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자연적 삶이란 무엇이냐?
이제 끝으로 자연적인 삶이란 무엇이냐?
첫째, 인공적인 것보다 자연을 더 좋아하는 것이예요.
둘째, 부자연한 것보다 자연스러운 것을 더 좋아하는 것이에요.
셋째, 우리가 대자연의 일부분이라고 하는 인식이 동트는 것이예요.
넷째, 대자연은 어찌 보면 살아 있는 듯이 느껴진다고 하는 것이예요
. 이런 네 가지를 다 품고 사는 사람이 어느 날 자기 존재에서 '야옹' 소리가 나오는 것을 '자연적 삶이다' 하고 말하는 것이예요. 샌프란시스코 주립 대학의 심리학 교수로 있는 빌로도라고 하는 사람이 있었어요. 이 사람이 정글에 들어가서 인디안 스승 밑에서 10년인가 약초에 관한 심리적 효과를 연구하면서 제자로 있었어요. 그런데 어느 날 새떼도 있고 원숭이 같은 짐승이 다 있는 그 무시무시한 정글로 제자를 끌고 들어가더니 "오늘은 너를 한번 테스트 해 보는 날이다. 이 정글의 시끄러움이 멈추지 않도록 걸어라." 그래서 살살 두 발짝을 걸었을 때까지는 계속 동물들이 못 알아채고 시끄러웠어요. 그런데 셋째 발짝을 떼는 순간 앵무새 소리도 멎었고 원숭이 소리도 멎었다는 거예요. 그래서 "선생님, 아무래도 제가 향수 뿌리고 면도해서 그런 것 같습니다." 하고선, 때마침 인디언이 지나가다가 잡아놓은 짐승의 기름조각을 가져다가 온몸에 칠하고는 다시 출발을 했어요. 이번에는 세 발짝 가는 동안에도 정글이 계속 시끄러웠어요. 그런데 그 다음에 뚝 멈추더라는 거예요. 스승이 얘길 했어요. "짐승이 네 몸의 냄새를 맡은 게 아니라 네 속의 포악함과 난폭함을 알았다."
우리는 다 난폭합니다. 꿈에 회사의 그 목을 비틀었으면 좋겠고, 내가 못하면 차라리 자동차 사고라도 났으면 좋겠고, 그런 것을 꿈으로 연출하게 돼 있어요. 이건 다 난폭함이예요. 그런데 스승이 지나가면 짐승들이 다 거들떠보지도 않고 계속 떠드는 거예요. 이 교수도 짐승이 시끄러운 가운데 걸을 수 있게 되는 데에 5년이 걸렸다고 자기 책에서 고백하고 있어요. 그래서 제가 웃으면서 '장로, 목사, 감독 또 뭐 총회장을 뽑을 때 저 숲 속에 들여보내는 걸로 테스트하면 좋겠다. 그렇게 하면 아마 통과하는 놈이 한 놈도 없겠지' 라는 생각을 한 적이 있어요.
티베트에서 호랑이가 자주 나와서 동네 사람을 잡아먹은 적이 있었어요. 19세기말이니까 100년 전에…  그때 그것을 어떻게 막았느냐 하면 히말라야에서 도를 닦던 도인이 그 성문 앞에 드러누워 있었어요. 그 호랑이가 오는 입구에 말예요. 그러면 호랑이가 와서는 그냥 가고, 그냥 가고… 이걸 서양 사람들이 보고 "와- 어떻게 이런 일이 일
어나느냐?" 그랬더니 "우리가 싱거운 반찬은 안 먹고 양념이 잘 된 것만 먹는 것처럼 짐승도 양념이 잘 된 사람, 즉 공포라는 양념이 들어가 있는 사람만 먹는다." 고 하더래요. 겁있는 것만 먹지 공포가 없는 것은 안 먹는다는 거예요. 그 도인은 거기 드러누워서 공포가 없을 정도가 아니라 타 생명에 대해서 연민까지 느꼈기 때문에 "이제 그만해라." 라고 하면서 타일렀다는 것이지요. 이렇게 이 교수가 얘기하는 우리 속의 난폭함과 두려움은 사실 동전의 양면입니다. 그런데 누가 난폭하냐 하면, 겉은 아주 우락부락하지만 속에는 겁이 많은 사람이 그렇거든요. 이 안팎이 다 통해 있어요.

그래서 자연적 삶이란 난폭함과 두려움이 씻겨진 삶을 말합니다.
