하며 어떻게 신에 대한 오만으로 결실해 나가는가를 볼 수 있었다. 참으로 걸프전은 자연과의 잘못된 관계설정이 인간에게는 증오로, 신에 대해서는 오만으로 극명하게 나타난다는 사실을 보여준 최고의 모범이다.

 지금까지 기독교의 잘못은 신과 인간, 인간과 인간의 관계에만 죄의 범주를 설정했던데 있다. 아니 신과 인간, 인간과 인간의 관계회복에 대안 보상적 차원에서 자연과의 관계 사물과의 관계를 파괴하는 탐욕을 정당화시키고 있는데 있다. 조금 더 많이, 조금 더 큰 것을, 조금 더 편리함을 추구하지 말라!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으니 족한 줄로 알고 탐욕을 버리자!

 이 생태학적 죄(?) 에 대한 규정을 11계명으로 삼아 끊임없이 스스로의 탐욕을 억제 시켜야 한다 과거 인간중심주의적 관계설정을 코페르니쿠스적으로 전환시켜 진실로 창조주 중심의 관계설정을 이룩해야 한다. 빛과 어둠, 땅과 하늘, 산과 바다, 새와 물고기, 그리고 들짐승들 이 모든 하나님의 창조물들이 인간과 더불어 보기에 좋았던 창조주의 선언을 회복하기 위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