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자연의 이치와 소우주로서의 인체
- 자연을 보는 눈 -
박석준( 한의사)
저자는 현재 동일한의원 원장으로 있으면서, '몸(머리는 하늘, 발은 땅)'이라는책을 펴냈다
.

소제목
1.오행과 쌀밥
2. 한의학에 자연이 있는가?
 
3.몸이란 무엇인가?

 오행과 쌀(밥)
옛날 중국에 장영이라는 사람이 한국 사람들이 밥을 잘 짓는데 쌀에 윤기가 흐르며 흩어지지 않고 향이 좋다라는 말을 했습니다. 그렇게 지으려면 쌀뜨물을 버리지 않고 밥을 지을 때 같이 넣어 지어야 합니다. 한의학적으로 봤을 때 가장 평(平)한 음식입니다. 평하다라는 것은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모든 기준 중에서 쌀이 제일 가운데에 있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한의학에서는 음식을 기(氣)와 미(味)로 나눕니다. 고추나 마늘을 먹었을 때 열이 나는 것은 기가 위로 올라가는 것이고 설사가 나는 것은 기가 아래로 내려가는 것이죠. 이것을 기(氣)라고 합니다. 그리고 미(味)라는 측면에서는 맛이 짜다, 달다, 맵다 등과 같은 것을 말하는데 쌀은 어느 한 쪽에 치우치지 않고 가운데에 있는 음식입니다. 쌀은 어느 음식하고도 잘 어울리는 것으로 한의학의 오행(五行)중에 토(土)에 해당합니다. 또 밥을 지어먹을 때 불(火)을 때지 않습니까? 나무를 때게 되는데 그것이 목(木)입니다. 밥을 지을 때 솥을 이용하죠. 그것이 금(金)이고 그 안에 물이 있잖습니까? 물은 오행 중에 수(水)에 해당합니다. 즉 밥을 지을 때는 오행을 사용하게 되는 것이죠.

그런데 압력밥솥으로 밥을 지으면 나무 불이 아닌 가스 불을 사용하게 됩니다. 라면을 끓여보면 아시겠지만 달걀을 넣으면 그 달걀이 잘 익지 않는 것을 보게 되실 겁니다. 그 이유는 물을 전체적으로 끊여 주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가스 불은 음식 맛을 내게 하는데는 적합하지 못한 것이죠. 한의학에서는 물이 끓는 것을 수(水)와의 교제라고 합니다. 서로 맞닿아서 교제하게 되고 변화가 돼서 모든 사물들이 좋은 것으로 된다는 것이겠죠. 그러나 압력솥에 압력을 넣어 물을 끓게 하면 순환이 되지 않습니다. 여기에 문제가 있습니다. 오행이 갖춰지지 않은 치우치는 음식을 먹게 된다는 것이죠.

한의학에 '자연'은 있는가 ?
한의학에서는 환경을 기(氣)라는 관점으로 봅니다. 기로써 사물을 온전하게 하는 것을 모색하는 것이죠. 한의학은 자연 친화적입니다. 자연(自然)이라고 할 때는 일반적으로 문화적인 관점에서 말을 합니다. 인위적이지 않다라는 것이죠. 본래 자연이라는 개념이 동양에는 없었어요. 그렇다면 자연과 가장 밀접한 동양적인 의미는 무엇일까요?

