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물의 행동과 인간의 본성

                      최재천 교수

어우름의 지혜

나는 고등학교 시절 잠시나마 미술가의 길을 꿈꾼 적이 있다. 얼마 전 그 미처 다 꾸지 못한 꿈을 조금이나마 이어 꿀 기회가 있었다. 구 워커힐 미술관이 아트센터 나비라는 이름으로 거듭나며 색다른 기획전을 준비하고 있었는데 참으로 뜻밖에도 이 삭막한 자연과학자에게 주제를 구상하는 영광이 주어졌다. 아슬아슬한 장면에서 아쉽게 끝나버린 꿈을 어떻게든 이어보려 뒤척뒤척 잠을 청해본 경험이 누구에게나 있을 것이다. 아마도 그런 마음이었던 것 같다. 못이기는 척 승낙하곤 곧바로 사이버공간 속에 새롭게 창조할 예술의 세계에 대한 꿈을 꾸기 시작했다.

그리 어렵지 않게 내 가슴을 달구며 떠오른 주제는 바로 '니취(niche)'였다. 니취란 원래 작은 조각품이나 꽃병을 올려놓기 위해 벽면을 오목하게 파서 만든 장식 공간을 칭하는 말이었는데 생태학에서는 한 생물이 환경 속에서 갖는 역할, 기능, 또는 위치 및 지위를 의미한다. 구태여 공간의 개념으로 설명하자면 환경에서 생물이 차지하고 있는 다차원 공간을 뜻한다. 생물은 누구나 환경 속에서 자기만의 독특한 공간, 즉 역할이나 지위를 차지하고 있다는 개념이다.

생명현상을 가장 포괄적으로 잘 설명한 이론으로 확고하게 자리를 잡은 다윈의 진화론에는 흔히 '약육강식,' '적자생존' 등 다분히 경쟁적인 사자성어들이 따라다닌다. 이 같은 표현들은 사실 다윈 자신이 만든 것이라기보다는 그의 이론에 감화 받아 '성전'을 끼고 세상에 뛰어든 '다윈 전도사'들의 작품이었다. 다윈의 '종의 기원'에 경쟁의 개념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그것만 강조한 것은 결코 아니었다는 말이다.

니취의 개념도 처음에는 경쟁을 설명하기 위해 만들어졌다. 정확하게 동일한 또는 너무 비슷한 니취를 지닌 두 생물은 절대로 공존할 수 없다는 것이 기본적인 생태계 구성이론이다. 이른바 '경쟁배타의 원리(competitive exclusion principle)'에 따르면 두 생물이 환경에서 추구하는 바가 너무 지나치게 겹치면 함께 살 수 없고 반드시 한 종이 다른 종을 밀어내게 된다. 그래서 지구의 생물들은 그 오랜 진화의 역사를 통해 서로간의 유사성을 줄여 공존할 수 있도록 변화해왔다. 그 결과가 오늘날 우리 앞에 파노라마처럼 펼쳐져 있는 이 엄청난 생물다양성이다.

자연은 언뜻 생각하기에 모든 것이 경쟁으로만 이루어져 있는 것 같지만 사실 그 속에 사는 생물들은 무수히 많은 다른 방법으로 제가끔 자기 자리를 찾았다. 어떤 생물들은 반드시 남을 잡아먹어야만 살 수 있는 것들이 있는가 하면(포식), 모기처럼 남에게 빌붙어 조금씩 빼앗아 먹어야 하는 것들도 있다(기생). 경쟁관계에 있는 두 생물이 서로에게 동시에 얼마간의 피해를 주는 반면 포식과 기생을 하는 생물은 남에게 피해를 줘야만 자기가 이득을 얻는다.

하지만 자연은 이렇게 꼭 남을 해쳐야만 살아갈 수 있는 곳은 아니게 진화했다. 상당히 많은 생물들이 서로 도움으로 해서 그 주변에서 아직 협동의 아름다움과 힘을 깨닫지 못한 다른 생물들보다 오히려 훨씬 더 잘 살게 된 경우들도 허다하다. 이걸 우리는 공생(symbiosis) 또는 상리공생(mutualism)이라 부른다. 예를 들자면 개미와 진딧물, 벌과 꽃(현화식물, flowering plants), 과일(씨를 포장하고 있는 당분)과 과일을 먹고 먼 곳에 가서 배설해주는 동물 등등 너무나 다양하다.

