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명의 생태학 김찬호 "최신형 기관총좌를 지키던 젊은 병사는 피비린내 나는 맹수의 이빨 같은 총구 옆에서 지루하기 짝이 없었다. 어느 날 병사는 그의 머리 위에 날아온 한 마리 새를 다정하게 쳐다보았다. 산골 출신인 그는 새에게 온갖 아름다운 관심을 쏟았다. 그 관심은 그의 눈을 충혈케 했다. 그의 손은 서서히 움직여 최신형 총구를 새에게 겨냥하고 있었다. 피를 흘리며 새는 하늘에서 떨어졌다. 수풀 속에 떨어진 새의 시체는 그냥 싸늘하게 굳어졌을까. 온 수풀은 성바오로의 손바닥인 양 새의 시체를 어루만졌고 모든 나무와 풀과 꽃들이 모여들었다. 그리고 부르짖었다. 죄없는 자의 피는 씻을 수 없다. 죄 없는 자의 피는 씻을 수 없다." <천상병, '새'> 어린아이의 눈으로 세상을 노래했던 천상병 시인. 우리 안에 깊숙이 자리 잡고 있는 반생명적인 기질, 살아 있는 대상들을 정말로 무심코 파괴하는 습성을 그는 이 시에서 잔잔한 언어로 고발하고 있다. 시인 천상병 님은 그러한 습성을 본능적인 충동이라기보다는 최신형 기관총으로 상징되는 문명의 소산으로 보는 듯하다. 사실 지금 문명 폭발 속에서 사람들이 하고 있는 모든 일은 이 시에 나오는 병사의 살상 행위와 별로 다를 바 없다. 자연에 대한 잔혹한 증오 같은 것이 전혀 없어도 그냥 이 세계에서 살아가는 것 자체로 엄청난 폭력을 가하고 있다. 우리의 자연스러운 행위가 자연을 파괴한다. 우리는 모두 파국으로 치닫는 폭주 자동차를 타고 있다. 그러면서도 사람들은 자신이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는지 제대로 알지 못하고 있다. '열길 물 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모른다'는 속담이 있다 옛날에는 강이 꽤나 맑았던 모양이다. 그런데 요즘 웬만한 강은 한 길은커녕 반 길도 보이지 않을 만큼 시커멓게 더럽다. 강물이 썩어서 수도물을 마시지 못하게 되자 지하수를 퍼 올린다. 너무 많이 퍼 올리다 보니 여기저기서 지하수가 고갈되고 있다. 그래서 지반이 침하되고 옆에서 스며들어오는 더러운 물로 오염된다. 지하수는 매우 천천히 흐르기 때문에 한번 오염되면 정화되기가 매우 어렵다. 이런 식으로 지구의 마실 물은 점점 줄어들고 있다. 전세계 인구의 3분의 1이 물 때문에 고생하거나 죽어가고 있다. 그런데 우리는 그 물이 무한정으로 솟아오르는 줄 착각하고 산다. 어디 물뿐이랴. 식물의 자양분을 공급하는 토양은 1년에 1억 톤씩 유실되어 바다로 흘러가고, 남북한 땅 넓이만큼의 순수 원시림이 매년 사막으로 변해간다. 버릴 곳이 없어 쌓이기만 하는 쓰레기, 점점 확장되는 오존층의 구멍, 기후 온난화와 해수면 상승 …. 우리는 매스컴을 통해 아프리카의 난민들이 기아로 죽어 가는 비참한 모습을 보면서 남의 일로만 여기고 동정의 시선을 보낸다. 우리는 그들이 아주 오래 전부터 그렇게 살아온 줄로 여긴다. 혹은 어떤 역사적 운명 때문에 그렇게 된 것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그들은 약 백년 전까지만 해도 아주 풍요롭게 살았다. 푸른 숲에서 열매를 따먹으면서 평화롭게 살았다. 그들이 오늘날 그런 처지에 놓이게 된 요인으로 환경 파괴를 빼놓을 수 없다. 