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더 나은 고향"을 위하여

최완택 / 본회 이사, 민들레교회 목사

제가 입고 있는 이 개량 한복은 엊그제(10월 5일) 제주도에 사는 민들레 식구가 보내준 '제주 갈옷'입니다. 풋감을 짓이겨 그 물로 염색한 옷이죠. 여름 옷인데 시방 깊어가는 가을 절기인 한로(寒露)에 구태여 입고 나왔습니다. 여러분 보기에 좀 쓸쓸해 보일테고 저 자신도 좀 춥긴 합니다만 이 옷을 입고 나온데는 두가지 상징적인 의미가 있습니다. 우선 이 옷은 진솔옷입니다. 그리고 이 옷은 자연에서 온 옷입니다. 제주도에 사는 그 민들레식구가 왜 철 지난 옷을 뒤늦게 보냈는지 그 까닭은 모르겠습니다만 기독교환경운동연대 20주년을 감사하는 예배에 입고 나올 옷으로는 딱 알맞은 옷이라고 하겠습니다. 내일(10월 8일)이 한로 절기입니다. 봄, 여름, 가을을 살아온 오곡백과가 무르익도록 백로(白露)에 '흰 이슬'의 은총으로 오신 하느님이 한로에는 '찬 이슬'로 내리시면서 이렇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돌아가라, 돌아갈 때가 되었다!" 정신을 번쩍 차리라는 뜻이겠지요?

20세기가 시작되고 얼마 안 돼서 어떤 철학자가 말하기를 "20세기의 최대 비극은 고향상실이다"라고 이야기했습니다. 아마도 그 철학자 이름은 하이데거일 것입니다.

그 철학자의 말을 빌리지 않더라도 구약성서는 일찍이 "인간의 타락과 범죄는 고향상실의 비극을 가져왔다. 아담과 하와의 범죄는 인간의 영원한 고향인 에덴에서 추방되는 비극을 낳았다"고 말해왔습니다.

그래요. 성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야훼 하느님께서는  (범죄한) 아담 내외를 에덴 동산에서 내쫓으시었다. 그리고 땅에서 나왔으므로 땅을 갈아 농사를 짓게 하셨다. 이렇게 아담을 쫓아 내신 다음 하느님은 동쪽에 거룹들을 세우시고 돌아가는 불칼을 장치하여 생명나무에 이르는 길목을 지키게 하셨다."(창 3:22~24)

그래요. 시방까지 나는 성서에 이른대로 그런 줄 믿고 살았습니다. 즉 신이 범죄한 인간을 에덴으로부터 영원히 추방했다는 그 신학을 믿어왔습니다. 그리고 그 에덴으로는 결코 돌아갈 수 없는 것이라고 믿어왔습니다. 실낙원(失樂園)은 인간의 영원한 숙명이라고 믿어왔던 것입니다.

그런데 제가 80년대 초반에 친구 잘못 만난 죄로 억지로 공해문제연구소에 발을 들여놓았다가 소장, 이사장을 역임한 다음에 1989년 4월에 뒤쪽으로 물러났습니다. 그 후로는 산(山)과 사귀어왔습니다. 목산을 시작한 것이 1989년 4월 27일이었습니다.

그로부터 15년 세월이 지난 시방 나는 이런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에덴은 지금도 실재한다. 다만 인간들이 더럽히고 변질시키고 파괴함으로써 자신들이 스스로를 에덴동산에서 추방하고 있다." 아마 창세기를 기록한 고대의 신학자들이 이런 의식을 가지고 '다시는 돌아갈 수 없는 고향'을 그린 것이 아닐까 하고 생각해봅니다.

성서는 하느님의 자녀를 일컬어 '더 나은 고향(하늘에 있는)을 사모하는 나그네'로 그리고 있습니다.