성경에 보니까 채식만 했다는 다니엘이라는 소년이 있었어요. 그 아이를 사자 우리에다 집어던지는 얘기, 여러분 너무나도 잘 아실 거예요. 거기선 천사가 와서 사자의 입을 틀어막았다고 했어요. 물론 천사라고 하는 건 인구조사에 들어가는 게 아니니까 안 보이는 걸로 쳐야죠. 그럴 때 제 해석에 의할 것 같으면 이 사람은 채소를 먹으니까
난폭하지 않을 거고, 언제든 죽어도 좋다고 자기 운명을 여호와 하나님께 내맡겼기 때문에 두려움이 없었을 거예요. 그러면 사자에게 음식거리로 안 보이는 거죠. 덤덤한 친구처럼 보이지. 이런 존재의 의식에 구체적인 무언가가 있기 때문에 짐승이 알아보는 것이지, 뭐 성경 끼고 있다고 알아보거나 교리 문답한다든지 하면 그냥 잘 씹었을 거예요.
유명한 일류 학자인 케서널리벨이란 사람도 약초 연구를 16년동안 멕시코에 가서 인디안 스승 밑에서 했는데 첫날 제자로 받아 주느냐, 아니냐를 할 때 이런 시험을 했대요. 아무도 없고 깜깜한 하늘에 별이 있는 자기의 산골 초가집으로 데려가서는, 마당에서 "자네 자리를 찾게." 하고서는 사라졌어요. 그러니 이 사람이 도대체 문제를 어떻게
풀어야 할지 모르겠지만, 물어볼 사람도 없고 해서 할 수 없이 '네 자리를 찾아라.' 그랬으니까 마당의 여기저기를 그냥 봤다는 거예요. 그냥 어벙하게 앉아 보니까 이상한 데가 두 군데 나왔더래요. 한 군데 앉으면 무서움, 근심, 걱정 온통 그런 것이 있어서 몸이 시릴 정도로 꿈틀거리게 하고, 또 어디에는 앉으니까 아주 편안하고 나른하고 잠이 사르르 오고, 그래서 이게 우연인가 하면서 또 두 번째의 편안한 자리 가서 앉으려고 했더니 옆에 선생이 나타나더니 "너, 찾았구나." 하더라는 거예요.
우리가 문명 속에 사는 동안에 몸이 다 죽었어요. 남자의 몸보다는 여자가, 여자보다는 아이, 아이보다는 짐승, 짐승보다는 식물, 식물보다는 광물, 광물보다는 지구가 더 예민한 존재죠. 그 중에서도 지구가 가장 예민한 존재예요. 초속 30Km를 달리고 45억년을 내는데 아직 버스가 급정거해서 뒤에 있는 놈이 앞으로 왔다든지 이런 게 없어요. 그렇게 예민해요. 너무 커서 우리가 모르니까 고마워하지도 못하죠. 그런데 우리는 몇 만년 내에 성숙한 시대에 왔어요. 홀연히 고마움을 찾을 시대가 온 거라구요. 예전에 우리는 대지가 평평한 줄 알았어요. 그런데 이제는 저녁 뉴스 시간마다 뱅글뱅글 도는 푸른 행성을 보게 되었어요. 고마움을 알아야 돼요. 예전엔 인류가 유아 시절이었으니
까 그랬지만 어쨌건 지진이 날 때 보면, 쥐나 닭은 몇 시간이나 몇 분전에 다 알고 있어요. 사람만 어둔하게 가만히 있다가 당하는 거예요. 만물의 영장이고, 첨단 과학이고 그러면서도 얼마나 우스워요. 닭과 쥐들이 얼마나 깔깔거리고 웃었겠어요. 쟤들 보라고 장비를 잔뜩 가지고 그냥 당하니… 왜 몸을 안 쓰냔 말이에요, 몸을.몸이 다 죽은 까닭은 너무 생각과 말을 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시시때때로 말과 생각을 멈춘 사람만이 이 지구 전체의 움직임과 춘하추동과 여러분이 좋아하는 환경을 느낄 수 있습니다. 환경이란 말 난 안 좋아해요. 언제부터 우리가 환경이란 말을 썼습니까? 몇 천년 몇 백년 동안 삼라만상이라든지 산천초목이라든지 금수강산이라든지 하는 말 썼지. 환경! 내가 주인이고 환경이다 이거죠. 아니예요. 여러분은 좋은 뜻을 갖고 환경이라고 하지만 그 낱말 자체가 지구가 들으면 "웃긴다. 웃겨."그래요. "날 환경이래. 