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 며 생 각 하 며

'잡초'에 대한 사색

박김혜원/ 새문안교회 권사

보라빛 털 목도리를 동그랗게 두른 귀부인들이 이슬에 목을 축인다. 8층짜리 아파트 발코니 마다에서 얼굴을 내민 그들이 웃음을 터뜨린다. 같은 색으로 감싼 몸을 너울대며 꼬마 나비들이 그들 주위를 맴돈다. 우리집 뜨락이 풀꽃으로 여는 가을 아침은 이렇게 눈부시다.

이름을 알 길없는 목도리 꽃이라 나 혼자서 부르는 풀의 개화기이다. 지난 봄부터 여름 내내 멀대같이 키만 뽑아 올려 나의 속을 꽤나 태우던 그들이었다. 뽑아 버릴까 잘라 버릴까로 나의 인내심과 씨름을 하고 있는 동안, 드디어 그들이 천덕꾸러기에서 복동이로 신분 상승하는 날이 왔다. 맨 아래층에서부터 보라색 반지같은 꽃동그라미들이 층층으로 피어나기 시작한 것이다.

크고 작은 벌이며 갖가지 색의 나비를 불러 들이는 우리집 풀꽃이 어디 하나 둘뿐이랴. 꽤 깔끔하던 뜨락이 이렇듯 풀꽃 세상으로 어지러이 바뀐 것은 순전히 그날 나를 남촌으로 등 떠민 여행 탓일게다. 그 여행에서 돌아온 즉시 나의 발길은 자그마한 우리집 뜰로 향했다. 집을 비운 며칠 사이 도둑처럼 스며든 잡초들은 얼씨구 이 때로구나 하듯 잔디 사이 바늘구멍 만큼의 비좁은 틈에 뿌리를 내리는 참이었다. 앞 챙이 쑥 나온 모자를 눌러 쓴 나의 손에 들린 것은 끝이 뾰족한 호미였다. 늘상 그들 위에 주저함없이 들이 대곤 하던 호미질이었다. 그런데 바로 그 때였다. 내 호미를 붙잡고 놓아주지 않는, 잡초의 절규를 듣게 된 것은. '아줌마, 나도 이 봄에 쌩쌩 살고 싶은데 안될까요?' 그 찻집 정원에서 들린다던 잡초들의 수상쩍은 수런거림이 내 가슴 밑바닥에 붙어와 이 곳에서 발딱 일어선 게 화근이었을까?

봄을 감싸 안은 남녘의 그 다원은 참으로 아름다웠다. 정갈한 손질을 거친 잔디의 결은 월드컵 경기장의 그것이 부럽지 않을 듯 매끈했다. 넓다란 정원 군데군데에는 적당히 구부러지고 휘어진 토종 소나무들이 검은 몸통 위로 피워 올린 바늘잎 이파리에 5월의 싱싱한 초록물을 올리고 있었다.

우람한 대들보가 미인의 다리처럼 매끈한 서까래를 거느린 천장. 그것을 올려다보는 것만도 즐거운 찻집이었다. 해묵은 반들거림이 나그네의 아픈 다리를 끌어당기는 마룻방은 어릴적 고향집 대청마루의 추억마저 불러냈다. 고목 찻상에 차를 내놓는 여주인은 맵시나는 생활 한복의 운치를 더하였다. 객들과의 차 취향이 하나로 어우러지자 주인은 좀체 내 비치지 않는다는 솔차 담그기 비법마저 넌즈시 풀어 놓았다.

그 때 일행 중 한 친구가 흐뭇한 웃음을 담고 입을 열었다. "참 부럽네요. 처녀적 내 꿈이 식물원이나 화원을 하는 거였는데… 남편에게 속아서 그만…" 잡풀마저 버리지 못하는 식물광 친구의 말을 무지르며 찻집 주인이 얼른 받았다. "아이고, 말도 마시오. 잡초와 싸우기 징해라우. 잔디밭에서 죽을 둥 살 둥 잡초 뽑고 돌아서면 잡초가 즈그들끼리 이렇게 말한다요. '야들아, 흰 수건 쓴 아줌마들 다 갔냐? 인자 우리 나가도 되겄냐? 보는 사람은 좋지라우?" 식물광 친구들을 비롯해서 우리는 정원을 가꾸기에 힘을 다한 그녀에게 맘껏 치하를 보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기차 안에서 감은 내 눈 앞을 서성이는 영상은 서로 다른 생명 두 개였다. 하나는 귀한 대접을 받으며 싱싱하게 커 가는 잔디요, 다른 하나는 그  잔디밭의 정갈함을 위하여 무수히 뽑혀 나간 잡초의 천한 목숨이었다.

천지창조하실 적에 하나님은 풀이라는 단일품종을 만드셨을 것이다. 그리고 유구한 세월을 거치면서 지각변동과 기후변동을 통해 다양한 종으로 퍼지게 하셨을 것이다. 그리고 각각의 생명에게 적합한 사명을 주셨으며 인간에게는 그들의 양육과 번성을 돌보는 책임을 맡기셨다.

그러나 인간들은 자신들의 이해와 취향에 따라 어느 종은 선택하고 어느 종은 업수이 여겼을 것이다. 선택받은 그 생명은 세상을 지배하며 위풍당당하게 살아간다. 반면에 밀려난 생명은 천대받아 쪼그라들고 더러는 멸종의 위기를 당한다. 한 세상 살라고 목숨받은 것은 마찬가지건만 이리 치이고 저리 치여 천덕꾸러기가 된다. 그런데도 하늘이 내린 삶의 명령을 지키려고 몸부림치는 모습은 거룩하기까지 하다.