강대국의 경제 수탈과 그로 인한 농업 기반의 붕괴, 그것이 빚어내는 빈곤이 환경 파괴와 맞물려 악순환을 이루는 것이다. 역사 속에는 한 때 찬란했던 문명이 환경 파괴로 인해 완전히 소멸된 사례가 많이 있다. 지금도 사하라 사막 같은 곳을 발굴해 보면 오래 전에 고도로 발달했던 도시 문명의 흔적을 찾을 수 있다고 한다. 경제의 성장만을 최선으로 여겨 왔고 그 노력의 결과 어느 정도 윤택함을 누리고 있는 우리는 그러한 진보가 하루아침에 무참하고 허망하게 스러질 수 있다는 사실을 제대로 실감하지 못한다. 그러나 지금 조금이라도 인류의 미래를 멀리 내다보는 지구인이라면 위기감을 갖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1992년 브라질 리우에서 열린 세계 환경회의, 그리고 국제 기구 및 민간 단체들 사이에 활발하게 맺어지고 있는 다양한 협약들은 그러한 파국을 미리 막으려는 국제적 노력이다. 문명의 발생과 전개 "지난 45억 년 동안 지구 위에서 진행된 것을 창세기의 7일로 비유한다면 다음과 같다. 여기에서 하루는 6억 6천 만년에 해당하는데, 지구는 월요일 오전 0시에 생겨나 수요일 정오까지 그 모습이 완성된다. 바로 그 때 생명이 탄생되어 4일 동안 유기적으로 훌륭하게 진화한다. 일요일 오후 4시에 공룡이 출현했다가 밤 9시에 자취를 감춘다. 지금은 일요일 오전 0시. 인류는 3분 전에 등장했고 산업 혁명은 40분의 1초 전에 시작되었다. 그런데 오늘날 거의 모든 사람들은 이렇게 방금 시작된 것이 앞으로 무한히 지속되리라 믿고 있다." 자연 환경이 파괴된 것은 언제부터였을까? 인류사의 아득한 시절로 그 기원을 더듬어 올라가 보자. 현재 우리 문명의 기본 꼴은 약 1만년 전에 이미 기본 꼴이 만들어졌다고 볼 수 있다. 그 무렵 인간은 채집과 수렵의 기나긴 유랑 생활을 끝내고 정착하여 농경을 시작했다. 그 이전까지 수백만 년 동안 인류는 자연이 그냥 제공하는 만큼만 먹고살았다. 그래서 자연을 인위적으로 변형시키지 않았다. 그런데 농경과 더불어 인간과 자연의 관계는 근본적으로 달라지기 시작했다. 이제 인간은 그냥 자연적으로 주어진 먹이만 취하는 것에 만족하지 않게 되었다. 자연에 힘을 가해 자신의 의도와 계산대로 소출을 거두어들일 수 있는 방법을 알게 되었다. 바야흐로 인간은 자연의 순환 질서에 완전히 복속되어 있던 단계에서 벗어나 홀로 서기의 걸음마를 내딛기 시작한 것이다. 그리고 그 비결은 생각하는 힘, 즉 이성(理性)이었다. 자연의 원리를 파악하여 통제하고 거기에 조작을 가해 더 많은 에너지와 식량을 뽑아내는 행위, 바로 그 저변에 깔려 있는 이성의 힘이 이후 전개된 모든 과학적 사고와 기술 발달의 기초가 된 셈이다. 신석기 혁명 덕분에 잉여 생산이 가능해졌다. 그전까지 사람들의 노동력은 각자 자기 몸둥이 하나를 생물학적으로 연명해 가는데 거의 소모되었다. 그런데 이제는 생산력이 발전하면서 사회 구성원들이 충분히 먹고도 남는 여분의 음식이 생기기 시작했다. 따라서 그 잉여를 바탕으로 생계 활동에서 해방되어 그 대신 다른 일에 전념할 수 있는 사람들이 출현하는 것이다. 바로 여기에서 다양한 직능들이 분화되기 시작했고 이것은 도시의 성립 조건이기도 하다. 종교 사제, 학자, 정치 권력자, 행정 관료, 기술자, 군인 등의 전문화된 영역들이 생겨나고, 그것들이 점점 긴밀하게 상호 연관되면서 도시의 힘은 점점 커졌다. 