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 며 생 각 하 며

십자가의 길을 걷는 성자, 달팽이
채희동 / 온양벧엘교회 목사, 본회 집행위원

달팽이집은 '내 안의 욕망'
달팽이가 무거운 집을 벗어버리지 못하고 숲길을 힘겹게 걸어가는 것을 보면, 우리 인생도 무거운 집을 짊어지고 가는 달팽이와 다를 바 없다는 생각을 해본다. 우리 인생을 생각해 보면,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떠오른다. "나를 따르려는 사람은 누구든지 자기를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한다."(마 16:24) 주님을 따르려는 자는 먼저 자기를 버려야 한다는 이 지당하신 말씀을 우리는 왜 헤아려 듣지 못하고, 달팽이집을 짊어지고 가는 달팽이처럼 우리는 인생의 무거운 욕망의 집을 짊어지고 예수를 따르겠노라 하는가.

자기를 버리지 않고는 십자가를 질 수 없으며, 예수를 따를 수 없다. 그러나 오늘날 교회에 오는 많은 기독교인들은 '자기'를 어깨에 한아름 가득 짊어지고 와서 자기의 소망, 욕망을 이루어 달라고 기도한다. 어쩌면 그들은 예수를 따르려고 교회에 오는 것이 아니라 예수를 이용하기 위해 오는 장사꾼과 같은 신앙이라고 할 수 있다. 어찌 '자기'라는 거대한 집을 짊어지고 예수의 제자가 되겠다고, 예수를 따르겠노라 말할 수 있는가?

시인은 말한다. 달팽이는 등에 짊어지고 다녔던 제 집을 벗어버렸노라고. 이것은 참으로 놀라운 일이다. 자기의 삶을 보호해주고, 자기만의 아늑한 공간이었던 집, 자신의 전부라고 여겼던 집, 그래서 한순간도 벗어낼 수 없었으며, 벗어 던진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었던 이 집을 달팽이는 과감하게 벗어버린 것이다.

이것은 자기 집에 집착했던 과거의 달팽이에서 이전과 다른 새로운 삶으로 다시 태어난 하나의 위대한 사건이었다. 자기 집착, 자기 독선, 자기 아집, 자기 욕망의 집을 벗어버린 이 일은 달팽이에게 있어서 하나의 종교적 회심이었다.   

등에 지고 다니던 제 집을
벗어버린 달팽이가
오솔길을 가로질러 가고 있었습니다.

우리도 달팽이처럼 나를 버리고 새로운 길을 걸을 수는 없는가. 달팽이처럼 세상의 온갖 욕망의 집을 벗어 던지고 우리 인생의 오솔길을 걸어갈 수는 없는가.

아, 우리는 하찮게 여겼던 달팽이에게서 참 신앙을 배워야 할 것이다. 자기를 버리고 새로운 길을 떠나는 달팽이가 우리보다 더 주님의 말씀을 따르고 있지 않는가. 우리도 시인처럼 나 자신을 숙여, 더 낮은 몸으로, 더 낮은 마음으로 달팽이의 회심을 들여다보고 배워야 하지 않을까?

나는 엎드려 그걸 들여다보았습니다       

우리는 때로는 지렁이, 무당벌레, 잠자리, 나비와 같은 아주 작은 벌레들에게서 주님의 말씀을 따라 살아가는 것을 볼 수 있어야 한다. 사람의 생각, 사람의 지식, 사람의 종교, 사람의 구원이라는 세계 속에 갇혀서는 우주 만물을 창조하시고, 그 속에 살아 계신 하나님의 놀라운 생명의 신비를 어찌 알 수 있겠는가. 달팽이의 모습에서 참 신앙을 찾아볼 수 있는 종교적 눈을 가져라.

좁은 십자가의 길을 걷는 '성자 달팽이'

자기의 집을 벗어버린 달팽이는 아주 좁은 길을 걸어간다. 작은 풀의 줄기나 풀잎을 타고 걸어간다. 자기를 버리고 가는 자는 남들이 가는 넓은 길, 안락하고 풍요와 축복이 보장되어 있는 길을 가지 않는다. 남들이 모두 외면한 좁고 불편하고 험한 길로 간다.

주님은 말씀하신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에 이르는 문은 크고 또 그 길이 넓어서 그리로 가는 사람이 많지만 생명에 이르는 문은 좁고 또 그 길이 험해서 그리로 찾아드는 사람이 적다."(마 9:13∼14)

자기의 집을 벗어버리고 아주 좁은 길을 걸어가는 달팽이야말로 주님이 말씀하신 '자기를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가는' 거룩한 성자와 같다. 자기를 위해서는 아무것도 걸치지 않고 소유하지 않고 아무도 잘 가지 않는 좁고 험한 길을 택해 걸어가는 달팽이의 모습에서 청빈과 절제의 삶으로 그리스도를 가장 닮은 성 프란체스코의 모습을 본다.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자유로운 달팽이는 인간의 눈으로는 보이지 않을 만큼 아주 천천히 걸어간다. 그는 걸어가면서 자신의 욕망을 실현시키기 위해 바삐 움직이거나, 다른 이들과 경쟁하여 더 많은 것을 얻기 위해 부지런히 뛰어가지 않고, 달팽이는 마치 성자가 순례의 길을 걷듯, 기도하는 성자의 모습으로 느릿느릿 걸어간다.