天地, 乾坤, 宇宙, 萬物, 萬有 등. "天地者 萬物之上下也"({素問} [陰陽應象大論]) "天覆地載"
{素問} [陰陽離合論])
천지라든가 건곤, 만유, 만물, 우주, 하늘은 땅을 덮고 있는 덮개라고 생각했습니다. 그 천지라는 개념은 근대의 자연이라는 개념과는 현격하게 다릅니다. 또한 만물이라는 개념도 하늘과 땅 사이에 있는 나머지 모든 물건을 말하는 것입니다. 우주의 우(宇)라는 것은 상하좌우(동서남북), 주(宙))라는 것은 시간을 말합니다. 공간과 시간의 개념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원래 동양에서는 자연과 물질이라는 개념은 없었다고 볼 수 있는 거죠. 다만 천지만물, 천지인(天地人)이라는 단어를 써서 모든 사물을 포괄하는 개념으로 썼던 것입니다. 적어도 근대에 이를 때까지는 자연이라는 개념은 없었다고 봐야 옳을 것입니다. 물론 그리스라든가 고대 철학에서 자연이라는 개념이 등장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직관적인 자연 또는 철학적인 자연 개념이었습니다. 자연과학의 대상으로서의 자연은 결코 아니었습니다. 자연의 철학적인 성격은 중세시대 스콜라 철학에 의해서 더욱 강화되었습니다. 근대에 접어들면서 경제적으로 자본주의가 발전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왜 자연이라는 개념, 근대적인 자연이라는 개념이 자본주의와 맞물려 생겨났을까요. 봉건주의에서의 생산이라는 것은 한 생산자가 어떤 물건을 생산하기까지의 과정을 총괄하는 것입니다. 한의학에 '행님'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옛날에는 한의사들이 직접 산에 가서 약초를 캐곤 했습니다. 양지나 음지에 말려야 하는 약초를 분류하고 판별할 줄 알았습니다. 적당히 부수거나 완전히 부수거나 비스듬히 자르거나 하는 것은 약의 효과 때문이었습니다. 또 불에 다릴 때도 약 불과 강 불로 달리 하였습니다. 한의학에서는 물의 종류가 많습니다. 오래된 병은 장류수라는 물로 끓이면 기가 느슨하게 흐르지만 오래갑니다. 이처럼 옛날 한의학에서는 한 사람이 모든 것을 총괄하였습니다. 그렇지만 소비와 생산이 구분되었던 자본주의 시대에는 생산자가 일일이 전체 시스템을 알 필요가 없게 되었습니다. 이 시스템이 자연을 분석의 대상으로 만들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밥을 짓는 것
도 마찬가지입니다. 전체와의 조화 속에서 이루어지던 것이 근대에 들어와서는 전체와 부분이 분리되었습니다. 이러한 태도와 실천은 당시 일반적인 것이었습니다.