그렇게 해서 커진 집단의 힘으로 다른 지역들을 전쟁으로 복속시키는 팽창의 과정에서 우리가 지금 알고 있는 고대 문화의 '찬란한' 유산들이 생성되었다. 이른바 문명이라는 것이 비약적으로 폭발하는 중심에는 도시라는 제도가 태풍의 눈으로 자리잡고 있었던 것이다. 잉여 생산으로 인해 인간을 노예화할 수 있는 가능성이 확대됨에 따라 인간과 인간의 관계에도 질적인 변화가 일어났다. 신석기 혁명 이전의 수렵 채취 단계에서는 자원이 공유되었고 협동과 분배가 매우 중시되었다. 권력은 어느 한 사람에게 집중되어 있지 않았다. 지위와 명예는 그냥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공동체를 위해 봉사하는 대가로 주어졌다. 즉 다른 사람들이 인정하는 한에서 권력이 성립했던 것이다. 따라서 어떤 절대적인 권력이 생겨날 수 없었다. 그런데 농업 혁명과 도시 국가의 형성 과정에서 타인을 경제적인 도구 즉 노예로 이용할 수 있게 되면서 상황이 달라지기 시작했다. 권력은 타인이 동의하지 않아도 강권적으로 발휘될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힘을 가진 사람은 자신의 조직과 군사력을 이용하여 더욱 막강한 집단으로 확대해갈 수 있게 되었다. 그래서 집단 내의 사람과 사람 사이에 그리고 집단과 집단 사이에 위계적인 서열 구조가 생기기 시작한 것이다. 이제 모든 사람들은 지배와 불평등의 관계 속에 묶이게 되었다. 간추리자면 문명은 기본적으로 타자를 착취함으로써 구축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 착취 대상의 하나는 자연이고 다른 하나는 인간이다. 기원전 4천-3천 년 경에 여러 곳에서 출현한 도시, 야금술, 태양력, 문자등은 문명의 핵심적인 토대가 되었다. 즉, 그때부터 복잡해진 사회 조직, 급속히 발전하는 지식, 나날이 정교해지는 도구들 이런 요소들이 서로 상승 작용을 일으키면서 인간과 자연 그리고 인간과 인간의 관계는 광범위하게 변화되어 온 것이다. 따라서 문명의 진보는 기본적으로 인간과 자연에 대한 지배를 강화하고 조직화하면서 발전해왔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농업 혁명과 도시 국가 수준에서 출발한 문명이 일으킨 자연의 변화는 약 20여 세기동안 그렇게 심각한 것은 아니었다. 부분적으로 파괴가 일어난 것은 사실이지만 지구 전체로 보면 극히 일부분에 국한된 것이었다. 그에 비해 산업화 이후에 일어난 자연의 변화는 가히 어마어마한 것이었다. 인간과 자연의 관계라는 관점에서 본다면 이는 농업혁명에 이어서 또 한번의 거대한 전환을 가져왔다. 그 이전까지 인간이 자연으로부터 끌어내어 이용한 에너지의 8할은 바람이나 물 또는 가축의 힘처럼 순환되는 것이었다. 그런데 공업화 사회에서 방대한 기계체제가 건설되면서 인간은 화석 연료등의 재생 불가능한 에너지에 전력투구하게 되었다. 말하자면 근대 이전까지 인류는 자연이 낳는 이자만으로 살아 왔는데, 이제부터는 원금까지 까먹기 시작한 셈이다. 게다가 대량생산 체제가 급속도로 가동되면서 대기와 수질의 오염, 합성수지라는 썩지 않는 물질의 개발로 인해 생태계에 걷잡을 수 없는 혼란이 일어났다. 