예전의 생태학에서는 늘 경쟁 즉 '눈에는 눈' 또는 '이에는 이' 식의 미움, 질시, 권모 등이 우리 삶을 지배하는 줄로만 알았지만 이젠 자연도 사랑, 희생, 화해, 평화 등을 품고 있다는 사실을 인식한다. 모두가 팽팽하게 경쟁만 하며 종종 서로 손해를 보며 사는 사회에서 서로 도우며 함께 잘 사는 방법을 터득한 생물들도 뜻밖에 많다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다. 경쟁관계에 있는 생물들이 기껏해야 제로썸(zero- sum) 게임을 하는데 비해 어우름을 실천하는 생물들은 그 한계를 넘어 더 큰 발전을 할 수 있다.

상리공생이 아니더라도 상대에게는 이렇다할 피해를 주지 않으며 함께 있어 이득을 얻는 경우도 있다. 이를 편리공생(commensalism)이라 부르는데 말미잘과 숨이고기의 관계가 그 한 예다. 말미잘은 숨이고기가 있으나 없으나 별 상관이 없지만, 숨이고기는 말미잘의 독성이 있는 촉수 숲에 숨어 보호를 받는다. 또 들판을 거니는 소나 말들 옆에는 왜가리들이 종종 따라다니는데 그들은 소나 말들이 걸어가며 툭툭 차는 발길에 튀어 오르는 곤충들을 잡아먹고 산다. 인간 못지 않게 풍요로운 사회를 구성하고 사는 개미나 벌 사회에는 약간은 비정상적인 방법으로 사기를 치며 빌붙어먹는 동물들이 적지 않다. 개미나 벌은 물론 인간사회에 들어와 엉거주춤 함께 사는 그 많은 동물들, 또 심지어는 병원균 등도 인간이 그들을 포용할 수 있는 여유가 있기 때문이다.

우리 유전자 안에 없다

그런데 무슨 영문인지 지금 이 지구상에서 가장 여유가 있어 보이는 동물인 우리 인간은 마치 자연을 떠난 지 오래 된 존재처럼, 또 자연과 함께 어우르는 법은 애당초 모르는 동물인 것처럼 행동하고 있다. 이 지구를 덮고 있는 식물계에서 현재 가장 막강한 우점종들은 모두 우리가 경작하고 있는 농작물이다. 그 중에서도 대표적인 것들은 바로 벼, 밀, 보리 등이다. 불과 1만년 전만 해도 그들은 그리 성공적인 식물들이 아니었다. 우리 인간과 함께 급속도로 성공의 길을 걷게 된 셈이다. 이런 의미에서 농사를 지을 줄 아는 우리 인간은 이미 어우름의 지혜를 터득한 동물이다. 다만 우리들 대부분이 스스로 어우름을 실천하고 있다는 걸 깨닫지 못한 채 살고 있을 뿐이다.

인간은 이 지구상에서 그 어느 동물보다도 자연을 잘 활용할 줄 아는 동물이다. 그래서 만물의 영장이 되었다. 자연을 잘 보호할 줄 알아서 만물의 영장이 된 것은 아니다. 다른 동물들이 자연에 순응하여 사는 동안 우리는 자연을 정복할 줄 알았기에 짧은 시기에 이처럼 막강한 종으로 성장할 수 있었다.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신 성경 말씀처럼 자연을 정복하며 지구생태계를 지배하는데 성공했다.

우리 나라에도 적지 않은 수의 패총들이 발굴되어 고고학자들을 흥분시키곤 한다. 패총이 무엇인가? 다름 아닌 작은 규모의 난지도이다. 그 당시 사람들은 자기들이 살던 곳이 황폐해지면 버리고 다른 지역으로 이주하면 그만이었다. 현재 살고 있는 지역을 애써 정화하며 사는 것보다 이용할 수 있을 만큼 최대한으로 이용하고 효용가치가 어느 수준 이하로 떨어지거나 너무 더러워지면 버리고 새로운 지역으로 이주하는 것이 훨씬 경제적이었다. 다만 이제는 우리가 더 이상 그런 식으로 살 수 없는 것이 안타까울 뿐이다.