왜 자연이라는 개념이 없는가 ?
동양에서의 자연이라는 개념은 '스스로 그러하다'라는 의미로 운동의 상태를 나타내는 단어였습니다. 이런 자연이라는 개념이 동양에서 쓰이기 시작한 것은 安藤昌益(1703-1762)이라는 일본사람에 의해서인데, 그는 자생적인 공산주의자라고 칭할 정도로 급진적인 생각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농업 생산력의 발전을 통해서 새로운 사회를 만들어 보겠다고 한 사람이죠. 저는 환경이라든지 생태학이라든지 하는 것이 농업을 기반으로 해서 나가는 운동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동양과 서양은 자연의 실천적인 관점의 차이가 있습니다. 동양의 한의학과 서양의 자연과학이 현격한 차이
가 있듯이. 동양에서는 전체와 부분이 분리되지 않은 자연의 변화를 추구했습니다. 거기에서 예외적인 것이 도교(道敎)였습니다. 도교의 특징은 두 가지로 볼 수 있는데, 하나는 연단술이요, 다른 하나는 연금술입니다. 연단술에는 내단과 외단이 있습니다. 내단은 기라는 것을 통해 장생불사
를, 외단은 연단술사들이 실험을 하면서 수은, 황 등의 중금속을 복용해보다가 죽기도 하고 부작용도 번번히 일어났습니다. 연금술은 금을 만드는 것인데, 이것은 대상에 대한 변화를 극단으로 몰고 갔습니다. 여하튼 도교는 연단술과 연금술을 통해 몸을 변화시키려고 했습니다. 물론 자연과의 전체적인 조화 속에서 추구한 것이었습니다. 동양이 전체와 부분을 나누지 않는 것은 농업 사회의 영향이 큽니다. 특히 쌀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쌀은 사시(四時)의 변화가 중요합니다. 인간이 해야 할 일은 그러한 사계절을 잘 살피고 따르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한의학에서는 도를 아는 사람은 다른 것이 아니고 음양을 본받고 양생법을 잘 깨우친 사람이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도를 깨우친 사람은 자연을 변화시키는 사람이 아니라 음양의 이치를 잘 본받고 잘 조화시킨 사람인 것이죠. 옛날에는 산을 옮기거나 길을 닦는 것을 굉장히 부정적으로 생각했습니다. 이러한 내면에는 자연과 인간이 하나라는 의식이 있었기 때문이죠. 심지어 한의학에서는 인간의 정서마저도 자연에게서 얻어지는 것으로 얘기하고 있습니다. 동의보감을 보면, "우주 안에서 사람이 가장 귀하니, 머리가 둥
근 것은 하늘을 본뜬 것이고 발이 모난 것은 땅을 본뜬 것이다. 하늘에 사시(四時)가 있듯이 사람에게는 사지(四肢)가 있고 하늘에 오행(五行)이 있듯이 사람에게는 오장(五臟)이 있다." 라고 했습니다. 인간이 자연과 동일한 운동의 논리뿐만 아니라 구조까지도 같다고 보는 겁니다.… 하늘에 해와 달이 있듯이 사람에게는 두 눈이 있고 하늘에 밤과 낮이 있는 것처럼 사람도 잘 때와 깰 때가 있다. 하늘에 천둥과 번개가 있듯이 사람에게는 기쁨과 분노가 있고 하늘에 비와 이슬이 있듯이 사람에게는 콧물과 눈물이 있다. 하늘에 음양이 있듯이 사람에게는 한열(寒熱)이 있다. 땅에 수맥(水脈)이 있듯이 사람에게는 혈맥(血脈)이 있고 땅에 풀과 나무가 있듯이 사람에게도 털과 머리카락이 있다. 땅에 쇠붙이와 돌이 있듯이 사람에게도 치아(齒牙)가 있다. 이 모두는 사대(四大)와 오행(五行)을 품부 받아 짐짓 합하여 잠시 형체를 이룬 것뿐이다." 인간은 그러한 자연의 구조와 똑같은 구조를 타고났기 때문에 그 자체가 그대로 작은 우주를 이룹니다. 이러한 소우주로서의 기 덩어리인 몸에 외부에서 사기(邪氣)의 작용이 있고 음식물 등에 의한 작용이 있으며 정신적 육체적 과로로 인한 작용이 있을 수 있습니다. 이런 내외의 기의 상호작용에 의해 병이 생깁니다.* 그러기에 자연을 정확히 알고 그 법칙에 따라서 사는 것이 건강하게 오래 살 수 있는 길입니다.

자연에 대한 동양적 분석
   동양에서 전체와 부분이 분리된 적이 없다고 말했는데, 그 분석이 전혀 없었다고는 볼 수 없습니다. 분석이 없이는 종합이라는 것도 있을 수 없죠. 동양에도 분석 방법이 있는데 물류상감(物類相感)이 그것입니다. 개별적인 사물들이 그 종류별로 서로 교감하고 있다고 보는 겁니다. 어떤 부류에 속하느냐, 어떤 기를 가지고 있느냐 하고 말하려면 분석을 해야 되겠죠. 이 때 기는 성분이 아니라 성질입니다. 그것이 아래로 내려가느냐, 끈적끈적하게 하느냐를 분석을 하는 거죠. 평이라는 것은 치우치지 않는 거죠. 중용과 같은 의미로 생각하면 됩니다.   환경문제를 거론하면서 자연을 어떻게 바꿀 것인가 논하기보다는 그 자연에 맞는 사회 구조를 설정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물이 오염이 되니까 샴푸를 사용하지 말자 하는 차원의 환경운동은 크게 성공하지 못할 것입니다. 전 세계의 농업을 유기농법으로 바꾼다면 인구의 상당수가 없어져야 할 지도 모릅니다. 유기농법의 생산력으로는 전세계의 인구를 다 먹여 살릴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한의학에는 작은 나라에 적은 백성들이라는 의미의 '소국과민'이라고 하는 이상적인 사회형태에 관한 말이 있습니다.  지금 우리는 그런 나라를 실현할 수가 없습니다. 만일 그러한 나라를 만들 수 있다고 하더라도 많은 시간과 노력이 필요할 것입니다. 따라서 환경운동을 하려면 환경운동을 할 수 있는 사회구조 내지는 토대를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서양적인 방법으로 갈 것이냐 아니면 한의학적인 동양적인 방법으로 갈 것이냐 하는 검토도 있어야 할 것입니다.