농경사회에서 인간이 자연에 가했던 영향을 산들바람으로 비유한다면 산업사회에서의 그것은 폭풍에 비유할 수 있을 것이다. 이제 자연이 스스로 원래 상태를 회복하는 속도 보다 훨씬 더 빠르게 파괴가 진행되기 시작했다. 자정 능력의 한계를 넘어선 수준에서 오염이 확산되어 간 것이다. 도시의 팽창과 그 대가 에너지에 초점을 맞춰 문명의 정체를 진단해보자. 앞서 살펴보았듯이 문명이 발생하고 전개되어온 과정에서 도시는 변화와 혁신의 거점이었다. 인류 역사에서 신석기 혁명에 이어 두번째의 문명 폭발로 일컬어지는 산업화가 진행되면서 도시는 한층 더 강력한 구심력을 발휘하였다. 지금도 도시는 주변의 사람들과 자원들을 왕성하게 빨아들이고 있다. 도대체 도시란 무엇인가? 그리고 역사 속에서 그것이 취해온 모습은 어떠했는가? 근대 도시 이전에 대부분의 도시는 그 규모에서 일정한 한계를 넘어서지 못했다. 고대 아테네나 레오날드 다빈치 당시의 플로렌스는 인구 5만 남짓의 소도시였다. 16세기 후반까지도 유럽 도시는 대부분 2만명 정도를 수용하고 있었다. 여기에서 한 가지 예외가 되는 도시는 바로 로마였다. 전성기에 이르렀을 때 로마는 백만 가까운 인구를 거느리고 있었다. 당시의 농업 생산력으로는 도저히 그 정도의 인구를 한 도시에서 수용할 수 없었다. 그런데도 그것이 가능했던 것은 주변의 광활한 영토를 식민화하여 약탈함으로써 자연의 제약을 극복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러한 팽창이 어느 한계를 넘어서면서 로마는 서서히 쇠락의 길로 접어들기 시작했다. 그 커다란 몸집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점점 더 많은 에너지를 투입해야 하는데 그것은 바로 엔트로피의 증가를 의미한다. 그 무질서를 극복하기 위해 더 많은 에너지가 요구된다. 하지만 그것은 무한히 지속되기가 어렵다. 어느 시점에서부터는 얻는 것보다 잃는 것이 많아지기 시작한다. 예를 들어 군대가 사용하는 에너지가 군대가 획득하는 에너지 보다 많아지는 것이다. 식량을 운반하여 공급하거나 내부의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치러야 하는 댓가가 다른 지역들을 착취하여 얻어내는 경제력을 초과하는 것이다. 노예를 잡아오는데 드는 비용이 그 노예를 강제 노동시켜 뽑아내는 이익을 웃도는 것이다. 바로 그러한 임계치를 넘어서면서 그 거대한 문명 시스템은 급격하게 붕괴의 길로 치닫게 된다. 전세계 인구의 절반 가까이 살고 있는 현대의 도시들은 어떤가? 우선 그 규모에서 볼 때 백만 인구의 로마를 훨씬 능가하는 대도시권들이 곳곳에 있다. 그러한 삶의 집합체를 유지하기 위해 투입되는 에너지도 역시 막대하고 그로 인해 엄청난 한정 자원들이 고갈되어 간다. 그리고 그 결과 빚어지는 엔트로피도 엄청나게 늘어난다. 더구나 지금의 산업 문명은 고도의 과학과 기술을 활용하기 때문에 주로 노예 노동에 의존하여 문명을 유지시키던 고대 도시들에 비해 훨씬 지독한 폐기물들을 쏟아내고 있다. 도시는 내부에 자연 자원의 재생산 기반을 거의 가지고 있지 않다. 도시인들의 먹거리를 생산하는 농토, 그리고 그것을 소비하면서 내보내는 유기물질들(똥과 음식 쓰레기)을 처리하는 하는 토지는 도시 바깥에 있다. 아무리 도시화가 진행된다 해도 사람의 몸을 개조할 수는 없다. 