우리로 하여금 환경을 보호하기 위해 자원을 아끼고 물욕을 절제하도록 만들어주는 유전자는 우리 몸 속에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는 우리 역사의 99% 이상을 수렵채집생활을 하며 지냈다. 그 시절에는 환경을 보호해야할 아무런 이유가 없었다. 적어도 인간에게는 말이다. 환경파괴는 우리가 성공을 누리기 시작하면서 심각해진 문제이다. 따라서 환경을 보호하며 동시에 발전을 꾀하는 방법은 배워서 시행할 수밖에 없다. 이른바 '지속 가능한 발전'을 실행에 옮기는 것이 어려운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우리 유전자에 조목조목 적혀 있지 않는 것은 환경 보호 능력만이 아니다. 우리는 가족 또는 작은 부족 단위로 수렵과 채집을 하는데 적응된 동물이다. 우리가 농사를 짓고 산업을 일으켜 도시 문명사회에 살게 된 기간은 기껏해야 1만년에 불과하다. 적절한 진화가 일어나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시간이다. 이런 의미에서 볼 때 우리는 모두 어느 날 갑자기 타임머신을 타고 현대에 떨어진 원시인들이다. 스스로 변화시킨 환경에 우리의 몸과 정신이 미처 적응할 틈도 없이 등을 떠밀려 살고 있는 셈이다.

행복한 2등 국가론

환경보호운동을 하는 사람들이 생각해낸 구호에 "생각은 세계적으로 하되 행동은 우리 주변에서(Think Globally, Act Locally!)"라는 말이 있다. 세계는 어차피 국가 단위로 쪼개져 있고 민족주의의 그림자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물론 한 편으로는 끊임없이 인류 전체의 공동관심사에 대한 논의를 멈추지 말아야 하지만, 급변하는 세계 정세 속에서 과연 우리 나라는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야 할 것인가 역시 깊이 생각해야 한다.

나는 1980년대에 야외연구를 하러 중미의 스위스라 불리는 아름다운 나라 코스타리카를 자주 찾았다. 정글생활을 마치고 잠시 도회지로 나올 때마다 당시 내가 즐겨 찾던 곳은 우리 나라에도 살았던 화교가 경영하는 중국음식점이었다. 그곳에는 늘 자장면이 날 기다리고 있었다. 마치 동포를 만난 듯 반가워 어쩔 줄을 모르는 주인 아저씨와 함께. 아직도 유창한 한국말을 구사하던 그 주인 아저씨는 내가 나타나면 언제나 할 일을 제쳐놓고 내 곁에 붙어 앉아 줄기차게 코스타리카의 삶에 대한 얘기들을 들려주곤 했다.

그의 주방에서 접시를 닦는 어느 코스타리카 사람에 관한 얘기다. 그 사람은 한 동안 멀쩡히 일을 잘하다가는 어느 날 말도 없이 사라져버린다는 것이다. 그러다가 한 두어 달 지나면 또 어느 날 아무 말도 없이 슬며시 뒷문으로 들어와 접시를 닦는다고 한다. 주머니 속에 돈이 좀 고이면 그걸 쓰러 갔다가 돈이 마르면 다시 와서 일하고 하는 것을 십 년 넘어 반복하고 있단다. "한국 사람 같으면 6개월만 그릇을 닦아도 골목 어귀에 중국집을 차려 나간다"는 말과 함께 그는 "코스타리카 사람들은 욕심이 없어 틀렸어" 하며 혀를 끌끌 차곤 했다.

국민소득 수준으로만 보면 코스타리카는 세계 최하위권에 속하는 나라다. 하지만 평균수명으로는 세계 최상위권에 있다. 야외연구를 위해 이 지방 저 지방 다니며 만난 그 나라 사람들은 비록 가난하지만 한결같이 건강하고 행복해 보였다. 지난 해 통계청의 발표에 따르면 우리 나라 사람들은 줄잡아 10년 이상을 병마에 시달리며 살고 있단다. 서울의 공기는 이미 숨쉬기에 적합하지 못하다. 전국의 산야 어느 곳 하나 성한 곳이 없다. 국토의 4분의 1을 국립공원으로 지정하여 특별히 삼림욕을 하러 가지 않아도 맑은 공기를 마시며 장수하는 코스타리카 사람들과 몸 망가지는 줄 모르며 기를 쓰고 일하여 조금 살만한가 싶으면 또 넘어지고 또 넘어지고 하는 우리들 중 과연 누가 더 행복한지 생각해볼 문제다.

세계보건기구(WHO)의 홈페이지에는 세계 각국의 연령별 사망률을 비교해놓은 도표가 있다. 세계 어느 나라든 남성의 사망률이 여성의 사망률보다 높은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그런 현상은 다른 동물사회에서도 똑같이 일어난다. 수컷이란 워낙 '짧고 굵게' 살다 가게끔 진화한 동물이다. 번식의 기회를 얻기 위하여 암컷에게 잘 보여야 하는 동물들의 수컷들은 번식기 내내 변변히 먹지도 못하며 오로지 성애에 탐닉한다. 그러다 기진맥진하여 죽는 수컷들도 있고 근근히 목숨을 부지한다해도 그 해 겨울을 넘기기 어렵거나 이듬해의 성 편력에 심각한 타격을 입기 일쑤다.

