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과학과 우주생명
장 회익
현 서울대학교 물리학과 교수이며, '
자연과학개론', '과학과 메타과학' '삶과 온생명' 등의 저서가 있음

소제목
1."아는 것이 눈 이다"
2."온생명,낱생명,보생명"이란?

베이컨-"아는 것이 힘"
이제 20세기가 끝나고 21세기로 넘어간다, 또는 새로운 천년이 온다고 해서 여러 가지 기대와 우려들을 하고 있습니다. 2천년이라는 것은, 기독교적 산출방식에 근거한 것이죠. 그래서 기독교에서는 특별히 더 의미를 부여할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자연과학을 하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시간의 기준은 임의로 잡을 수 있고, 그것이 10, 100, 1000이라는 것은 특별한 이유가 없습니다. 우리가 십진법을 쓰다보니까 거기에 맞췄을 뿐이죠. 사실은 1999에서 2000으로 넘어간다 할 때 특별한 이유를 붙이고, 의미를 찾는 것은 어렵습니다. 물론 사회적, 심리적 맥락에서 의미가 있고, 기독교 입장에서는 다른 의미를 찾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자연과학에서 이해하고 있는 역사를 통해 볼 때, 이 시기는 묘한 시기입니다. 지금까지 인류는 생존을 위한 여건의 부족을 느꼈습니다. 쉽게 말하면 궁핍을 느꼈던 거죠. 그래서 어떻게 하면 필요한 소재를 좀 더 효과적으로 찾아올 수 있느냐 하는 것이 역사의 추진력이 되어왔습니다. 열심히 하면 뭔가를 얻게 되고, 그것이 선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근면 자체가 선이 되고 우리 가치관의 기반이 되었죠. 그런데 이 시기를 넘어가면서 이제는 우리가 얻을 수 있는 방법은 상당히 마련했고 어느 의미에서는 지나치게 마련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얻는다는 것이 불분명해졌고, 생각했던 것을 그대로 하다보니까 오히려 안한 것만 못한 상황이 벌어지기 시작했습니다. 예를 들어 우리 나라에선 영산강 간척사업을 벌이다가 취소하고, 네덜란드도 상당한 땅을 바다로 환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스위스, 독일에서는 강변에 쌓아둔 둑을 다시 허물고 자연적인 것으로 바꾸고 있습니다. 이젠 무엇을 어떻게 발생하느냐 하는 문제보다는 무엇을 해야 되느냐 하는 문제가 주된 문제로 대두되고 있습니다. 앞으로 역사의 주된 추진력으로 되어갈 분기점이 이 시기라고 저는 보고 있습니다.

서구의 근대문명을 이룩한 가장 유명한 말은 베이컨의 '아는 것이 힘이다'라고 생각합니다. 우린 힘이 필요했어요. 그래서 과학을 발전시켰고 그 힘에 의해서 엄청나게 뭔가를 할 수가 있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물론 복합적인 의미지만 순수하게 에너지적인 측면만 보더라도 오로지 우리 체력, 그 다음엔 소나 말을 사용해서 그 힘을 약간 빌리는 것이 활용할 수 있는 동력의 전부였다가 지금은 그것의 천 배, 만 배를 손쉽게 쓰고 있어요. 보통 자동차는 쉽게 얘기해서 100마력 동력을 냅니다. 100마력이라는 것은 말 100마리가 끄는 힘입니다. 말 한 마리가 사람의 힘의 대여섯 배 힘을 내니까 사람의 500배를 들여서 우리가 움직이고 있다는 것입니다.

눈으로서의 과학
그러나 이젠 힘으로서의 과학보다는 눈으로서의 과학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아는 것은 눈이다' 또는 힘으로서의 과학에 대해서 이제는 '눈으로서의 과학'의 시대를 맞이한 것입니다. 과학은 눈이 먼저고 그 다음이 힘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알았기 때문에 힘을 얻을 수 있었던 것이고, 안다는 것은 사물을 넓게 본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까지는 목적이 이미 설정되고, 목적 수행을 위해서만 알기 때문에 좁은 분야의 정밀한 지식만을 중시했습니다. 그것을 엮어서 전체 시야를 열어주는 지식은 중히 여기지 않았습니다. 그러니까 부분은 있지만 전부 엮어서 우리의 앞날과 과거와 그리고 우리가 살아가는 모습을 보여줄 수 있는 측면을 중히 여기지 않은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오늘 말씀드리려는 것은 지금까지 우리가 받아놓은 것들을 대략 엮어볼 때 도움이 될 거라 여겨지는 것입니다.

