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 흐르는 대로 살라

-자연인으로 살아가는 신앙인의 삶-

                          채희동: 한생명 교회 목사

 예수께서는 그 곳에 이르러 제자들에게 “유혹에 빠지지 않도록 기도하라”하시고는 돌을 던지며 닿을 만한 거리에 떨어져서 무릎을 꿇고 기도하셨다. “아버지, 아버지의 뜻이 어긋나는 일이 아니라면 이 장르 저에게서 거두어 주십시오. 그러나 제 뜻대로 하지 마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시옵소서”      (누가 복음 22장 40-42절)

막힌 몸, 막힌 마음, 막힌 세상

  요즘 제 마음 밭에 잔잔하게 살아가는 말씀은 “물 흐르는 대로 살라’라는 말입니다. 그것은 지금의 제 몸과 마음이 그 무엇인가에 꽉 막혀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사실 저는 요즘 “변비”라는 아주 골치 아픈 병 아닌 병을 앓고 있습니다. 먹으면 자연히 싸는 것이 자연의 이치이거늘 어찌 먹어도 먹어도 쌀 줄 모른단 말인가. 어찌 들어가면 나올 줄 모른단 말인가. 제몸 한가운데 어디에서 무엇인가가 꽉 그 가는 길을 막아서고 있는 것입니다. 그 원인을 가만히 생각을 해보니 제 몸의 병은 제 마음에서 비롯되지 않았나 생각을 해봅니다. 자꾸만 자꾸만 세상에 나(我)를 들어내 놓게 위해 무엇이든지 닥치는 대로 먹음으로써 마음이 막히고 자연히 몸도 막히게 된 것이 아닌가 생각을 해봅니다. 무엇에도 과함없이 언치지도 모자라지도 않게 그제 물흐르는 대로 흘러가야 무병장수할 수 있다할거늘, 제 몸은 지금 마음 한구석에 過한것이있어, 욕심이 생겨, 사fl사욕이 가득하여 마음이 막히고, 몸도 그 무엇인가에 막히게 되고 그래서 병을 얻는 것입니다. 그러니 병의 근원은 마음으로부터 온다는 말이 옳고도 옳다 하겠습니다.

 제 몸과 마음뿐만 아니라 오늘날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도 그 무엇인가가 꽉 막혀있습니다. 우리가 사는 인류는 지금 물 흐르는 대로 자연에 순응하며 자연의 이치에 맞게 흘러 가는 것이 아니라 억지로 어쩔 수 없이, 그 무엇인가에 의해. 알 수 없는 악영(惡靈)에 의해 이끌려 가고 있다는 느낌은 시대를 살고 있는 사람이면 누구나 쉽게 느낄 수 있을 것입니다. “이제 더 이상 이렇게 살아서는 않된다”, “우리가 의지하여 살아가는 현대 자본주의 기계문병으로는 새로운 세상을 열 수가 없다”, “현대 인류의 문명은 죽음의 문명, 이 시대는 새로운 문명으로 전환되어야 한다”라고 이 시대의 예언자들 뿐만 아니라 일반인들의 입에서도 쉽게 흘러 나오는 말들입니다.

 인간 중심적인 세계관과 이원론적 서구 산업기계문명은 자연 생태계를 파괴하는 근본 요인이 되었고, 그것은 이제 자연생명의 죽음뿐만 아니라 인간 생명의 죽음을 부르고 있습니다. “인간들의 뜻”인 풍요와 안락을 이루기 위해 오염시킴 물과 공기를 마시는 언덕 위 꽃 한 송이의 죽음은 바로 똑같이 오염된 공기와 물을 마시는 인간의 죽음을 의미합니다. 자신의 편리를 위해 타고 다니는 자동차는 그 뿜어내는 매연에 의해 이웃생명뿐만 아니라 자신의 생명도 병들게 하는 자살 행위인 것입니다. 자신의 생명을 살리기 위해 이웃생명을 지배하고 억압하고 빼앗고 정복하고 마침내 죽이는 현대인의 가치관은 자신의 생명까지 죽게 만들고 있습니다.

