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과학과 우주생명 소제목 베이컨-"아는 것이 힘" 서구의 근대문명을 이룩한 가장 유명한 말은 베이컨의 '아는 것이 힘이다'라고 생각합니다. 우린 힘이 필요했어요. 그래서 과학을 발전시켰고 그 힘에 의해서 엄청나게 뭔가를 할 수가 있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물론 복합적인 의미지만 순수하게 에너지적인 측면만 보더라도 오로지 우리 체력, 그 다음엔 소나 말을 사용해서 그 힘을 약간 빌리는 것이 활용할 수 있는 동력의 전부였다가 지금은 그것의 천 배, 만 배를 손쉽게 쓰고 있어요. 보통 자동차는 쉽게 얘기해서 100마력 동력을 냅니다. 100마력이라는 것은 말 100마리가 끄는 힘입니다. 말 한 마리가 사람의 힘의 대여섯 배 힘을 내니까 사람의 500배를 들여서 우리가 움직이고 있다는 것입니다. 눈으로서의 과학 '현대 문명은 문제가 있다'고 하는 것은 지금 대부분의 사람이 인정하고 있습니다. 다만 그것을 어떻게 해결할 수 있느냐 하는데 대한 시각에 상당한 차이들이 있는 거죠. 대다수의 사람들은 과학기술로 해결할 수 있다고 신뢰하고 있습니다. 경제력을 가지고 해결을 할 수 있다는 생각도 상당히 하고 있습니다. 반면에 신과학이라든가, 생태 문제를 생각하는 사람들은 대체로 기계론적인 세계관과 인간 중심적 가치관을 비판합니다. 기계론적 세계관 그런데 우리가 흔히 기계론적 사고의 전형이라고 얘기하는 갈릴레오, 뉴턴, 이러한 사람들의 고전역학만 하더라도 그러한 단순한 기계론적인 사고를 넘어선 것입니다. 기계론적 사고란 것은 쉼없이 맞물려 서로 힘을 미치는 것인데 고전역학에서는 멀리 떨어져 있으면서도 힘을 주고받을 수가 있어요. 그래서 이미 그것을 넘어서고 있는 것인데 자연에 대한 합법칙적 질서로 움직이는 자연관이라고 하는 것이 가장 중립적인 표현이 될 겁니다. 그런데 이것을 기계론적 사고라 해서 상당히 부정적인 인상을 심어주고 있는 거예요. 사물, 사람을 기계로 보는 걸 기분 좋아할 사람은 아무도 없죠. 과연 우리가 뉴턴의 고전역학을 얼마나 흡수하고, 왜 그것 때문에 우리가 이런 일을 저지르고 있느냐 하는 것에 대한 깊은 생각을 별로 해보고 있질 않아요. 저는 과학서적을 통해서 언제, 누가 최초로 우리 동양에서 또는 한국 지성인 중에서 뉴턴의 고전역학을 이해했나 하고 살펴봤더니 없어요. 적어도 17세기부터 서구사상들이 들어왔지만 19세기말까지 뉴턴의 고전역학을 제대로 언급하고 있는 사람조차 거의 없어요. 아주 피상적인 이해만 하고 있고 아마도 외국 선교사들이 학교를 세우고 거기서 물리란 과목을 가르치기 시작하면서 비로소 조금씩 이해한 사람이 생겨났을 것입니다. 그러면 현대의 한국인들은 얼마나 뉴턴의 고전역학을 이해하고 있을까. 저는 대학에서 가르치고 있는 입장이기 때문에, 또 직접 배워봤기 때문에 그 점에 대해서는 비교적 잘 얘기할 수 있습니다. 솔직히 말하면 물리학과를 졸업했지만 눈을 감고 내가 고전역학을 아는가 자문해보면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요. 지금 제가 가르치고 있지만 그것이 그렇게 단순하질 않아요. 한두 문제를 푸는 것까지는 쉽지만 전체의 고전역학의 모습이 어떤가, 이것이 어떠한 사고의 패턴을 가지고 있느냐 하는 것을 보기까지는 굉장히 어렵습니다. 고전역학을 아주 쉽게 얘기하면 합법칙적인
질서를 가지고 자연계를 설명하는 건데, 그 질서가 어떤 구조를 가지고
있다는 겁니다. 그래서 인간이 사물을 설명하는 모범적인, 가장 간단한
패턴을 그 안에 담고 있습니다. 그것을 가지면 그것이 절대 진 그런데 그 고전역학에 따른 기계적인
사고 때문에 우리가 자연계를 이렇게 파괴했다는 것은 전혀 얘기가 되지
않아요. 물론 이런 점은 있습니다. 자연을 합법칙적으로 이해했기 때문에
자연계가 어떤 영을 가지고 있고 또 보이지 않는 힘을 가지고 있어서
함부로 건드리면 나를 해칠 수가 있다는 위험이 없다는 것을 알 수는
있지요. 그러니까 맘대로 만질 수 있게 하죠. 과거에는 산을 건드리면
큰일난다고 생각했는데 지금은 그냥 그저 단순한 물질에 불과해요. 산을
건드리고 싶은 것이 꼭 나쁜 것만은 아니라고 전 얘기하고 싶습니다.