'현대 문명은 문제가 있다'고 하는 것은 지금 대부분의 사람이 인정하고 있습니다. 다만 그것을 어떻게 해결할 수 있느냐 하는데 대한 시각에 상당한 차이들이 있는 거죠. 대다수의 사람들은 과학기술로 해결할 수 있다고 신뢰하고 있습니다. 경제력을 가지고 해결을 할 수 있다는 생각도 상당히 하고 있습니다. 반면에 신과학이라든가, 생태 문제를 생각하는 사람들은 대체로 기계론적인 세계관과 인간 중심적 가치관을 비판합니다.

기계론적 세계관
기계론적 세계관이란 말을 많이 씁니다. 역사적으로 볼 때 기계론적인 자연관과 대조되는 것은 목적론적 세계관입니다. 옛날에는 모든 것이 뭔가 하고 싶어하는 의지를 갖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신성에 해당하는 것을 돌이나 자연, 냇물, 바람 등 자연계에 다 깔고 자연을 이해하는 시기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어떤 어려움이 있으면 나무에 가서 빌기도 하고 어떤 신을 달래보기도 하고 그렇게 해왔는데, 자연은 법칙에 의해서 움직일 뿐이라는 새로운 사고, 이것이 근대 과학을 일으킨 생각입니다. 그것을 목적론적 사고에 비해서 기계론적인 사고라고 명칭을 붙인 거죠. 그리고 그것을 기계라는 것으로 모형화한 것이죠.

그런데 우리가 흔히 기계론적 사고의 전형이라고 얘기하는 갈릴레오, 뉴턴, 이러한 사람들의 고전역학만 하더라도 그러한 단순한 기계론적인 사고를 넘어선 것입니다. 기계론적 사고란 것은 쉼없이 맞물려 서로 힘을 미치는 것인데 고전역학에서는 멀리 떨어져 있으면서도 힘을 주고받을 수가 있어요. 그래서 이미 그것을 넘어서고 있는 것인데 자연에 대한 합법칙적 질서로 움직이는 자연관이라고 하는 것이 가장 중립적인 표현이 될 겁니다. 그런데 이것을 기계론적 사고라 해서 상당히 부정적인 인상을 심어주고 있는 거예요. 사물, 사람을 기계로 보는 걸 기분 좋아할 사람은 아무도 없죠. 과연 우리가 뉴턴의 고전역학을 얼마나 흡수하고, 왜 그것 때문에 우리가 이런 일을 저지르고 있느냐 하는 것에 대한 깊은 생각을 별로 해보고 있질 않아요.

저는 과학서적을 통해서 언제, 누가 최초로 우리 동양에서 또는 한국 지성인 중에서 뉴턴의 고전역학을 이해했나 하고 살펴봤더니 없어요. 적어도 17세기부터 서구사상들이 들어왔지만 19세기말까지 뉴턴의 고전역학을 제대로 언급하고 있는 사람조차 거의 없어요. 아주 피상적인 이해만 하고 있고 아마도 외국 선교사들이 학교를 세우고 거기서 물리란 과목을 가르치기 시작하면서 비로소 조금씩 이해한 사람이 생겨났을 것입니다. 그러면 현대의 한국인들은 얼마나 뉴턴의 고전역학을 이해하고 있을까. 저는 대학에서 가르치고 있는 입장이기 때문에, 또 직접 배워봤기 때문에 그 점에 대해서는 비교적 잘 얘기할 수 있습니다. 솔직히 말하면  물리학과를 졸업했지만 눈을 감고 내가 고전역학을 아는가 자문해보면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요. 지금 제가 가르치고 있지만 그것이 그렇게 단순하질 않아요. 한두 문제를 푸는 것까지는 쉽지만 전체의 고전역학의 모습이 어떤가, 이것이 어떠한 사고의 패턴을 가지고 있느냐 하는 것을 보기까지는 굉장히 어렵습니다.

고전역학을 아주 쉽게 얘기하면 합법칙적인 질서를 가지고 자연계를 설명하는 건데, 그 질서가 어떤 구조를 가지고 있다는 겁니다. 그래서 인간이 사물을 설명하는 모범적인, 가장 간단한 패턴을 그 안에 담고 있습니다. 그것을 가지면 그것이 절대 진
리라는 뜻이 아니라 적어도 사물을 이론적으로 설명하는 형태를 제대로 갖춘 최초의 이론이라는 거예요. 지금 우리 주변에서 이미 자연 파괴가 일어나고 있지요. 그런데 어째서 고전역학을 이해했기 때문에 자연파괴를 일으켰다고 볼 수 있느냐 이거예요. 전혀 맞는 얘기가 아니예요. 서구에서도 마찬가지예요. 그 사람들은 자생적으로 과학을 발전시켰지만 엄연히 말하면, 그 중에 극소수에 가까운 사람들만이 고전역학을 제대로 이해하고 있는 사람이예요.