몸이란 무엇인가?
대상을 열린계로 보느냐 아니면 닫힌계로 보느냐 하는 시각이 있습니다. 우리 인체를 닫힌 계로 보는 것이 서양의학이죠. 이것은 세포면 세포, 분자면 분자, 원자면 원자가 일정한 자기 구조를 갖고 있다고 설정합니다. 만일 열려 있다면 그것은 물질로서 성립하지 않는다고 봅니다. 이러한 닫힌 계를 대상으로 했을 때는 항상 동일한 방법과 실험을 통해서 동일한 결과가 나올 수 있는 가능성이 있습니다. 반면에 열린 계는 그 때 그 때마다 다른 실험결과가 나오기 마련입니다. 근대 서양과학은 자연을 닫힌 계로 보았고, 동양은 열린 계로 보았습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몸을 포함한 온 우주를 하나의 '기'로 보기 때문입니다. 우리 몸에는 크게 12가지 경락(經絡)이 있고, 그 자리를 기(氣)가 통과하고 있습니다. 기가 폐에서부터 흘러서 몸의 여기 저기를 돌다가 폐라는 곳에 가서 잠깐 모양을 만들고 이것이 다시 다른 것과 연결이 되어서 간경이 있는 곳에서 간이라는 것을 만들어냅니다. 이런 식으로 다 열려있습니다. 이를테면 물이 동일한 수원에서 나와 흘러가다가 'A'라는 저수지를 만들고 'B'라는 호수를 만들고 이런 식으로 본 것입니다. 인간은 오장육부가 있습니다. 그리고 몸의 내부와 외부를 연결시켜주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입도 될 수 있겠고 오감도 될 수 있겠죠. 이런 것들이 다 외부와 내부를 연결시켜주는 것이 됩니다. 우리가 감기에 걸릴 때 피부 등을 통해 외부와 연결되겠죠. 그리고
자연이라는것이 있고 인간과 인간 사이의 관계가 있습니다.

그래서 동양이나 한의학에서는 하나하나를 나누는 것이 아니라 그것들이 조화를 이루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가화만사성(家和萬事成)이라고 말할 때 '화(和)'라는말이 있습니다. 이 말은 '화목하다'로 풀 수 있지만, '조화롭다'라는 의미에 더 가깝습니다. 이를테면 아버지와 아들이 친구처럼 지내는 집도 있지만, 옛날 사람들이 봤을 때는 그게 아니죠. 아버지는 아버지로서의 역할이 있는 것이고, 그 당시는 가부장 사회니까 아버지의 권위와 무게가 좀 있어야 되는 거죠. 이런 식으로 화가 이루어진 것이, 화가 이루어진 것이라고 봤던 겁니다. 이것은 인간간의 관계뿐만 아니라 인간의 오장육부와의 조화, 또 외부와 내부간의 조화가 되어야 하는 것이죠. 인간과 인간 사이의 관계에서도, 자연과 인간간의 관계에서도 조화가 이루어져야 하는 것이죠. 이런 생각들이 잘못 이해되어서 동양적인 세계, 한의학적인 세계는 화해와 조화로만 이루어져 있다고 봅니다. 그래서 어떤 변화나 변혁에 있어서 투쟁의지를 말살시키는 것으로 오해되어 왔습니다. 물론 잘못된 부분도 있습니다. 그런 것은 주역체계를 따랐기 때문에 그런 것인데, 이를테면 남존여비같은 것들이죠. 천(天)은 높은 것이며 고귀한 것이고 지(地)는 낮은 것이며 비참한 것이고, 천(天)은 남자고 지(地)는 여자고, 남자는 세고 여자는 나쁘며 약하고. 그런 식으로 사회에 가치를 부여하고 사회질서를 유지하려고 했던 점에서는 문제가 상당히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당시 남존여비, 가부장적인 사회 구조가 아니었더라면 당시 사회는 유지되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 사회에서 페미니즘을 주장한다는 것은 반 사회적이고 사회생산력을 깨뜨리는 결과를 가져왔을 것입니다. 페미니즘이 언제 나왔습니까? 여자들이 생산력으로 활용되어야 하기 때문에, 여권이 신장될 필요가 있었기 때문에 나왔던 겁니다. 항상 어떤 이데올로기라든가 주의 혹은 주장은 당시의 사회적인 변화와 무관하지 않습니다. 물론 우리가 지향하는 사회인 지에 대해서 지금은 논의할 수가 없을 것 같습니다. 제가 지향하는 사회가 어떤 것인지 모를 뿐더러, 여러분이 가지고 있는 생각도 차이가 클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여기서 제가 말씀드리려고 하는 것을 한마디로 요약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한의학에서는 전체와 부분을 분리하지 않은 상태에서 변화와 분석을 추구했습니다. 전체와 부분을 분리하여 개별에 대한 분석과 실천을 해온 서양적인 근대적인 개념은 동양에서는 없었습니다. 그렇다면 앞으로 어떻게 보고 또 어떻게 변화시켜야 할까요? 자연철학 부분에서는 대상을 열린계로 볼 것이냐 닫힌계로 볼 것이냐와 연관될 수도 있습니다. 또 부분과 전체를 통일적이고 유기체적으로 논의하려면 어떤 방법이 좋을지도 얘기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이 모든 노력은 지향하는 사회구조를 전제로 할 때 지속성을 갖게 됩니다. 한의학에서는 인간의 내부와 외부의 조화를 추구합니다. 그 방법으로는 음양과 오행이라는 방법이 사용되는데  서양의학과의 관계에 있어서 어떻게풀어가야 할 지 큰 숙제입니다.