쟤들이… 최근에, 백만년 전에 생긴 호모 사피언스 후손들이 나를 환경이란다." 이럴 거예요. 이 지구가 달보고, 해 보고, 또 해는 많은 별들을 보고 "여기 우스운 친구들이 버러지들이 있다." 그럴 거예요. 달에 가서 사진을 찍으면 사람 키가 안 보여요. 큰 놈 작은 놈 목에 힘주는 놈은 물론이고 히말라야도 안 보이죠. 그러니까 기간도 짧지, 하루살이예요. 45억년에서 80년이 뭡니까? 또 사이즈는 얼마나 작습니까? 이런데 왜 아침마다 신문 보는 줄 아십니까? 이 낙엽 지고 과일 열리고 이런 것 안 보기 위해서 그런 거예요. 이게 진짜인데 죽을 때 이것을 마지막으로 더 보고 못 보는 게 한인데, 신문 못 보는 게 한입니까? 그거야 뭐 관을 아주 신문으로 덮어 주면 되지. 그 다음날 것도 갖다 주고 또 다음날 것도 갖다 주고… 참, 요즘은 '관도 DC 해서 팝니다.' 하면 좋아해요. 몸이 말 안 듣는 지경에 온 것이라고요.

힌두교에 이런 얘기가 있어요. 우리 나라에서 4, 5살 되는 애를 절간에 가서 공부하게 하는 것처럼 힌두교의 어느 아들도 그렇게 하게 했어요. 그래서 점성술, 풍수지리 등 여러 가지를 다 배웠어요. 그리고서는 12살 때 장원급제를 해서 아주 으시대면서 집에 왔어요. 참 끈기가 있는 아들을 자랑스럽게 보던 아버지가 가만히 보더니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면서 "글렀다, 글렀어. 걷는 폼을 보니까 글렀어." 하면서 이렇게 물었어요. "무얼 배웠느냐?" 그러니까 아들이 "이것저것 다 배웠습니다." 하니까 "그것은 배웠는가?" 그랬어요. "그게 뭡니까?" 아들이 묻는데, 아까 인디안 도인처럼 다시 설명 안 하고 반복했어요. "그것을 배웠는가?". "도무지 무슨 말씀인지도 모르겠거니와 배운 적
이 없습니다." "그러면 당장 가서 그것을 배워라. 그 전에 집에 안 들인다." 그랬어요. 그래서 아들은 하룻밤도 자기 전에 다시 돌아갔어요. 선생더러 "아니, 우리 아버지가 그걸 배워 오라는데 그게 도대체 뭡니까?" 그랬더니 "아니, 진작 얘길 하지, 공부 다 끝난 다음에 하면 어떡해. 너 정말 그걸 배우려고 하냐?" 그러니까 "아 그거 아니면 집에
서 안 받는 대요." "정말 배우겠어, 오래 걸려도?" "그거 아니면 집에 못 들어가요" "그래 그럼 여기 소 200마리가 있는데 이걸 끌고 산으로 들어가서 1000마리가 되면 와라" 그랬어요. 그래도 일등한 아이가 머리에 든 게 많이 있지 않겠어요? 이 아이가 소 200마리를 끌고 산으로 갔어요. 가서 뭘 했겠는가? 한번 생각해 봐요. 처음엔 친구도 없고 전화도 없고 휴대폰도 없으니까 스스로 했겠지요. 문, 답, 문, 답… 그럴 적마다 소가 멀끔히 쳐다봤다는 거예요. 그 아들을 말예요. '뭘 하는가? 이게 무슨 짐승인가? 혼자 말하
고 혼자 대답하고…'
그 다음에 겨울이 오고 봄이 오는 동안 조금씩 예민해져 갔어요. 바람이 불어오면 거기 사자가 숨었는지를 아는 등 자연에 대해서 예민해졌어요. 그리고 자연밖에는 몰랐어요.' 예수님이 비유하신 것처럼 살아 있는 자연이 되었어요. 어느 정도가 됐냐면 그러니까 학교에서 배운 것을 다 쏟아 내고, 자연이 삼투압처럼 스며들었어요. 전체가 말예
요.그래서 어느 날 소가 1000마리가 됐는데 1000마리가 되면 돌아간다는 것조차 그 아이가 잊어버렸기 때문에 소들이 '이제는 갈 때다.' 이렇게 알려줬다고 나와요. 그래서 이 놈이 소를 1000마리 끌고 내려 와요.
