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연과학적인
세계관과 지배철학 중세 때는
그래도 목적론적 세계관이 있어서 우주와 자연을 보며 하느님의 섭리와
손길을 느꼈어요. 모든 세계가 하느님을 증언한다고 생각했던 것이지요.
그러한 전통이 지금은 거의 사라졌어요. 그렇다고 개신교가 전적으로
그런 것도 아닙니다. 단지 신구약성서를 중심으로 삼아온 개신교가 자연지향적인
영성을 파괴하는데 공헌했다는 것은 부인하긴 어려운 사실임을 지적하는
것입니다. 이 세계는 좋은 것, 하느님이 보시기에 "좋다"고
하신 창조세계이며 하느님이 다스리는 곳입니다. 따라서 영적 의미가
완전히 사라진 것이라고 볼 수 없습니다. 자연지향적인 종교
/ 동양적인 종교 문 : 티벳 사람들은 가난함 속에서도 어둡지 않고 오히려 아름다운 삶을 살고 있다고 하셨는데 그 사람들이 어떻게 사는 지를 얘기해 주세요. 답 : 그 사람들은 욕심이 별로 없는 것 같아요. 주어진 환경에 적응하고, 자연에서 주어지는 대로 목축업을 하고 농사짓고 거기서 수확한 걸로 살고 있습니다. 아직 자본주의 경제시스템으로 완전히 편입되지 않았습니다. 제가 잘못 본 것일지도 모르지만 그들의 삶은 우리의 새로운 이상향이 될 수 있습니다. 그들은 우리의 몇 백분의 일밖에 안돼는 에너지를 쓰고 살면서도 우리보다 더 행복합니다. 저는 제 자신이 그 사람들보다 행복하다는 생각을 조금도 할 수 없었어요. 그 사람들의 삶을 보면서 - 물론 나더러 저렇게 살라고 하면 못살 거예요. 왜냐하면 나는 타락한 사람이예요. 여기서 다른 세계를 맛보았기 때문이죠. 그들도 지금의 경제시스템이 파고들면 마찬가지 결과가 나올 것입니다. 문 : 기독교가 자연의 종교에서 역사의 종교로 넘어갔다는 것은 인정합니다. 그러나 이렇게 된 이유가 일방적으로 자연의 가치를 부정했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자연과 인간의 위치가 바뀌었다고 볼 수는 있지만 꼭 지배나 정복으로만 볼 수는 없다고 생각합니다만. 자연의 종교, 공간의 종교는 당시 인간 사회의 계급구조를 합리화하고 있지 않았습니까. 그래서 해방의 종교, 역사의 종교가 나온 게 아닙니까? 답 : 자연의 종교에 억압적인 면이 있다는 것은 제가 잠깐 말씀드렸습니다. 자연의 종교가 인간을 억압하게 된 것은 자연의 질서를 인간 사회에 연결시키면서 잘못된 사회구조를 자연의 이름으로 정당화시켰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면 남녀 차별을 봅시다. 자연 속에 암컷이 수컷보다 열등하다는 증거는 별로 없거든요. 자연의 질서 - 음양 또는 천지에는 위계가 필요 없습니다. 음도 필요하고 양도 필요합니다. 그건 보완적 관계에 있습니다. 대부분의 경우 억압적인 것은 인간이 만들어 놓은 것입니다. 문 : 산업화된 기독교, 제국주의화된 기독교를 기독교 근본정신과 같이 보는 것은 아닙니까 답 : 제가 기독교, 자본주의, 또 뭐 사회주의를 한 통속이라고 본 것은 근대 기독교를 지칭한 것입니다. 고대나 중세 기독교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성서가 쓰여진 시대만 해도 그러진 않았을 거예요. 성서는 어떻게 보면 그럴 요소를 가지고 있어요. 그래서 우리는 성서에서 현대 문명의 위기를 극복할 수 있는 지혜와 통찰을 어느 정도 가질 수 있다고 생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을 새로운 안목으로 해석한다면 가능성은 있다고 생각합니다. 문 : 기독교의 창조 신학을 너무 도외시하는 것은 아닙니까? 답 : 창조신학을 계속해서
발전시켜야겠죠. 창조개념 자체가 처음부터 어떻게 보면 하느님과 인간,
하느님과 세계를 분리시켜 놓기 때문에 그 세계 속에 하느님을 만날
수 있는 길을 처음부터 차단한 것이라고 비교종교학에서는 봅니다. 저는
부정하기 어렵다고 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의 품위를 높였고,
해방의 논리가 가능한 것이고 인간의 자유를 신장시킨 점이 있습니다.
