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의 자리

풍경소리는 풍경의 소리가 아니올시다

이현주

풍경소리는 풍경의 소리가 아닙니다. 풍경이 없으면 풍경소리도 없긴 합니다만, 풍경 혼자서 풍경소리를 낼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니까 풍경소리를 풍경의 소리라고, 그 소유권을 풍경에만 돌려서, 말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얼마나 뻔뻔스럽게 자기 것이 아닌, 자기 것일 수 없는 것의 소유권을 주장하고 있습니까? 아니면 최소한 그러는 자들을 묵인하며 동조하고 있습니까?

정말이지 요즘 우리가 살고 있는 이 갈데까지 간 자본주의 사회야말로 온갖 '소유권'이 춤추는 '소유의 낙원'이지 싶습니다. 뭐든지 다 누군가의 소유로 되고 마는 세상입니다. 금강산 구경하는 권리도 당분간 현대라는 회사가 독점했다니 얼마나 우스운 일입니까. 도시에 가면 길 가다가 용변보기도 쉬운 일이 아닙니다. 공중변소를 찾지 못하면 자물통이 달려 있는 변소문 앞에서 발만 동동 구르기 일쑤입니다. 참다 못해 잠겨 있는 변소문을 열고 볼일을 보려면, 변소의 소유권을 가진 다방이나 식당에 들어가서 마시고 싶지 않은 차를 한 잔 마시거나 라면이라도 한 그릇 먹어야 합니다.

무엇을 소유한다는 것은 사실은 귀찮은 일입니다. 그것을 위해서 시간도 들여야 하고 신경도 써야 하니까요. 오죽하면 무자식이 상팔자라는 말이 생겼겠습니까? 그런데 왜 사람들은 '소유권'에 그다지도 집착하는 걸까요? 소유 자체보다 거기서 나오는 이익 즉 돈 때문입니다. 막말로 돈이 안 생긴다면 어느 누가 무엇의 소유권을 주장하겠습니까? 결국 돈이 주인 노릇을 하게 돼 있는 자본주의 생리(生理)가 그대로 소유권 주장을 통해서 드러난 것입니다.

아메리카 인디언의 속담에 "좋은 것일수록 나누라"는 게 있다고 합니다. 참 좋은 말입니다. 왜냐하면 하느님의 법에 딱 들어맞는 속담이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은 세상을 만드실 때 모든 것을 함께 나누도록, 어느 것도 사유(私有)할 수 없도록, 그렇게 만드셨습니다. 그래서 하느님이 만드신 세상은 본디 공(公)한 세상이었습니다. 풀 한 포기 돌멩이 하나라도 모두 함께 나누며 함께 쓰도록 그렇게 만드셨습니다. 공(公)은 사사로운 것( )을 나눈다(八)는 뜻입니다. 사사사( )는, 팔꿈치를 안으로 오므린 모습으로, 모두 함께 지녀야 하는 것을 어느 힘센 놈이 제것으로 삼는 것을 표의(表意)한 문자입니다. 벼화(禾)에 사( )를 붙이면 사사로울 사(私)가 됩니다. 벼는 본디 하늘·땅·사람(농부)이 만든 공동작품입니다. 그래서 밥은 하늘이라, 모두 함께 나눠 먹어야 하는 것인데 어느 놈이 그것을 제 팔꿈치 안에 틀어잡고 이만큼은 내 것이니 손대지 말라고 했던 것입니다.

세상은 공(公)과 사(私)를 잘 구분하라고 가르칩니다만 하느님 나라에는 사(私)라는 게 도무지 없기 때문에, 공(公)을 따로 주장하지도 않습니다. 예수님 말씀에도, 부처님 말씀에도, 공(公)과 사(私)사를 구분하라는 가르침은 없습니다. 그런 말은 주로 회사사장이 즐겨 쓰는 말이지요.

공(公)이 공(公)인 까닭은 그것이 공(空)이기 때문입니다. 반야심경(般若心經)에 보면 오온(五蘊)이 모두 공(空)이라고 했습니다. 사물[物]과 인간의 마음이 모두 없는 것, 비어 있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우리 눈에 보이고 손에 만져지니까 있는 것처럼 인식되지만 사실은 그것이 착각이라는 얘기올시다. 꿈에 아무리 많이 먹어도 실제로 먹은 게 없듯이, 모두가 있는 것 같지만 사실은 없는 물건입니다. 명예도 재물도 권력도 지식도 알고 보면 모두 공(空)입니다. 그러니 없는 것을 누가 소유할 수 있겠습니까?