질문과 대답   

문 : 기(氣)에 대해서 쉽게 설명을 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답 : 철학자들은 에테르, 아톰을 '기'라고 표현하기도 합니다. 사실 중국에서도 기는 별로 철학적인 고민의 대상이 아니었습니다. 중국이나 공산화된 국가에서는 기를 물질로 보고 있습니다. 물론 서양적인 의미에서의 물질은 아닌 것 같습니다. 기라는 것을 딱 정해 놓고 있지 않으니까 편한 점도 있습니다. 하나 가지고 이것저것으로 사용할 수 있으니까요. 경락이라는 것이, 기라는 것이 실재하느냐 하는 것은 서양과학적인 측면에서 제기된 질문입니다. 저는 실재한다고 생각합니다. 작용이 있는 곳에 실재가 있다는 유물론적인 전제하에서 실제로 경락의 실체를 발견했다고 하는 발표가 있었습니다만, 그것이 반복실험을 통해서 상당부분 실패를 했다고 합니다. 특히 일본하고 러시아에서 엄청난 연구를 했는데 다시 발견하는데 실패를 했습니다.

문 : 생명이라는 개념을 동양학, 한의학에서 어떻게 설명할 수 있는지?

답 : 생명(生命)이란 사람이 땅에서 생겨났는데 자기 명(命)을 하늘에 걸었다는 겁니다. 실로 매달았다고 생각하면 됩니다. 그래서 몸이라는 것은 땅이라는 음(陰)에서 만들어졌는데 그 안에 '명'이 있습니다. 명이라는 것은 하늘의 명령입니다. 그것을 하늘에다 매달았습니다. 천지가 합해져야지 사람의 생명이 태어난다고 보고 있습니다. 생명이라고 했을 때는 사실 천지의 기가 합해져서 생겨난 일시적인 산물이라고 보는 거죠. 그러니까 기의 이합집산(離合集散)에 의해서, 음적인 땅의 기와 양(陽)적인 하늘의 기가 합해져서 사람의 생명이 된다고 보고 있습니다. 주어진 것이라기 보다는 기의 한 형태라고 볼 수도 있겠습니다. 그리고 참고적으로 천지창조라는 말을 기독교에서 사용하고 있는데, 초창기에 그리스도교가 전파될 때, 천지라는 말이 자연과 가장 흡사하기 때문에 사용한 것이 아닌가 생각
이 됩니다. 조물주라는 말도 만들어 낸 것이죠. 동양에서도 주라는 개념은 없어도 조물이라는 개념이 있어서 조물주라는 개념을 쓴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주(主)라는 개념이 천주(天主)라는 개념으로 쓰게 된 것은 기독교에 의해서 쓰여진 것으로 알고 있는데요. 조물자(造物者)에서 造라는 것은 없는 것을 새로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고요. 개별적인 사물들을 화(和)시키는 사람 그것이 조물주, 동양에서는 조물자였습니다. 생명이라는 것도 어디서 갑자기 나온 것으로 보기보다는 어머니의 몸을 빌어서 나온 것입니다. 어머니는 음이죠, 지(地). 기의 운동 형태, 과정을 보면, 동물, 식물,
인간은 다 같은 일기(一氣)의 형태를 갖습니다. 이 가운데 동물이라는 것은 옆으로 자라기 때문에 횡생(橫生)한다고 하고, 식물은 땅에서 위로 자라기 때문에 역생(易生)한다고 합니다. 사람은 위와 옆으로 자라기 때문에 통생(通生)한다고 합니다.