뭔가를 먹어야 하고 그 배설물을 내보내야 한다. 그리고 그 순환은 늘 자연을 필요로 한다. 따라서 도시의 규모가 커질수록 도시인들의 생명을 지탱하기 위한 순환의 생태학적 토대는 점점 더 멀리 밀려날 수밖에 없다. 그래서 도시를 지속시키기 위한 순환의 물리적 거리 역시 커지기 마련이다. 자연히 그 운송의 비용은 늘어나고 결국 그만큼 자연 환경에 가해지는 부담도 가중된다. 로마가 그러했듯이 어느 단계에 이르러 규모의 효율은 규모의 비효율로 바뀌기 시작한다. 지금 우리 대도시들도 그러한 단계를 맞이한 듯하다. 편리하고 빠르게 이동하기 위해서 사람들은 승용차를 구입한다. 그런데 도시를 주행하는 차들은 점점 느려지고 있고 불편할 때가 많다. 바로 승용차들이 너무 많아졌기 때문이다. 그래서 차라리 차가 없이 걸어가는 것이 더 빠르고 편리한 상황을 점점 자주 경험하게 된다. 교통 체증으로 인해 우리가 입어야 하는 손실은 생각보다 훨씬 막대하다. 차들이 도로에 정체되면서 낭비되는 연료비는 한국에서만 한해에 십조 원을 넘는다고 한다. 주행 속도가 느려지면서 시내 버스나 택시들이 갈수록 수입이 줄어들고 그것은 공공 교통 요금을 올린다. 그로 인해 길가에서 그냥 버려지는 시간을 계산한다면 그 손실 또한 엄청날 것이다. 그리고 계속 늘어나는 배기 가스는 우리의 건강을 위협하고, 산성비를 유발함으로써 도시 녹지를 파괴한다. 이러한 경제적, 시간적, 생태적인 적자를 우리는 어느 선까지 감수할 수 있을까? 도시가 어느 규모 이상으로 팽창하기 시작하면서 효율과 질서가 급격하게 떨어지는 것은 그 외에도 여러 현상에서 확인된다. 쓰레기 매립지가 도시 바깥으로 점점 멀어지면서 자연히 그에 따른 처리비용도 높아지고 그것은 주민들의 높은 세금으로 충당된다. 서울시의 경우 난지도에서 김포 매립지로 옮기면서 운반 예산이 두 배로 늘어났다. 도시의 팽창은 안으로는 인구의 밀도를 높인다. 비좁은 공간에 많은 사람들이 부때끼면서 생활해야 한다. 도심지에서 거리를 걷는다는 것은 늘 인파를 헤쳐나가는 것과 비슷하고, 주차 공간을 찾기 위해 진땀을 빼야 한다. 그 과정에서 사소한 일로 시비가 붙고 때로 큰 싸움으로 번지기도 한다. 만성화된 스트레스가 사람들 사이의 관계를 험상궂게 만들고 그것이 다시 스트레스로 되먹임(피이드백)된다. 악순환의 연속이다. 소비의 철학이 바뀌어야 한다 환경 문제는 더 이상 저 바깥에 있는 이슈가 아니다. 가해자와 피해자를 가리고 진상을 규명하여 보상을 해주면 해결되는 문제가 아니다. 궁극적으로 우리의 세계관과 생활 양식이 바뀌지 않으면 안 된다. 지금 범지구적으로 드러나고 제기된 환경 문제는 바야흐로 우리의 삶의 방향 전환을 촉구하는 메시지로 변환되어 다가오고 있다. 그래서 지금까지 당연시되어온 것들을 새로운 눈으로 들여다 볼 것을 요구한다. 이미 현실은 변화하고 있다. 1992년 리우 환경 회의 이후 환경을 더 이상 파괴해서는 안 된다는 합의가 점점 확대되고 있다. 그에 발맞춰 여러 가지 국제적인 규제가 속속 등장하고 있다. 지구온난화와 오존층 파괴를 막기 위해 탄산가스와 프레온 가스의 배출 허용량을 국가별로 제한하는 조치는 그 대표적인 예이다. 그리고 유럽에서는 비닐 포장이 지나친 상품은 수입하지 못하도록 스스로 원칙을 오래 전에 정해놓은 바 있다. 