지난 십수년 동안 내 손에 뽑혀 나간 잡초들의 죽음 탓에 이 뜰은 제법 말쑥한 모습을 간직할 수 있었다. 그들은 원망의 기색도 없이 숨 죽이고 어딘가 숨어있다가 틈만 보이면 재빨리 자신들의 삶을 일구려는 질긴 생명이다. 바랭이, 질경이, 민들레, 개망초, 달개비, 돼지풀, 애기똥풀, 며느리밑씯개는 물론이요 이름모를 풀들은 얼마나 많이 죽어갔을까에 생각이 미쳤다. 그들 모두에게 조사라도 올려야 할 듯 싶었다. 그 반성의 뜻을 모아 나는 잡초들과 공존하기로 그 날 마음을 굳혔다.

축구나 골프를 하는 사람들이 필요로 하는 풀밭은 말끔한 단일품종 잔디밭이다. 야들한 녹색이 주는 싱싱함은 그들에게 더할나위 없는 위안일 것이다. 그 위에 부드러운 이파리들의 촘촘한 망이 만들어 낸 탄력이 지친 경기자들의 발을 어루만지듯 떠받아주는 포근함을 누가 마다하랴. 잔디가 뭇 풀들을 제치고 군림하는 이유는 또 있다. 뿌리의 얽힘이 땅의 흙쓸림을 막아 수많은 발길을 받아내기에 족한 탄탄함을 이룬다. 이 모든 기능성과 미관으로 인해 잔디는 계속 사람들의 관심 속에 종자개량을 거치며 번성해갈 것이다.

그러나 우리집 자그마한 뜰에서 축구나 골프를 하려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가끔씩 찾아오는 귀여운 손주들과 어울려 풀들 사이에 숨은 벌레 찾고 이름 맞추기로 족할 것이다. 메뚜기 튀듯 자꾸만 벗어나려는 그들의 손 꼭잡고 '이건 징그러워서 지렁이란다.' '이 꽃은 밥이 귀한 시절, 배고픈 며느리 먹으라고 주렁주렁 열려 며느리밥풀이란다' 제법 아는 체 해도 괜찮지 않은가.

큰 나무들 잎 틔워 그늘짓기 전에 어서 나가 한 세상 활짝 펼쳐보자고, 이른 봄 앉은 걸음으로 종종거린 앉은뱅이꽃. 늦가을 허공에 섹시한 향기뿌리는 노란 들국화. 구월에 꺽어쓰면 약된다는 구절초. 꽃이라 불러주기도 민망할듯 깨알같은 풍년초. 내 키를 웃돌게 높이 솟아 띄워올린 취나물, 하얀 떨기꽃. 잡초라고 뽑아 버렸던들 그들의 내밀한 삶의 속내를 어찌 엿볼 수 있었을까.

키도 들쭉 날쭉, 색깔도 갖가지. 모양도 제 각각이어서 지저분하고 혼란스런 우리집 작은 뜨락. 주인의 게으름 들어내는 징표라해도 나는 이제 아랑곳하지 않을 것이다. 오히려 많은 시간 빼앗던 풀뽑기에서 벗어난 홀가분함을 기뻐하리라. 사라진 깔끔함 대신 갖가지 풀들의 한 해 살이 속에서 내 기준만을 좇아 살아온 고집과 교만을 회개할 것이다. 살 날이 살아온 날에 비해 턱없이 모자라는 즈음에서야 작은 생명도 예사롭게 보아넘길 수 없는 철듦에 감사하면서.

월드컵 경기 보러 오는 외국인들 눈에 볼성사납다고 철거당하고 생존이 막막해진 노점상 사람들을 생각한다. 받은 딱지 헐값에 팔고 또 변두리로 밀려난 재개발지역 도시빈민들을 기억한다. 장애자 복지관 들어서면 아파트값 내린다고 벌인 주민들의 반대에 밀려 갈 곳 잃은 장애인들을 떠올린다. 차 더 많이 대라고 말없이 잘려나간 우리교회 뒷뜰의 정든 은행나무를 그리워한다.

이렇듯 우리는 다수의 이익을 내세워, 말없고 소수인 하나님의 피조물들을 변두리로 내 몰고 없애고 억누르는 일을 저지른다. 일사분란한 정갈함 뒤에는 밀려난 생명들의 눈물과 한숨이 있음에 우리는 애써 눈 감으려 한다.

일본의 어느 마을에는 '작은 성자'로 불리는 뇌성마비 중증 장애인이 있다 한다. 사지를 꼼짝도 못하고 자리에 누운 채 그가 하루 종일 할 수 있는 일이란, 천장을 바라보며 눈을 껌벅거리는 것 뿐이다. 그러나 그는 그 눈 껌벅거림 하나로 영롱한 시를 짓는다. 그의 맑은 시들은 주류에 다가가려고 애쓰다 지친 이들에게 휴식과 자족의 영성을 일깨운다고 전해온다.

하나님 보시기에 하찮은 생명은 없을 것이다. 다만 힘 있는 사람들이 이해득실에 따라 기준을 만들고 경계를 그어 평가하고 차별을 할 뿐이다. 쓸모없어 뽑히고 사라져야 할 잡초란 없다. 죽어 마땅한 인간도 없다. 그들이 세상을 향해 거센 가시를 세웠다 해도 처음 뿌리는 부드럽고 고왔다. 그 가시를 세우기 전에 세상의 호된 매를 맞았을 것이다.

서로의 다름을 알아주고 애정 어린 눈길을 보낼 때 잡초 하나 하나는 이름을 갖고 새롭게 태어나, 나와 관계를 맺는 꽃이 될 수 있다. 꽃이 없는 풀이 이 세상에 어디 있나. 잔디도 자르지 않으면 꽃 피우고 열매 맺고 단풍드는 일대기가 있음을 아는 이가 얼마나 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