문 : 한의학은 사회를 안정되게 만드는 이데올로기의 총아가 아닌가 생각됩니다. 시대가 달라졌음에도 불구하고 오늘날에도 통용되는 것은 보편적인 원리가 있기 때문이 아닐까요? 한의학적 사고가 자연과 인간이 잘 조화된다는 측면이 있다고들 하는데 그 자체로 어떤 초월적인 측면이 있
는 것은 아닐까요?

답 : 원리 없이 이루어지는 것도 있습니다. Art라는 측면이 한의학을 강하게 했다고 생각합니다. 만일 한의학이 철학이었다면 살아남지 못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동양의 과학 중에 유일하게 살아남은 것이 한의학입니다. 건축학, 지리학, 식물학 다 깨졌습니다. 한의학이 살아남아 있을 수 있었던 것은 한의학의 독특한 유기체적인 관점이라든지 열린계적인 사고에 있다고 봅니다. 그러나 그것보다도 더 중요한 것은 한의학이 '기술(技術)'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현실을 구성하는 것은 원리로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운동을 하는 사람들에게는 하나의 지향점이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그 지향점이 없습니다. 저는 오히려 잘 됐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앞으로 지향하면서 살고 싶은 세상은 엑스레이 사진에 나타나듯이 사는 모습이 아니라 따뜻하고 풍부한 인간적인 사회의 모습이기 때문이죠. 원리적인 측면에서 무엇인가를 찾아내는 것도 중요하지만 이런 저런 다양한 측면들의 고민들을 묶어 새로운 구호들을 찾아낼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봅니다. 그리고 조화 속에 '초월'이라는 개념이 있는 것이 아닌가 하셨는데요. 한의학에서 신(神)이라는 개념이 있습니다. 신이라는 것은 귀신이죠. 귀신이라는 것은 무서운 것도 되지만 알 수 없는 것이죠. 요즈음 양방 병원에 가보면 '당신 신경성입니다' 라는 말을 합니다. 사실 신경성이라는 말은 원인불명이라는 말하고 같은 의미라고 할 수 있습니다. 기질적인 문제가 보이지 않기 때문에 혹은 소변이나 혈액이나 검사 상에 나타나지 않기 때문에 모른다는 것이죠. 한의학에서는 음양불측(陰陽不測)한 것 - 음양이 서로 조화를 이루고 운동을 해 가는데 그것을 가늠할 수도 측량할 수도 없다고 하여 신기하게 여깁니다. 그런 의미에서의 신입니다. 또 한편으로는 인간의 생명 현상이 발의(발현)되는 그 자체를 신이라고 표현합니다. 우리가 '신명난다' 그러치 않습니까? 그 신명은 '기분이 좋다'는 말이 아닙니다. 그것은 내 몸과 마음에 음양의 조화가 극에 달해서 몸도 좋고 마음도 좋다고 하는 것이죠. 마태오리치라는 분은 'God'이라는 개념을 마땅히 대치할 수 있는 개념을 중국에서 못 찾았어요. 그래서 천주라는 개념을 썼다고 하는데 이것은 동양적인 의미와 아주 딱 들어맞는다고 볼 수 없다고 생각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