그런데 그 고전역학에 따른 기계적인 사고 때문에 우리가 자연계를 이렇게 파괴했다는 것은 전혀 얘기가 되지 않아요. 물론 이런 점은 있습니다. 자연을 합법칙적으로 이해했기 때문에 자연계가 어떤 영을 가지고 있고 또 보이지 않는 힘을 가지고 있어서 함부로 건드리면 나를 해칠 수가 있다는 위험이 없다는 것을 알 수는 있지요. 그러니까 맘대로 만질 수 있게 하죠. 과거에는 산을 건드리면 큰일난다고 생각했는데 지금은 그냥 그저 단순한 물질에 불과해요. 산을 건드리고 싶은 것이 꼭 나쁜 것만은 아니라고 전 얘기하고 싶습니다. 정도가 넘으면 문제
죠. 정도가 넘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욕망을 가지고 있는 것이 문제지 고전 역학적인 사고를 가졌다는 것이 문제가 되지는 않는다는 거죠. 그렇기 때문에 기계론적 세계관이 문제를 일으켰다고 하는 것은 우리의 지성을 밀어내는 효과를 보이고 있습니다. 동시에, 진정한 원인을 찾는데 방해가 되는, 가짜를 갖다 놓고 저게 주범이다 하고 있는 사실은 위험이 있다는 것을 저는 과학하는 사람으로서 조금 말씀을 드립니다.

그 다음에 인간 중심적 가치관이라는 또 하나의 얘기가 있습니다. 과거의 신 중심, 또는 좁은 의미의 종족 중심, 신분 중심, 제도 중심, 물신 중심 등등의 부정적인 가치관- 제일 처음의 신 중심에 대해서는 별도로 얘기하겠습니다만 - 에 대해 인간 중심적인 가치관은 상당히 긍정적인 면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넘어선 생태 중심이라든가 생명 중심 등의 가치관에 비해서는 이것이 문제가 있는 거죠. 사실 우리가 인간의 보편적인 가치를 인정한 것은 역사적으로 보면 얼마 안돼는 과거입니다. 그전까지는 타 인종이라든가 다른 나라의 사람은 위험하니까 없애야 한다는 사고까지 가지고 있었습니다. 암묵적으로 민족주의나 애국주의 속에는 그러한 내용도 들어있는 겁니다. 그러니까 인간중심이라고 하는 것은 적어도 거기에 대해서, 또 물질을
인간보다 더 중시하는 것에 대해서는 긍정적인 측면을 가지고 있지요. 그래서 지금도 거기까지 도달도 못했기 때문에 문제라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적지 않게 있습니다.

그러나 인간중심이라고 하는 것은, 새로운 생태문제로 넘어 갈 때는 여전히 문제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 이유는 몇 가지가 있는데, 지금도 환경윤리를 이야기하는 사람들 중에는 인간중심 가치관을 강력하게 주장하고 있는 사람들이 상당히 많이 있습니다. 우리가 환경을 보호하지 않고, 생태계를 보호하지 않으면 결국 인간이 해를 입는다. 인간이 살기 위해서는 - 현재 우리가 살아있는 인간만이 아니라 앞으로 살아야 될 그 인간이 살기 위해서는 - 하지 않을 수 없는 일이다라는 논리를 펴고 있어요. 그것은 논리적으로는 맞는 측면이 있습니다. 그런데 현실적으로는 문제가 많이 있어요. 우리가 완벽하게 아는가의 문제입니다. 분명하지 않으면 우리한테 편리한 쪽으로 결정을 해버린다 이거죠. 또 우리가 살면서 얼굴 보는 사람, 저 사람이 지금 밥을 굶고 있는데 10년, 100년 후에 있을 사람이 밥을 먹기 위해서 지금 저 사람이 밥을 굶어야 하느냐 하는 문제가 현실적으로 나오고 있어요. 그래서 가치관이 거기서 멈춰버리면 굉장히 위험이 있는 거죠. 그러니까 우리가 현재로서 인간중심 가치관을 철저히 신봉한다고 하더라도, 거기까지 간다 하더라도 이 문제는 대단히 어려운 거죠. 저도 인간중심 가치관으로서는 부족하고 뭔가 한 단계는 넘어가야 하는데 어떻게 넘어가느냐 하는 문제가 대단히 어렵습니다. 예를 들어서 생태를 중시한다고 할 때, 우리가 그걸 보호하지 않으면 인간에게 해가 오기 때문에 한다면 여전히 인간 중심적인 가치관 속에 있는 거죠. 인간 이외의 대상에 본원적인 가치를 부여한다는 것은 대단히 어렵습니다. 그래서 그 논리를 제대로 마련하지 못하면 그걸 넘어서기가 어려운 거죠.