그런데 선생은 또 몇 회를 졸업시키고 새 학생이 들어왔을 게 아니겠어요. 선생이 가르치다가 딸랑딸랑 소리가 나니까 다 저기를 보라고 하면서 "1001마리의 소를 보라." 이렇게 말했어요. 그게 'That'이예요. 그게 모세의 40년이죠.  자그마치 40년씩이나 초야에 묻혀 있었어요. 왕궁에서 40년, 초야에서 40년, 민족 해방할 때 40년, 120년! 80세에 민족 해방을 시작했어요. 80세에… 그전엔 어떻게 했나, 왜 그런 사람을 하나님이 택했는가, 완전히 자연의 한 부분이 된 거예요.
왕궁에서 배운 것 다 잊고, 자연의 한 부분이 된 거예요.결국 하고 싶은 말은 부자연한 것을 버리면 자연히 된다는 얘깁니다. 자연스러운 게 클라이맥스에 가면 초자연으
로 이어지는 것이예요. 부자연, 자연, 초자연이 한 스케일에서 가는 것이예요. 그래서 남의 눈에 잘 띠는 것이 부자연한 사람이에요. 근데 자연한 사람하고 초자연한 사람은 눈에 안 띠어요. 적외선과 자외선처럼 말예요. 부자연한 인간은 가시광선처럼 눈에 띄죠. 커뮤니 제프라고 하는 소련이 낳은 도인이 있었어요. 이 사람이 아주 괴팍한 장난을 많이 했는데, 한번은 한 10명이 들어 갈만한 방에다가 30명을 집어넣고, 서로 다른 사람이 없는 양 말하지 않고, 뭐 발등 밟아도 '미안합니다' 하지 않고 밟은 걸로도 치지 않고 그렇게 30일을 있으라고 했어요. 30명이 지원했는데 3일 있다가 27명이 못하겠다
고 나왔어요. 가렵지, 우스운 소리 나오지….
인간이 이게 100만년 훈련이 됐기 때문에 계속 말을 해야 돼요. 말 안 하면 못 견디게 돼있어요. 그런데 말 안 하는 정도가 아니라 없는 것처럼 있으래요. 눈빛도 마주치지 말고 없는 것처럼… 27명이 낙제고 3명만 남아 30일을 버텼어요. 그 30일이 됐으니까 의식이 보통 사람이 아니죠. 선생이 와서 아무 말 없이 끌고 나갔어요. 그리고 어느 정원 같은 데에 가서 속으로 '이제는 말을 해도돼.' 그랬더니 세 사람이 "정말이요?" 했어요. 세 사람이 그 얘기를 다 들었다는 거지요. 고요해지면 다 그렇게 되는 것이예요.여러분, 새가 이렇게 30마리, 50마리 있는데 함께 동작할 때 뭐 이럴 것 같아요? "야, 왼쪽이야 왼쪽! 오른쪽이야, 오른쪽… 돌아…돌아." 이렇게 하는 것 같아요? 아니예요. 또 전자 장치를 해 놓은 것 같아요? 아니에요. 전체가 한 혼인양 도는 것입니다.

그리고 모세도 그랬기 때문에 여호와의 영성을 들은 것이에요. 여러분도 하나님이 수없이 불렀을 거예요. 그런데 여러분이 다 귀머거리였던 겁니다. 1001마리의 소의 세계를 경험해야 자연으로 돌아갑니다. 문명에서… 홀연히 초자연이 되는 걸 체험하는 거죠. 그래서 사무엘처럼 또 엘리야가 미사하는 중에 여호와 영성을 들었던 것처럼 '이제는 말해도 돼' 이렇게 속으로 말했는데 세 사람이 동시에 "정말입니까?" 한 것, 이것을 텔레파시라고 하는 거예요. 텔레파시라고 하는 건 초능력으로 으시대면서 쓰는 게 아니에요.
그게 에덴 동산이예요. 문장이라는 건 가장 오해 덩어리예요. 인간의 언어는 거짓말하기 위해서 만든 걸 아시죠? 진짜는 말할 필요가 없는 것이예요. 그래서 자연과 초자연이 열렸습니다. 이런 상태에서 엘리야나 모세나 사무엘처럼 하나님과 자연과 통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속이 꽉 차 있고 가슴이 열려 있어야 되는 거죠.