아주 좁은 그 길을
달팽이는
움직이는 게 보이지 않을 만큼 천천히
그런 천천히는 처음 볼만큼 천천히
건너가고 있었습니다.

어찌 이 세상에 갇혀 찌들어 살아가는 우리 같은 범인의 눈에 성자의 움직임이, 성자의 순례의 길이 보이겠는가? 아무리 눈을 씻고 보아도 달팽이의 움직임은 좀처럼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오늘 우리의 발걸음도 달팽이처럼 아주 느리게, 아주 조금씩 움직이면서 살아갈 수만 있다면, 우리의 삶도 아주 적게 벌어 적게 쓰며 적게 움직이며 살 수만 있다면, 아, 달팽이처럼 살 수만 있다면.

예수를 믿는 것도 너무 많은 것을 얻기 위해 믿고, 예수의 제자가 된다고 하면서도 자기의 욕망덩어리를 끈질기게 놓지 못하는 내 모습을 보면서 아, 달팽이처럼 예수를 믿어야 하는데, 달팽이처럼 주님의 길을 걸어가야 하는데, 하는 회개의 눈물이 흘러내린다.

그렇다. 달팽이의 '움직이는 게 보이지 않을 만큼 천천히' 걸어가는 그의 걸음은 어쩌면 자기가 걷되 하늘에 계신 아버지가 걷는 것이고, 내가 움직이되 내 안에 계신 주님이 움직이시는 것이 아닐까. '내가 아버지 안에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신 삶을 달팽이는 사는 것은 아닐까.

내 안에 계신 아버지의 이끌림대로 살아가는 달팽이는 세상의 모든 것이 정신 없이 서로 치고 빼앗고 싸우고 대결하며 사는 것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그저 느릿느릿 하늘의 소리에 따라 걸어갈 뿐이다.

내 안에 계신 그분의 숨결에 따라 걸어가는 달팽이, 내 안에 계신 하늘 아버지의 말씀을 따라 살아가는 그에게서 우리는 성속일여(聖俗一如)의 모습을 본다. 달팽이에게서 비로소 삶의 성화(聖化)가 이루어진 것이다. 말씀이 내 삶과 동떨어진 것이 아니요, 주님이 나와 다른 곳에 계신 것이 아니요, 하나님께서 내 삶 속에, 내 생명 속에 계셔서 나를 이끌어주시고, 나를 움직여주시며, 내 삶을 사시니, 내 삶이 거룩해지는 것이다. 그래서 시인은 자기를 버리고 아주 좁은 길을 천천히 순례자의 발걸음으로 걸어가는 달팽이의 모습을 '오늘의 성서'라고 말했다.

오늘의 성서였습니다.

그렇다. 하나님의 말씀은 성경 66권에 갇혀 있어서는 안 된다. 그 말씀은 우리의 삶 속에 이루어져야 비로소 생명의 말씀이 될 수 있다. 주님의 말씀은 성경이라는 문자를 통해 우리에게 전달되지만, 그러나 그 말씀이 때로는 문자 속에, 글자 속에, 신학이나 교리 속에, 교회와 설교 속에 감금되어 우리의 삶과 생명에까지 닿지 못할 때가 너무 많다.

달팽이가 보여준 참된 신앙

그러나 달팽이는 성경에 기록된 말씀이 문자에 갇혀 있지 않고, 그의 삶에서 이루어져 그의 삶이 거룩해지고, 마침내 주님과 하나되는 은총의 삶을 살 수 있었던 것이다.

오늘 우리의 성서는 성경 66권의 말씀이 삶 속에 온전히 이루어져, 우리 삶이 거룩한 성서가 되도록 살아야 하겠다. 결국 하나님께서 당신의 말씀을 우리에게 주신 것은 우리의 삶과 생명과 구원을 이루기 위해서 아니겠는가? 그런데 우리의 삶과 생명 속에는 아무런 힘도, 변화도 주지 못하는 성서, 그렇게 성서를 만들어 왔던 우리의 죄를 고백하고, 오늘 시인이 노래한 한 마리 달팽이를 통해 우리의 신앙을 되돌아보고, 우리의 삶을 잘 살피고, 그래서 마침내 삶과 말씀이 일치하는 달팽이와 같은 삶을 사시기를. 그래서 우리의 삶이 오늘의 성서가 되고, 우리가 친히 생명의 길을 걸어감으로 말씀을 새롭게 써 가는 삶이 되시기를 기원한다.

* 필자가 시로 읽은 예수의 마음들은 아래 책에 잘 실려 있습니다. 앞으로 몇차례 님이 보내준 자연과 관련된 글이 연재됩니다.

꽃망울이 터지니 하늘이 열리네
채희동 지음/ 뉴스엔조이 펴냄

"시를 읽는 목사. 시를 읽고 또 읽다가 마침내 스스로가 시가 되는 목사. 길을 가는 나그네. 길을 가고 또 가다가 마침내 스스로 길이 되는 나그네. 그가 여기 우리 곁에 있다. 하나님께서 이 땅에 베푸신 놀랍고 고마운 은총이다."(이현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