여러 암컷들을 거느리기 위해 미리 수컷들끼리 권력 다툼을 벌여야하는 동물의 경우에도 수컷들의 삶이 처절하기는 마찬가지다. 으뜸 수컷이 되려면 항상 위험한 격투를 겪어야 하는데 그런 몸싸움에서 언제나 성한 몸으로 걸어나온다는 보장이 없다. 운이 좋았건 힘이 셌건 으뜸 수컷이 되고 나면 그 자리를 지키기 위해 밤낮없이 경계를 게을리 할 수 없다. 또한 자기가 거느리는 후궁들을 늘 즐겁게 해야 함은 말할 나위도 없다.

권력구조의 외곽으로 밀려난 수컷들이라고 해서 자신의 처지를 운명으로 받아들이며 조용히 수절의 삶을 살 수는 없다. 그들 몸 속의 유전자가 그들로 하여금 쉽사리 포기하지 못하도록 부추긴다. 그래서 변방의 수컷들은 늘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고 산다. 그리고 어렵사리 기회가 오면 과감하게 승부를 건다. 수컷들의 세계는 이처럼 늘 경쟁의 그림자에 휘감겨 있다. 자연계의 거의 모든 동물에서 수컷들이란 본시 이렇듯 무모할 수밖에 없는 존재들이다. 이 같은 무모함은 번식적령기의 수컷들에게 더욱 뚜렷하게 나타난다. 그렇지 않고서는 자신의 유전자를 후세에 남길 길이 없기 때문이다.

인간도 엄연히 포유동물이다 보니 이런 점에서 예외일 수 없다. 어느 사회든 한결같이 20대, 30대 남성의 사망률이 여성의 사망률에 비해 무려 세 배나 높다. 약한 자여, 그대의 이름은 남성이니라. 세계보건기구에 통계자료를 제공한 모든 나라의 경우 이 같은 현상은 거의 완벽하게 동일하다. 어느 나라든 남녀의 사망률은 비슷하게 시작하여 20대와 30대에 엄청난 차이를 보이다가 40대로 접어들며 서서히 비슷해지는 곡선을 그린다. 경제력과 문화에 상관없이 포유동물의 특성이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그런데 그 그래프에서 유일하게 40대, 50대로 들어서며 남성의 사망률이 점점 더 치솟는 나라가 있다. 바로 대한민국이다. 우리가 살고 있는 바로 이 나라 말이다. 전 세계를 통틀어 우리 나라 40대와 50대 남성들의 목숨이 가장 파리목숨에 가깝다는 명확한 증거이다. 나는 지금 일본 동경대학의 동료들과 함께 이러한 현상들을 진화생물학적으로 분석하는 작업을 하고 있다. 곧 이 기이한 현상에 대한 원인을 단순히 스트레스로 돌리는 수준 이상의 연구결과를 발표할 수 있을 것이다.

대한민국은 한 마디로 '소모인간사회'다. 요사이 나라 경제가 말이 아니지만, 나는 우리 나라가 또 다시 후진국으로 전락할 위험은 없다고 본다. 적어도 경제적인 면에서는 말이다. 그렇게 되도록 가만히 앉아 있을 우리가 아니다. 무슨 짓이든 악착같이 할 것이다. 그래서 어떠한 난국이든 반드시 극복하고야 말 것이다. 역사가 그를 증명하고 있고 우리 스스로 우리의 근성을 믿는다. 그래서 '은근과 끈기의 민족'이라고 하지 않았던가.

그러나 이 같은 고난과 극복의 역사는 나라 전체의 수준에서 분석하고 자위할 수 있을 뿐이다. 이른바 집단 수준의 평가일 따름이다. 그 집단을 이루고 있는 성원의 수준에서 이 현상을 다시 한번 분석해보면 엄청나게 다른 모습이 드러난다. 대한민국이라는 집단이 세계 10위권 경제대국들의 근처를 맴돌기 위해 그야말로 '발악'을 하는 동안 그 성원들의 삶의 질은 과연 어떠한가. 목적 달성을 위한 소모품 신세를 면하지 못하고 있다. 근대화의 급물살 속에 우리 사회는 어느새 성원 한 사람 한 사람의 삶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한 동안 써먹다가 효용가치가 떨어지면 가차없이 버리고 새로 만들어 쓰는 부분품사회가 돼버렸다.