정도가 넘으면 문제 그 다음에 인간 중심적 가치관이라는
또 하나의 얘기가 있습니다. 과거의 신 중심, 또는 좁은 의미의 종족
중심, 신분 중심, 제도 중심, 물신 중심 등등의 부정적인 가치관- 제일
처음의 신 중심에 대해서는 별도로 얘기하겠습니다만 - 에 대해 인간
중심적인 가치관은 상당히 긍정적인 면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넘어선 생태 중심이라든가 생명 중심 등의 가치관에 비해서는 이것이
문제가 있는 거죠. 사실 우리가 인간의 보편적인 가치를 인정한 것은
역사적으로 보면 얼마 안돼는 과거입니다. 그전까지는 타 인종이라든가
다른 나라의 사람은 위험하니까 없애야 한다는 사고까지 가지고 있었습니다.
암묵적으로 민족주의나 애국주의 속에는 그러한 내용도 들어있는 겁니다.
그러니까 인간중심이라고 하는 것은 적어도 거기에 대해서, 또 물질을
그러나 인간중심이라고 하는 것은, 새로운 생태문제로 넘어 갈 때는 여전히 문제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 이유는 몇 가지가 있는데, 지금도 환경윤리를 이야기하는 사람들 중에는 인간중심 가치관을 강력하게 주장하고 있는 사람들이 상당히 많이 있습니다. 우리가 환경을 보호하지 않고, 생태계를 보호하지 않으면 결국 인간이 해를 입는다. 인간이 살기 위해서는 - 현재 우리가 살아있는 인간만이 아니라 앞으로 살아야 될 그 인간이 살기 위해서는 - 하지 않을 수 없는 일이다라는 논리를 펴고 있어요. 그것은 논리적으로는 맞는 측면이 있습니다. 그런데 현실적으로는 문제가 많이 있어요. 우리가 완벽하게 아는가의 문제입니다. 분명하지 않으면 우리한테 편리한 쪽으로 결정을 해버린다 이거죠. 또 우리가 살면서 얼굴 보는 사람, 저 사람이 지금 밥을 굶고 있는데 10년, 100년 후에 있을 사람이 밥을 먹기 위해서 지금 저 사람이 밥을 굶어야 하느냐 하는 문제가 현실적으로 나오고 있어요. 그래서 가치관이 거기서 멈춰버리면 굉장히 위험이 있는 거죠. 그러니까 우리가 현재로서 인간중심 가치관을 철저히 신봉한다고 하더라도, 거기까지 간다 하더라도 이 문제는 대단히 어려운 거죠. 저도 인간중심 가치관으로서는 부족하고 뭔가 한 단계는 넘어가야 하는데 어떻게 넘어가느냐 하는 문제가 대단히 어렵습니다. 예를 들어서 생태를 중시한다고 할 때, 우리가 그걸 보호하지 않으면 인간에게 해가 오기 때문에 한다면 여전히 인간 중심적인 가치관 속에 있는 거죠. 인간 이외의 대상에 본원적인 가치를 부여한다는 것은 대단히 어렵습니다. 그래서 그 논리를 제대로 마련하지 못하면 그걸 넘어서기가 어려운 거죠. 패러다임의 전환과 그 의미 그러나 적어도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은 가장 진리에 가까운 곳으로 가는 거지, 무슨 패러다임을 추구하는 것은 아니예요. 그런데 다른 사람이, 후에 보면 아, 그 때 그 사람들은 이러한 패러다임에 묶여 있었구나, 이렇게 되는 거죠. 패러다임을 바꿔서 유기체적인 것으로 가자고 아무리 부르짖어야 우리는 진리를 찾는 것이 앞서는 것이지 진리가 아닌데 어떤 다른 이유 때문에 그것을 내가 가지느냐 이것은 전혀 현실적으로 통하는 문제가 아니다 이거예요. 그래서 그것은 대단히 부적합하다. 물론 생태적인 의식을 가지자는 것은 대단히 중요합니다. 지금 여기서도 '생태적 삶' 이라는 말을 하고 있는데, 생태적인 의식을 가지고 본다는 것은 패러다임의 전환이 아니고 사실을, 생태적인 상황을 더 분명히 이해하는 측면이라고 저는 보고 있어요. 그래서 패러다임 전환이라고 하는 말은 하나의 구호일 뿐이며, 그것이 의미를 가지려면 거기에 뭔가 더 얹어지는 것이 있어야 한다는 얘기를 해야 될것 같습니다. 동양사상의 모색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다시 동양적인
것으로 가보자 하는 것은 이것은 문제가 많다고 생각합니다. 동양적인
것의 장점도 있지만 약점은 사실을 사실대로 정확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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