공(公)은 열린 것이고 사(私)는 닫힌 것입니다. 공중변소에는 문(門)이 없지만 사설 변소에는 자물통이 달려 있습니다. 하기는 문(門)이 따로 없으니 열어 놓는다는 것도 말이 안 되지요. 그게 공(空)이올시다. 따라서 공(空)은 임자가 따로 없습니다. 임자가 없으니 모두의 것이요, 그래서 공(空)입니다. 풍경소리가 누구 것입니까? 그것을 자기 것이라고 주장할 놈은 어디에도 없습니다. 바람이 없는데 풍경 혼자서 어찌 풍경소리를 낼 것이며, 풍경이 없는데 바람 혼자서 어찌 풍경소리를 낼 것이며, 바람도 있고 풍경도 있어서 소리가 울린들 그것을 실어 나르는 공기가 없다면 또한 풍경소리가 어찌 있겠습니까? 삼라만상이 숨을 쉬지 않으면 공기가 어찌 있을 것이며 그것들을 넉넉히 안아주는 허공(虛空)이 없다면 마침내 저 풍경소리가 어찌 나겠습니까? 그것은 모두가 내는 소리요, 따라서 모두의 소리입니다. 그러니까 모두의 것이며 아무의 것도 아닙니다.

좋은 것뿐 아니라 나쁜 것까지도(사실은 좋은 것 나쁜 것이 어디 따로 있겠습니까만) 모두 함께 나누고 함께 쓰고 그래서 한 생명으로 함께 살아가는 것이 하느님 나라의 질서입니다. 누구 하나 소외되거나 '왕따'로 되지 않습니다. 사(私)는 그림자도 용납되지 않습니다.

우리는 비록 사(私)가 판치는 세상에 살고 있지만 그러나 세속의 유행을 따르지 말고 하늘의 법을 좇아서 살아가라는("그러나 우리는 하늘의 시민입니다"―빌 3:20) 거룩한 가르침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말로만 그렇게 떠들고 실제로는 사유(私有)를 옹골차게 챙긴다면 그보다 더 '웃기는 짜장면'이 어디 있겠습니까?

"좋은 것일수록 나누라"는 인디언 속담을 소개하고 그렇게 살아야 한다는 주장을 담은 책을 펴낸 사람이 그 책의 판권에 시퍼런 눈알을 박고는 어느 놈이 인세도 물지 않고 해적판이나 내지 않나 사방을 두리번거린다면, 날아가던 참새가 웃을 일이올시다.

길게 말할 것 없어요. 사(私)는 사(邪)요, 그래서 갈 곳은 사(死)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사(邪)한 사(私)가 사(死)로 이끌어가는 세상에서 공(公)을 공(共)하는 공(空)으로 살아갑시다. 어째서 우리는 정가(定價) 딱지를 붙이지 않는 세상을 만들 수 없는 것입니까? 어째서 '지적 소유권' 따위 말도 안 되는 억지를 어길 수 없습니까? 도대체 어떤 지식을 또는 어떤 깨달음을 어느 놈이 독점으로 소유할 수 있다는 것입니까? 언제까지 우리는 대동강물 팔아 먹는 봉이 김선달의 농간에 놀아나야 합니까? 아니올시다. 그런 세상을 만들 수 없는 게 아니라 만들지 않는 것입니다. 지적 소유권을 무시하지 못하는 게 아니라 안 하는 것입니다.

안 된다고, 그런 세상은 이 자본주의 체제 아래에서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지레 포기하고 주저앉지 맙시다. 안 될 때 안 되더라도 시도는 해봐야지요. 그게 사람 껍질을 쓰고 태어난 우리의 자존심 아니겠습니까?

              풍경소리는 절대로 풍경의 소리가 아니올시다.
              나 말고 모든 이들과 함께 있을 때, 너는
              아무하고도 함께 있는 게 아니다.
              나 말고 아무하고도 함께 있지 않을 때,

              너는
              모든 이와 함께 있는 것이다.
              모든 이에게 묶여 있는 대신
              모든 이가 되라. 그렇게
              군중(群衆)으로 될 때, 너는
              아무것도 아니다, 공(空)이다.

              ­Rum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