우리 사회가 걸어온 길을 돌이켜보면 마치 미식축구 경기를 보는 것 같다. 혼신의 힘을 다하여 적의 수비망을 뚫고 이제 막 터치다운을 하려는 순간, 졸지에 인터셉트를 당해 거의 출발선까지 물러서고 말았다. 국민소득 1만 불 이상의 선진국 대열에 들어선다며 들떠 있다가 오히려 IMF에 무릎을 꿇고 말았다. 예서 주저앉을 수는 없다며 다시 무거운 몸들을 추스른다. 하지만 급한 김에 공격을 너무 서두르다 보니 연신 심판의 호루라기가 울린다. 잇단 반칙에 전진은 고사하고 후퇴하기 바쁘다.

이것이 바로 우리 경제의 참모습이다. 죽어라 일해 겨우 몇 발자국 가다보면 국제시장의 사소한 변동에도 발이 걸려 넘어지기 일쑤다. 나는 경제학자가 아니지만 우리 경제가 앞으로도 이런 악순환을 오랫동안 반복할 것이라고 서슴없이 말할 수 있다. 우리는 신호등을 잘 안 지키며 달려왔다. 아무도 오지 않는 시골길 사거리에서도 신호등이 바뀌길 기다리는 선진국 사람들과는 달리 사고가 나지 않는 범위 내에서 적당히 어기면서 달려왔다. 그리곤 아직도 저 뒤에서 신호를 기다리고 있는 둔한 친구들을 비웃는다. 그런데 왜 결승점에는 우리가 먼저 도달하지 못하는 것일까.

우리는 너무 자주 어쭙잖게 '세계 최초' '세계 제일'을 부르짖는다. 가지지 못한 자의 처절한 떠벌림처럼 들려 서글프다. "우리 아빠가 그러시는데 우리 나라가 세상의 중심이 된데요"라던 어느 대기업의 이미지 광고를 기억한다. 맞아죽을 얘기인지 모르지만 나는 우리 나라가 죽었다 깨어나도 세계 초강대국이 될 수 없다고 장담한다. 물론 전국민이 악착같이 덤벼들면 강대국 대열 저 뒷자리쯤에는 낄 수 있을지 모른다. 우리가 뭘 그렇게 가진 게 많다고 미국이나 중국과 어깨를 겨루려 하는가.

얼마 전 평화문화지수라는 것이 제정되어 세계 각국을 가늠해보았더니 내로라하는 경제대국들의 지수는 형편없이 낮은 반면 덴마크와 네덜란드 같이 국토도 작고 인구도 적은 나라들의 지수가 훨씬 높게 나왔다. 우리도 그런 나라들처럼 작지만 삶의 질이 높은 나라가 되려고 노력하는 것이 보다 현실적이고 바람직한 일이 아닐까. 국제정치에는 문외한이지만 나는 종종 우리 나라는 남북통일과 함께 중립국가가 되면 어떨까 하는 사뭇 위험한 생각도 해본다. 또 그걸 전제로 북측과 협상을 하면 의외로 많은 문제들이 쉽게 풀리지 않을까 하는 짧은 생각까지 해본다.

이제 어디로 가고 있는지도 모른 채 마냥 헐떡이며 달리기만 하는 어리석은 짓은 그만했으면 한다. 현실적인 목표를 설정하고 삶의 질을 우선하는 정책들을 수립하여 현명하게 살자. 오르지 못할 나무는 쳐다보지도 말라했다. 그 말은 삶을 아예 포기하라는 것이 아니라 오를만한 나무를 골라 오르라는 얘기다. 우리 나라 사람들은 산에 가면 무조건 정상을 향해 돌진한다. 마치 그렇지 않으면 산에 온 의미가 없는 것처럼. 학생들과 산행을 할 때도 비슷한 일이 벌어진다. 산악인이기 이전에 생태학자인 나는 자연히 산에 있는 온갖 생물들을 들여다보기 바빠 종종 중턱까지 가다가 하산하는 일이 많다. 몇몇 학생들은 언제나 불만이다. 산에 왔는데 정상을 정복하지 못한다는 것은 엄청난 수치인 것처럼 생각하는 그들에게 나는 먼저 오르라고 허락한다. 하루를 마치고 저녁이 되면 우린 그 날 관찰한 자연의 모습에 대해 토론을 시작한다. 헐레벌떡 정상에 다녀온 학생들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한다.