결국 우리가 지금 가는 현대 문명의 길은 인류를 멸망으로 이르게 하는 길인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지금 제몸과 마음이 막혀있고, 이 인류가 제 갈대로 자연히 흘러가는 것이 아니라 그 무엇인가에 꽉 막혀 뒤틀리고 병들고 죽어가는 것은 바로 이 보이지 않는 ‘서구산업기계문명”이라는 영향에 의한 것임을 이제는 이 죽음의 시대에 사는 사람이라면 모두가 체험하는 것입니다.

인간 뜻대로는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시옵소서

 제 몸과 마음 뿐만 아니라 우리가 살아가는 인류가 그 무엇인가에 의해 꽉 막히고 닥히고 꼬이고 뒤틀리고, 그래서 병들고 죽어가는 것을 깊이 깊이 체험하면서 저는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하느님이 말씀이 무엇인지를 알기 위해 성경을 읽어가던 중, 오늘 본문 말씀인 예수 게서 오리브산에 오르셔서 기도하신 말씀이 제 마음 밭에 생명으로 잔잔히 살아 났던 것입니다. “하늘 아버지시여, 제 뜻대로 하지 마시고 아버지 뜻대로 하시옵소서” 이 말씀을 읽는 순간 제 마음 한 구석이 꽉 막고 서 있던 체증이 내려가는 쾌감을 느꼈습니다. “그렇구나, 지금 내가 이 고질적인 병을 앓고 있는 것은 바로 내가 아버지의 뜻대로, 하늘 아버지의 뜻대로 살지 못하고 그저 내 뜻대로, 나의 고집, 나의 생각, 내 욕심, 나의 사리사욕을 채우기 위해, 나에 대한 집착으로만 살았기에 그렇구나. 그래서 이런 몹쓸 병을 앓고있는 거구나. 그래서 내 마음이 병들어 가고 있는 거구나”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의 살아있는 이 말씀은 저의 마음의 병뿐만 아니라 저의 변비까지도 고쳐 주셨던 것입니다.

 오늘날 현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을 보면 모두 제정신을 가지고 살아가는 이들이 많지 않습니다. 모두가 지신의 욕심, 자신의 사리사욕을 채우기 위해 혈안이 되어 살아갑니다. 자신을 위해서라면 수단과 방법을 동원해서 완수하고야 마는 “목적 지향적인 삶”을 살아갑니다. 남이야 어떻든 나만, 자기 자신의 일이라면 무슨 짓을 해서라도 이루고야 마는 현대인들이 모습에서 저는 하늘 아버지의 뜻대로 살아간다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가를 고백합니다. 요즘 교회에 나가는 사람이건 나가지 않는 사람이건 별 차이가 없다는 것을 봅니다. 교회 나오는 신앙인들도 하늘 아버지의 뜻대로 살아가는 이들이 많지 않습니다. 하늘 아버지의 이름을 빌려 자신의 뜻, 자신의 오심, 자신의 영달을 위해 간구할 분 기독교인들 조차도 “하늘 아버지의 뜻” 보다는 “인간의 뜻대로” 살아가려 합니다.