저는 산행(山行)을 하다가 산정(山頂)에서, 풋풋한 자연 속에서 하늘을 우러러보면 그 순간 에덴동산에 사는 기쁨을 맛보게 됩니다. 성서는 믿음으로 살다간 믿음의 조상들에 대하여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모두 믿음으로 살다가 죽었습니다. 약속받은 것을 얻지는 못했으나 그것을 멀리서 바라보고 기뻐했으며 이 지상에서는 자기들이 타향사람이며 나그네에 불과하다는 것을 인정했습니다. 그들이 이렇게 생각한 것은 그들이 찾고 있던 고향이 따로 있었다는 것을 분명히 드러내는 것입니다.

만일 그들이 떠나온 곳을 고향으로 생각했었다면 그리로 돌아갈 기회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실지로 그들이 갈망한 곳은 하늘에 있는 더 나은 고향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느님께서는 그들이 당신을 자기들의 하느님이라고 부르는 것을 수치로 여기시지 않고 오히려 그들을 위해서 한 도시를 마련해주셨습니다."(히 11:13~16).

천한에 명문(名文)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말하는 "더 나은 고향"은 어디일까요? '고향'이면 그냥 고향이면 됐지 '더 나은' 고향은 도대체 어디에 있는 것일까요?

나는 생각하기를 '더 나은 고향'은 '잃어버렸던 고향', 아니 '싫어 버렸던 고향'을 되찾을 때에 이루어집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고향에서 쫓겨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고향을 버리고, 싫어버리고 타향살이를 하는 것을 잘난 삶으로, 출세한 삶으로 인정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 땅의 공해문제는 고향을 잃어버린, 아니 스스로 고향을 버린 인간들이, 제 땅에서 스스로 이방인이 된 인간들이 무책임하게 자기 땅을 더럽히고 욕심따라 변형시키고 파괴하기 때문에 일어나는 죽음의 현상을 말합니다.

'이방인'이 누구입니까? 말 그대로 '다른 나라'의 사람을 말합니다. 다른 나라 사람이니까 이 나라에 대해서 책임도 없고 사랑하는 마음도 없습니다. 그래요. '다른 나라 사람'이니까 책임도 사랑도 있을 수 없겠지요. 문제는 분명히 '이 나라' 사람인데 '다른 나라' 사람처럼 산다는 데 있지요.

프랑스의 실존적 소설가 알베르 까뮈의 '이방인'을 아시는지요? 이 소설의 주인공 '뫼르소'는 어디서 온지 모르는 허무한 감정 때문에 자기 땅에서 스스로 이방인이 되기도 하고, 그런 자기를 남에게 잘 설명해줄 수 없기 때문에 이방인으로 취급되기도 합니다. 알베르 까뮈는 아마도 자기 자신도 그 현상을 무어라고 설명할 수 없기 때문에 '졸음' 때문에 뫼르소가 이방인처럼 사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졸음 때문에 어머니의 죽음이 아무렇지도 않고, 졸음 때문에 사람을 죽이고도 심각하게 느끼지도 못하고 ….

거두절미, 요점을 말하자면, 우리는 시방 더 나은 고향을 위하여 부르심을 입었습니다. 성경이 말하는 '더 나은 고향'은, '하늘에 있는' 더 나은 고향은 저기 저 하늘 어디에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잃었던 고향', 아니 '싫어버린 고향'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어떻게 해야 그곳으로 갈 수 있는지 모르세요? 아니! 여러분은 잘 알고 있어요. 이미 알고 있는 것을 어김없이 실천하세요. 그러면 그대는 살 것이고 이미 '더 나은 고향'에 살고 있는 자기 자신을 보게 될 것입니다.  똑같은 것이로되 잃은 것을 찾아 얻으면 그것은 '더 나은 것'이 됩니다. 예수 말씀하시기를 "사람의 아들(人子)은 잃은 것을 찾아 구원하러 온 것이다(이글은 지난 10월 7일 본회 20주년 감사예배에서 한 말씀을 옮겨 적은 것이다. 최완택목사님은 80년대에 본회 소장과 이사장으로 일한 바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