이러한 시장 환경에서 살아남기 위하여 선진국의 많은 기업들은 공해를 줄이거나 방지하는 이른바 '청정 기술 (clean technology)을 개발하는데 열을 올리고 있다. 따라서 환경 파괴를 대가로 치르면서 성장 일변도로 치달아온 경제 발전 방식은 점점 지탱하기가 어렵게 되어가고 있다. 한국의 사정은 어떠한가. 이른바 '그린라운드' 로 총칭되는 각종 환경 관련 국제 협상에서 어떤 논의들이 진행되고 있는지를 정밀하게 파악하면서 제대로 대비해야 하는데 그 점에서 너무 허술하다. 이렇게 가다 보면 어떤 사태가 벌어질까. 한국 경제의 중요한 토대가 되는 수출 전선에 차질이 생긴다. 환경을 충분한 배려하지 않은 채 물건을 만들었다는 이유로 높은 관세가 부과되기 때문이다. 환경 기준이 점점 엄격해지는 나라에 상품을 팔기 위해서는 그 기준에 맞춰 재료와 공정 과정을 바꿔야 한다. 그런데 거기에 들어가는 비용이 만만치 않다. 예를 들어 냉장고나 에어컨을 만드는데 오존층을 파괴하는 프레온 가스를 친환경적인 신물질로 대체하면 원가가 10만원 이상 더 들어가게 된다. 국내에서 자체 개발하지 못해 외국에서 비싼 값을 치르고 수입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만큼 가격 경쟁력은 떨어질 수밖에 없다. 그러나 그것은 단순히 수출만의 문제가 아니다. 내수 시장에서도 그러한 상품이 소비된다. 그래서 과잉 포장으로 쓰레기가 양산되고 유해 물질로 소비자의 안전이 위협받는다. 무엇이 그러한 생산 체제를 바꿀 수 있는가? 우선 정부의 감시와 규제를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그것과 함께 시장에서도 변화가 일어나야 한다. 소비자들은 단순히 가격만 보지 말고 그 상품을 만드는 과정에서 기업이 얼마나 환경을 배려했는지도 고려해야 한다. 그래서 문제가 있는 기업은 불매 운동 등 압력을 가해야 한다. 그러한 소비자 의식과 행동은 당장은 기업의 활동에 제약이 된다. 그러나 그것은 국제 시장에서 살아남을 수 있도록 체질을 개선하는 계기가 될 수도 있다. 기업과 함께 소비자들에게도 변화가 요구된다. 생활 양식과 소비 패턴이 변하지 않으면, 문자 그대로 모두 죽을 수밖에 없다. 무엇을 어떻게 바꾸어야 하는가? 물건들과의 관계를 바꾸어야 한다. 소비에 대한 태도와 철학이 달라져야 한다. '소비'라는 말은 '소모'와 비슷한 뉘앙스를 갖는다. 즉 나의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하여 대상을 해체시키는 것이다. 그러나 이 세상의 모든 사물은 생물이든 무생물이든 나와 무관한 객체일 수 없다. 궁극적으로 서로가 서로를 연기(緣起)하면서 거대한 그물망을 이루고 있는 것이다. [화엄경]에서는 그 철학을 다음과 같이 표현하고 있다. '이 세계의 각각의 사물들은 단지 그 스스로 존재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다른 모든 사물들은 동반하고 있다' 추상적인 이야기가 아니다. 쓸모를 다했다고 그래서 나와의 인연이 끝났다고 생각하면서 버리는 물건들은 쓰레기로 국토공간을 메워 우리의 삶터를 협공해온다. 하늘과 땅과 물을 오염시켜 나의 목숨을 조이는 질긴 인연으로 되돌아오는 것이다. 이제 우리는 물건들과 새로운 관계를 만들어야 한다. 일상에서 세계가 보이는 시대이다. 