그래서 동과 서, 기독교와 동양 종교가 만나고 같이 협력을 해야지,
어느 한 쪽이 일방적으로 좋다 얘기해서는 안돼는 것입니다. 하여튼
창조신학을 계속 발전시켜야겠습니다. 단지 오늘 제 말씀의 초점이 거기
있지 않았습니다. 앞으로, 이정배 교수라든지 여러 신학자들이 많이
말씀하실 것이라 생각합니다. 기독교에서 이 문제를 어떻게 새로운 신학의
좌표로 잡아 가느냐하는 문제는 더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답 : 대체로 공감합니다. 공감을 하면서도 지금 우리가 처한 위기가 중증이라고 생각하기에 더 래디칼한 해결책이 요청된다고 생각합니다. 인간 중심적 세계관에 기초한 일련의 철학과 사상과 신학이 모든 것이 정말 래디칼하게 부정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정반대를 구해도 될까 말까 하는데 합으로 될까요. 문 : 과연 우리 기독교인들이 교수님이 말씀하신 사상적 대안을 찾을 수 있다고 생각하시는지요. 또 원시종교로 돌아가야 한다고 하셨는데, 현재의 상황에서 가능한 일일까요. 답 : 제가 신학교를 다니면서
접했던 신학은 역사화된 신학이었습니다. 동양 종교들을 공부하고 환경위기를
접하면서 그러한 신학의 한계를 보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너무 한 쪽으로
치우쳐 있지 않나 하는 반성을 했습니다. 그렇다고(기독교가 인간을
살리는 생명의 문화보다는 인간의 욕망만 자극하는 죽음의 문화를 산출해
왔다고 해서) 완전히 부정할 수는 없습니다. 동양 사상에서 동양 종교에는
나오지 않습니다. 맨 처음에 하느님은 인간을 창조하고 만물을 지배하고
다스리라고 했습니다. 그것은 제멋대로 하라는 것이 아니라 자연을 관리하고
가꾸고 책임을 지라는 말씀입니다. 제가 튀빙겐에 있을 때 참석한
세미나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일본 신학자가 와서 발표를 했습니다.
일본 사람들의 자연친화적인 영성을 얘기했죠. 몰트만 교수가 그에게
이런 질문을 했어요. 일본에는 신도이즘 등에 자연친화적인 영성이 담겨
있는데, 왜 일본인들은 환경을 무분별하게 파괴하느냐 하는 것이었습니다.
동양 종교가 그렇게 좋은데 왜 서양에 문 : 기독교에도 풍부한 상징체계가 있습니다. 종교개혁 자체도 상징체계를 말소했다고 보지 않습니다. 교리로 만들다보니까 경험을 무시하게 된 것은 아닐까요. 순수 복음의 전통으로 돌아가면 이 시대의 갈급한 영적인 면을 채울 수 있다고 봅니다. 결국 그리스도교의 풍성한 영성적인 면을 계승, 발전하지 않은 것이 문제라고 보는데 교수님 의견은 어떤 지요. 답 : 동의합니다. 저는
기독교의 신비가들, 신비주의에 관심을 둡니다. 현실의 종교를 보면
더욱 그렇습니다. 우리의 욕망을 가능하면 줄이고, 가난을 생활화하고,
영성적 삶을 살아야 하는데, 골수 개신교 신자인 저도 그런 영성을 교회에서는
물론이고 신학교에서도 배운 일이 없어요. 그렇다고 지금까지 보여진
것들이 기독교의 본질이라고 단정짓지는 않습니다. 그래서 새로운 신학이
필요하다고 한 것이죠. 중세 신비주의자들의 전통만 보더라도 그 안에는
광야의 영성이 있어요. 이제라도 신비주의적인 전통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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