우리 인간의 삶이 이렇듯 인간의 뜻대로 살아가려는 저 깊은 이명에는 바로 무서운 인류의 마성적인 힘이 자리잡고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말로 “인간 중심적인 세계관”, “이원론적 주객도시적 세계관”, “산업기계문명”인 것입니다. 지금까지 인류는 “하늘 아버지의 뜻대로” 살기 보다는 “내 뜻대로”, “인간의 뜻대로” 살아왔습니다. 이것은 바로 “하느님 중심적 세계관”이 아닌 “인간중심적 세계관”에 의해서 인류가 지금까지 살아왔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로써 인류는 “하나님의 뜻”보다는 인간 “이성”을 섬기게 되었고, “과학”아라는 우상을 심봉하게 되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인류는 지금까지 인간이 이성과 과학에 힘입어 “인간의 뜻대로” 인간의 안락과 편리와 풍요를 위해서만 살아 왔습니다. 그래서 끝없이 자연을 인간의 뜻을 실현하는 도구로 사용해 왔고, 자연을 이용하여 인간의 욕심, 인간의 사리사욕을 채우며 살아 왔던 것입니다. 그러기에 자연은 그저 “인간의 뜻대로” 살아가는 데 있어서 하늘의 부속품, 인간을 섬겨야 하는 노예로 전략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저 유명한 근대 철학자 프란시스 베이컨은 말하기를 “방황하고 있는 자연은 재갈을 물려야 하고 과학의 목표는 자연을 고문하여 그 비밀을 빼앗아 내는 것이다’라고 까지 말했던 것입니다. 인간은 인간의 안락과 풍요라는 인간의 뜻을 실현시키기 위해 하늘을 뜻을 거역하고 “개발”이라는 이름으로 자연을 파괴하고, 더 나아가서 하늘이 뜻을 거역하는 죄를 범하고있는 것입니다. 또한 하늘 아버지의 뜻을 무시하고 만든 인간의 인위적인 문명은 결국 인간 스스로를 망가트리는 결과를 낳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내 뜻대로”, “인간의 뜻대로” 살지않고 “하늘아버지의 뜻대로” 살아간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다. 그것은 자신의 사리사욕, 자신의 욕심, 자신의 이기심, 자신의 안락을 위해 사는 것, 그리고 어떤 인위적이고 조직적인 것을 버리고 오직 하늘 아버지의말씀에 의지해서 살아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天地를 주관하시는 하늘 아버지의 뜻대로 살아간다는 것은 자신의 욕심을 버리고, 작위적(作爲的)인 것을 버리고 바람이 불면 바람 부는 대로 물이 흐르면 물이 흐르는 대로 살아가는 것을 말합니다. 천지의 이치에 따라, 자연에 순응하며 살아가는 것이 바로 하늘이 뜻대로 사살아가는 것입니다.

 옛날 김산이라는 스님은 무위지심(無爲之心)을 말씀하셨습니다.말은 요즘 기독교 지도자들이 말하는 적극적 사고, 적극적 신앙, 적극적 삶과는 반대되는 수동적인 태도요, 그러나 적극성을 배제한 수동성은 아닙니다. 자신의 것을 쟁취하기 위해서 적극적으로 사는 것, 자신의 목적을 실현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대하는 것과는 반대되는 어떤 조작이나 인위적인 것이 간섭하지 않는 삶을 의미합니다. 우위적인 삶이 잘 드러나 것은 오른쪽 뺨을 치면 왼쪽 뺨을 내놓으라, 겉옷을 요구하면 속옷까지 뜻대로 살아가는 도리를 잘 보여주시는 말씀인데, 오늘날 기독교인들은 자신의 그 무엇을 이루기 위해 무슨 짓을 해서라도 이루고야 말겠다는 적극적인 신앙, 적극적인 삶이, 아버지의 뜻은 무시하고 자신의 작위적인 신앙, 인위적인 신앙에 매달려 교회에 나오고 살아갑니다.

진정한 신앙인은 진정한 자연인입니다.

 여기에서 무위(無爲)의 삶을 산다는 것은 바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하늘 아버지의 뜻대로”사는 것, “천지의 이치”에 맞게 사는 것, “자연에 순응”하며 사는 것을 말합니다. 천지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은 우리로 하여금 자연을 통해 당신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신 삶을 드러내시고 계십니다. 그렇습니다. 하늘 아버지의 뜻대로 산다는 것은 인간의 뜻, 이간의 인위적이고 작위적인 삶을 버리고 자연에 순응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자연과 合一된 全一的인삶, 자연과 내가 하나의 생명으로 사는 삶을 의미합니다. 언덕 위 꽃 한 송이와 내가 하나의 생명이라는 신앙 고백적 삶을 살아가는 것, 산 너머에서 불어 오는 바람을 맞으며 이것이 하나님의 숨결임을 느끼며 살아가는 삶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뜻을 당신이 창조하시고 자연을 통하여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우리를 깨닫게 하시고 우리를 자연과 일치된 삶을 사는 것이 하나님의 뜻에 가깝게 사는 것임을 알려주십니다.