미동북부에 메리디스라고 유명한 TV 부사장이 있는데 이 사람이 명상을 좀 하다가 어느 날 자기 집 정원에 있는 완두콩을 앞에다 두고 여러분이 아까 하던 식으로 고요히 있었어요. 그런데 며칠을 해봐도 아무 일도 안 일어나는데 어느 날 눈을 감았는데도 앞에 초록색 물감이 퍼진 것 같은 게 자꾸 보이는 것이예요. 그래서 그날도 실패를
했어요. 그리고 그 다음에 또 집요하게 했더니 그 초록색 물감 같은 게 더 뚜렷해지더니 갑자기 자기 몸의 앞, 뒤로 막 흔들렸어요. 그러더니 소리가 들렸어요. "그거 좋으냐?" "아니 싫어. 막 현기증 나고 그러니까…" 그랬더니 "우리도 싫다. 그러니까 우리 울타리 좀 튼튼히 해라." 그 완두콩이 하는 얘기예요. 그래서 그 다음부터는 일일이 식물을
키울 적에 무슨 비료, 무슨 비료를 교과서보고 주는 게 아니라 그 앞에서 가만히 명상하면서 순전히 식물들의 충고를 받아 가지고 기가 막힌 정원을 만들었어요. 전 세계 사람들이 방문했어요.

에덴동산이나 고대로 가면 이런 빌딩도 없고 글자도 없고 컴퓨터도 없고, 거짓말도 안 할 그때는 삼라만상이 다 살아야 되니까 전체가 커뮤니케이션을
하고 있었어요. 그런 시대가 얼마 안 있으면 오게 돼있어요. 왜냐, 문명의 극치를 우리가 경험할 수 있기 때문에 차면 기우는 법이에요. 그래서 환경보호라고 하는 것은 이 지경에 이르게 한 사람이 땅과 협력해서 이루는 아름다움을 말하는 것이예요. 식물, 동물, 광물, 산, 강, 지구와 대화하는 인간이 배출될 때 낙원이 되지 그 이전에 몇 번 뛰
고 여기다 뭐하고 이래가지고 되는 게 아니예요. 우리가 잠깐 사는 동안 같이 사는 거예요. 강에 있는 생선이나 산에 있는 것이나 다 동창생이고, 지금 사는 짐승이 다 동창생입니다. 그럼 지구가 서로 사랑하니까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런 큰 그림에서 우리가 '그러면 어떻게 했으면 좋겠습니까?' 하고, - 모세가 야훼께 경청하듯이- 이 지구소리,
나무소리, 짐승소리를 듣는 겸허한 자세를 가질 때 비로소 지구의 낙원을 만드는 것이예요.그러면 이렇게 자연한 인간은 어떤 모습일까? 두 가지만 예를 들겠어요. 어떤 사람이 우리 같은 종교 집회를 끝내고 갔는데 모텔에 방이 다 차고 없어 가지고 "어디 빈데 좀 없습니까" 그랬더니 매니저가 찾아보더니 "어느 방에 침대가 둘인데 여자 손님이 들어갔습니다. 거기도 괜찮습니까?" 그랬더니 "어떻게 해요. 길에서 잘 수도 없고… 그
래서 가기로 했어요. "그런데 아까 그 손님이 주문한 식사가 있는데 그것 좀 가는 길에 갖다 주실 수 있겠습니까?" 하니까 "물론" 한다고 그랬어요. 그리고 문 열고 밥그릇을 내려놓고 보니까 몸에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금발 여인이 드러누워 자고 있는 거예요. 그래서 밥을 놓고서는 젊은이가 그 앞에 앉아서 몇 번이나 같은 것을 반복했어
요. "할까?… 말까?… 할까?… 에이 그래서야 되나?" 그러더니 "에라 모르겠다." 그러더니 그 여자 밥을 먹었다는 것이에요. 이게 초자연이예요. 그리고 그 사람에겐 자연스러운 거예요. 배고픈 게 제일 급하니까… 사람의 기대치를 넘어가는 것, 이런 걸 자연함이라고 하고 초자연이라고 하는 것이예요. 이 지경으로 사는 것을 자연적 삶이다,  이렇게 말하는 것이예요.♣   

환경신학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