작은 물건 안에서 담겨 있는 우주를 발견하고 그것을 마음속에 담아내는 눈과 힘이 생겨나야 한다. 물건들과 대화를 시작하자. 너는 어디로부터 와서 어디로 가느냐? 그 앞뒤의 연쇄 고리들을 추적해 가는 길목에서 우리는 만물의 이치를 만나게 된다. 그리고 타자들과 새롭게 사귈 수 있는 실마리가 잡힌다. 소비는 육신의 끝없는 편리함을 맹목적으로 추구하는 포식(飽食)이 아니다. 또한 화려한 디자인과 그것이 자아내는 상징적 과시에 현혹되어 벌이는 위세 경쟁이 아니다. 그것은 생태적 교란을 일으킬 뿐만 아니라 문화적인 궁핍함을 가중시킨다. 그리고 경제적인 효율도 감퇴시킨다. 인간이 자연과 화해하기 위해서는 궁극적으로 인간끼리의 관계도 변해야 한다. 우리는 자연을 파괴하면서 공동체도 파괴해 왔다. 물건과 재화의 양적인 팽창을 극대화하는 과정에서 인간 관계도 냉혹하고 기계적인 질서로 재편되어 온 것이다. 이제 왜곡된 사람과 사람의 관계를 바로 잡지 않고서는 사람과 자연의 관계도 바로 잡을 수 없을 것이다. 뜻 있는 시민들 사이에서 일어나고 있는 환경 운동은 바로 그러한 바탕에서 출발하고 있다. 그래서 환경운동의 목표는 단순히 잃어버린 자연을 되찾는데 머물지 않는다. 궁극적으로 사람들 사이에 협동과 공생의 가치를 실현하는 것이 그 운동의 비전이다. 그리하여 지금의 사회 문화 체계를 근원적으로 재구성하면서 산업 사회를 구성하는 기본적 주제들을 바꾸는 것이다. 진보, 팽창, 속도, 성장, 지배, 억압, 소유 등의 사회 구성 원리를 극복하려 한다. 그래서 인간의 소외된 본성을 회복하며 자연과 더불어 살아가는 생활 양식을 모색하는 것이다. 세계 각국에서 활동하는 녹색 운동 단체들의 강령에 생태계 보호뿐만 아니라 삶의 체계 전반에 걸친 내용들이 포함되는 것은 그러한 비전과 상통한다. 거기에는 풀뿌리 민주주의, 분권화, 기업의 자주 관리, 남녀 평등, 사회적 약자들 - 어린이, 노인, 장애인, 소수민족 등 -- 의 인권 보장 같은 포괄적 원리가 담겨 있다. 이는 자연의 해방과 인간의 해방이 유기적으로 연관되어 있음을 암시하는 것이다. 따라서 녹색 운동은 생산력이라는 하나의 도식으로 획일화된 우리의 환경을 자연 본래의 다양함으로 되돌리고, 거대한 생산 체제와 중앙 집권적 구조를 작은 단위로 분해하는 작업이다. 산업 사회가 최고의 가치를 매겨 온 '큰 것'과 '빠른 것'은 자연이 인간에게 부여한 바탕에 어긋난다. 인간 본연의 생물학적 구조와 심성에 적합한 규모로 삶을 재편성하는 것, 그래서 '작은 것'과 '느린 것'에 그 나름의 가치를 부여하여 자율적인 존재로 서게 하는 것이 바로 녹색 운동의 전략이다. 이제 생활 양식의 변화 없이는 사회의 변화가 이뤄질 수 없다. 녹색 소비는 생태와 문화와 경제 세 차원의 요구를 아우르면서 성립하는 생활 양식이다. 자연의 순환과 삶의 보람과 물질의 풍요를 최적 모델로 구현하는 실험이다. 그 한 가운데는 자아와 우주를 궤뚫어 잇는 성찰이 중심 축으로 자리 잡고 있다. 거기에서 생성되는 삶의 에너지로 사회의 변화를 창조적으로 주도하는 운동이 녹색 운동이다. 우리는 스스로에게 묻는다. 인류는 세상과 아름답게 공존할 수 있는가? 21세기는 거대한 명상의 세기가 될 것이다. [발제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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