알면 사랑한다

화석 증거에 의하면 지구상에 태어나 지금까지 살고 있거나 이미 사라져간 모든 생물들 중 인간은 거의 막둥이다.  분자유전학적 분석결과에 따르면 인류와 침팬지가 하나의 공동조상으로부터 분화된 것은 지금으로부터 불과 600만년 전의 일이다. 600만년이란 시간은 진화사의 관점에서 보면 그리 긴 시간이 아니다. 지구의 역사를 하루에 비유한다면 11시 59분 50초가 지난 시각이었다. 현대 인류가 탄생한 것은 그보다도 훨씬 최근인 15만 내지 23만년 전의 일이고 보면 인간은 그야말로 순간에 '창조'된 동물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리고 현재 우리 인류가 저지르고 있는 환경파괴 및 온갖 행동들을 보면 어쩌면 우리는 또 순간에 사라지고 말 동물처럼 보인다. 셰익스피어의 표현을 빌리자면 "인간은 역사의 무대에 잠깐 등장하여 충분히 이해하지도 못하는 역할을 하다가 사라진다." 먼 훗날 이 지구상에 인간에 버금가거나 능가하는 생명체가 탄생하여 지구의 역사를 재정리한다면 과연 우리 인간을 어떻게 평가할 것인가? 우선 그들의 역사책에 거의 언급조차 되지 않을 확률도 매우 높다고 본다. 워낙 짧게 살다가 절멸한 종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달리 보면 워낙 저질러놓은 일들이 엄청나 비록 그리 긴 세월을 생존하지 못했다 하더라도 퍽 중요했던 종으로 기록될 가능성 역시 높다.

인간이 진화의 결과로 탄생한 것은 분명하지만 진화가 우리 인류를 탄생시키기 위해 만들어진 과정은 아니다. 자연선택은 어떤 목표를 향해 합목적적으로 진행되는 미래지향적 과정도 아니며 보다 나은 미래를 위해 모든 합리적인 해결방법을 총동원할 수 있는 공학적인 과정도 아니다. 그래서 적자생존의 과정을 수없이 반복하고 난 결과는 어쩔 수 없이 완벽한 인간의 등장일 수밖에 없다는 식의 생각은 지나친 인본주의 또는 인간중심주의의 결과에 지나지 않는다. 생명은 이처럼 지극히 낭비적이고 기계적이며 미래지향적이지도 못하고 다분히 비인간적인 과정에 의해 창조되었다. 하지만 그처럼 부실해 보이는 과정이 오랜 세월 동안 수많은 단계들을 거듭하며 선택의 결과들을 누적시킨 끝에 오늘날 이처럼 정교하고 훌륭한 적응 현상들을 낳은 것이다.

성경에 따르지 않더라도 인간은 이 자연의 청지기 역할을 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 군림하고 통치하는 지배자가 아니라 아끼고 보살피는 보호자가 되어야 우리 자신도 오랫동안 이 곳에 살 자격을 유지할 수 있다. 우리 인간이 어우름의 지혜를 터득하여 실천하는(eco-smart) 시대가 되었으면 한다.

이제 다시금 중대한 전환기에 놓인 우리 인류가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스스로의 참 모습을 찾아 철저하게 분석하는 일이다. 우리 인간이 신의 선택을 받아 자연 위에 군림할 자격을 갖춘 것이 아니라, 다른 모든 생명체들과 마찬가지로 진화의 산물이며 자연의 일부라는 겸허한 자기인식에서 다시 시작해야 한다. 하지만 이 같은 자기인식은 자칫 공허할 수 있는 구호에서 출발해서는 안 된다. 철저하게 과학적인 분석이 필요하다.

나는 "알면 사랑한다"라는 말을 좌우명처럼 떠들며 다닌다. 섣불리 알기 때문에 서로 미워하고 질시한다고 믿는다. 자기 자신은 물론 다른 생명에 대해서도 철저하게 알게되면 사랑할 수밖에 없는 것이 우리의 심성이다. 우리가 지금 처해 있는 위기는 역시 앎에 대한 노력에서 출발할 것이다.

[발제자 소개]
 최재천 :
서울대 생물학과 교수로 '개미제국의 발견', '곤충과 거미류의 사회행동의 진화'와 '인간은 왜 병에 걸리는가(역서)'를 펴낸 바 있다. 현재 한국일보에 '동물과 인간, 인간과 동물' 시리즈를 쓰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