 자연은 아무런 욕심이 없이 그저 스스로 있습니다. 자연은 하는 것이 없으되, 모든 것을 다 합니다. 언덕 위에 꽃은 하는 것이 없이 그저 바람에 이끌리어 춤을 추지만 하나님의 일을 다하고 있습니다. 산은 아무것도 하는 것 같지 않지만 모든 것을 다 합니다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는 것은 자연이 아니라 오히려 인간입니다. 바로 하나님의 창조의 일을 인간이 하는 것이 아니라 자연이 합니다. 인간은 이제 자연과 동역자가 되어 하나님의 창조사업에 참여하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인간만이 하나님의 자녀가 아닙니다. 인간만이 하나님의 구원에 참여하지 않습니다. 인간만이 하나님의 형상이 아닙니다. 언덕 위 꽃 한 송이, 바람 한 점, 하늘의 구름 한 조각, 시냇물가 풀 한 포기, 여름날의 메뚜기 한 마리, 개구리, 올챙이도 모두 다 하나님의 자녀들, 모두 다 하나님의 창조사업의 동역자들, 모두 다 하나님의 일꾼들인 것입니다. 그래서 자연은 하나님의 벌판입니다. 그래서 자연은 하나님의 거룩한 성전입니다. 그래서 자연은 하나님의 작은 숨결입니다. 그러기에 우리 는 자연을 통해서 하나님의 뜻을 찾고, 자연을 통해서 하나님과 교감을 하고, 자연과 합일, 일치된으로 하나님과 깊은 만남을 갖고, 자연에 순응하며 살므로 하늘 아버지의 뜻에 맞게 살아가는 우리 신앙인들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진정한 신앙인은 진정한 자연인이 되어 살아가는 자 인 것입니다. 자연과 合一된 삶, 자연과 교감하는 삶, 자연과 하나의 생명으로 사는 삶, 자연과 나는 둘이 아닌 한 생명이라는 것을 신앙고백적으로 고백하고 삶 속에서 우러나오는 삶이야말로 진정한 하나님의 자녀, “하늘 아버지의 뜻대로”사는 신앙인이라 할 수 있습니다.

 “내 뜻대로”, “인간의 뜻대로” 살아왔던 인류는 이제 자연에 순응하며, 천지(天地)의 이치(理治)에 맞게 자연과 합일(合一)된 문명을 열고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이 길을 현대 기계문명에 이끌리어서는 갈 수 없는 길, 이 길은 작위지심(作爲之心)의 맘을 가지고는 갈 수 없는 길, 이 길을 인간중심적 인위적 삶의 방식으로는 갈 수 없는 길입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가는 길은 깨달음을 찾아 떠나는 구도의 길, 오직 자연과 교감함으로 하나님을 만나는 순례자의 길, 우리의 삶 속에서 자연과 나는 돌이 아닌 하나의 생명이라는 명성을 회복하고, 그 뜻대로 살아가는 운동인 것입니다. 결국 이 길을 현대 인류가 가르쳐준 죽음으로 가는 길이 아니라 하나님께로 나아가는, 인간의 본래의 자리, 본바탕으로 가는 길인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진정한 신앙인 은 진정한 자연인이 될 때에만 가능합니다. 그러기에 자연을 통하지 않고는 진정한 신앙인이 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인간의 뜻대로”가 아닌 “하나님의 뜻대로”가는 길을 현대문명이 우리에게 보여주었던 산업기계문명의 길이 아닌 자연이 우리에게 보여준 우리의 욕심, 우리의 사리사욕, 인위적이고 조작적인 것을 버리고 무위지심의 자세로 “물이 흐르면 물 흐르는 대로”, “바람이 불면 바람 부는 대로” 살아가는 길인 것입니다. 이 길을 자연인의 길이요, 진정한 신앙인의 길인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