패러다임의 전환과 그 의미
그래서 이것을 극복한 방안 몇 가지를 내세우고 있는데요, 그 중에서 우리의 세계관, 가치관을 유기체적인 것으로 전환을 해야한다는 얘기를 하고 있습니다. 기계론적인 세계관에서부터 목적론적인 세계관, 다시 과학 이전의 상태로 되돌려 보자는 거죠. 우리가 몰랐던 것을 알아서 그렇게 넘어온 측면이 많은데 다시 알았던 걸 취소하고 모르는 걸로 가자. 이것은 아무리 현실적인 도움을 주더라도 대단히 어려운 거죠. 흔히 패러다임을 바꾼다는 말을 합니다. 그런데 사실 패러다임은 긍정적인 내용이 아니라 부정적인 내용을 보여주는 거예요. 우리가 아무리 진리를 찾는다 해도 결국 따지고 보면 또 하나의 패러다임에 묶여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적어도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은 가장 진리에 가까운 곳으로 가는 거지, 무슨 패러다임을 추구하는 것은 아니예요. 그런데 다른 사람이, 후에 보면 아, 그 때 그 사람들은 이러한 패러다임에 묶여 있었구나, 이렇게 되는 거죠. 패러다임을 바꿔서 유기체적인 것으로 가자고 아무리 부르짖어야 우리는 진리를 찾는 것이 앞서는 것이지 진리가 아닌데 어떤 다른 이유 때문에 그것을 내가 가지느냐 이것은 전혀 현실적으로 통하는 문제가 아니다 이거예요. 그래서 그것은 대단히 부적합하다. 물론 생태적인 의식을 가지자는 것은 대단히 중요합니다. 지금 여기서도 '생태적 삶' 이라는 말을 하고 있는데,  생태적인 의식을 가지고 본다는 것은 패러다임의 전환이 아니고 사실을, 생태적인 상황을 더 분명히 이해하는 측면이라고 저는 보고 있어요. 그래서 패러다임 전환이라고 하는 말은 하나의 구호일 뿐이며, 그것이 의미를 가지려면 거기에 뭔가 더 얹어지는 것이 있어야 한다는 얘기를 해야 될것 같습니다.

동양사상의 모색
또 하나의 얘기는 동양사상으로 복귀해보자 하는 얘기들입니다. 물론 동양사상은 서구사상하고 상당한 차이가 있습니다. 서구에서는 사실 대인지식(對人知識), 또는 인품, 인격 쪽과 물질을 분리함으로써 각각 독립적인 학문체계를 구성했기 때문에 정교한 과학이라고 하는 것을 성취해낼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동양에서는 그 둘을 한데 섞어서 우리의 삶을 어떻게 성공적으로 또 의미 있게 만드는지 관심을 갖습니다. 즉 동양에서의 학문추구라고 하는 것은 앎 자체가 아니고 앎을 통해서 어떻게 사람이 되느냐 하는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기본적인 전제가 상당한 균형을 잡고 있어요. 그래서 그 틀 안에서의 사물에 대한 이해는 곧 그 틀 안에서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된다는 것하고 연결되고 있기 때문에 큰 의미에서는 지금 서구문명과 같은 이런 불균형을 초래하지는 않는 측면이 있지요. 따라서 만약 동양적인 사고만 가지고 있었더라면 현대문명의 위기는 오지 않았을는지 모르겠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다시 동양적인 것으로 가보자 하는 것은 이것은 문제가 많다고 생각합니다. 동양적인 것의 장점도 있지만 약점은 사실을 사실대로 정확하
게 보는 눈이 상당히 어둡다는 겁니다. 그래서 현대과학의 '눈으로서의 과학'이 무엇을 말해주느냐 하는 것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과학이 사물을 명료하게 본다고 하는 것은 틀림없어요. 그렇지 않았더라면 이런 기술문명도 만들 수 없는 거죠. 우리가 과학기술의 힘을 이만큼 발휘한다는 자체는 그 밑에 그만큼 꿰뚫어 보는 눈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전체를 내다보는 눈은 과학에서도 부족합니다.  사실상 지금 현대과학의 가장 큰 문제가 바로 그 점이라고 봐요. 현대과학이 아는 것도 꽤 있는데 이것을 종합해서 전체적인 시야를 열어주는 데는 부족하다는 것이죠. 과학자들은 부분부분은 굉장히 많이 알지만 그 사람보고 옆에 것에 대해 얘기해 보라, 그러면 내 전공이 아니다 하고 전부 피하죠. 수백 개의 전공으로 갈라져서 조각조각 나뉘어져 있어요. 그러니까 어떻게든지 연결해서 전체적인 시야를 얻지 않으면 지금 이 문명의 기계는 굉장히 위험하게 달릴 수 있다는 상황에 놓여 있고 그것을 해내는 것을 저는 과학의 문화적 측면이라고 얘기해 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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