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태적 전망에서 성서읽기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마 6:11)
노영상 / 본회 집행위원, 장신대 교수

주기도에 나타난 '일용할(에피우시오스)'의 번역은 단순하지가 않다. 보프는 그의 책 '주의 기도'에서 이 단어에 '필수적인', '매일의', '내일을 위한'이라는 세 가지 가능성을 보여주었다. 이를 살펴볼 때 우리의 식문화를 돌아보는 계기가 되었으면 한다.

필수적인 양식

"내 삶은 참된 양식이요 내 피는 참된 음료로다."(요 6:55) 참된 양식이란 필수적이고 본질적인 양식을 뜻한다. 이 세상에는 필요한 양식이 있는 반면, 그렇지 않은 비본질적인 양식도 있다. 꼭 먹어야 되는 양식이 있고 먹지 않아야 되는, 먹으면 해가 되는 양식도 있다.

"썩는 양식을 위해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해서 하라."(요 6:27) "너희가 어찌하여 양식 아닌 것을 위하여 은을 달아 주며 배부르게 못할 것을 위하여 수고하느냐."(사 55:2) 이 세상에는 참된 양식만 있는 것이 아니다. 참된 양식이란 영생하도록 하는 양식이다. 영생이란 우리가 체험해보지 못한 말이다. 우리가 알 수 있는 가시적인 말로 그 말을 표현하면 다음과 같이 된다. 생명을 주는 양식, 삶의 에너지를 주는 양식, 삶의 활력을 주는 양식, 삶에 창조성을 공급해주는 양식, 건강을 주는 양식이 참된 필수적인 양식이라는 것이다. 비싼 값을 주고 샀지만 양식이 안 되는 것이 많다. 비싸게 사먹어도 생명력을 주지 않는 양식이 있다.

일용할 양식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 매일의, 매번의 양식을 하나님께서 달라는 기도이다. 이 기도는 하나님이 주시는 양식이 아니면 먹지 않겠다는 결단을 의미한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양식만이 참된 양식이라는 것이다. 우리는 인간의 손에서가 아니라 하나님이 손에서 나오는 양식을 볼 수 있어야 한다. 모든 진정한 양식은 오직 하나님께로부터만 오는 것이다(시 104:14-15, 27-28).

요 6:31은 이러한 하나님이 주시는 양식을 하늘양식이란 용어로 표현하고 있다. 성경은 하늘에서 내려오는 떡의 실재를 우리에게 보여주신 바 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만나를 경험하였다. 또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오병이어를 통해 하나님께서 주시는 하늘양식의 위력을 보여주셨다. 하늘의 양식만이 진정 우리를 살릴 수 있는 양식이다.

보통의 인간은 땅으로부터 올라오는 양식들을 잘라먹고 산다. 그러나 기독교인은 하늘에서 내려오는 양식을 덧입고 사는 것이다. 인간의 생명은 하늘의 기운에 의해 지탱되어진다. 내가 가지고 있으면 빵이지만, 하나님께 바치면 주님의 오병이어가 되고, 거룩함을 입은 하늘의 양식이 된다.

하나님의 이름은 특수한 어떤 것을 통해 거룩히 되지 않는다. 가장 평상적인 일상의 밥을 통해 하나님은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기를 원하신다. 이 세상에서 빵과 떡이 하나의 거룩한 성만찬으로 변화할 때, 하나님은 그 안에서 자신의 거룩함을 드러내신다. 거룩한 양식이란 더럽지 않은 양식을 말한다. 더럽지 않은 양식은 정의로운 양식이다. 정의로운 양식이란 진정한 노동 곧 땀의 대가로 얻은 양식을 말한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주시는 양식을 구한다는 것은 참 노동에의 결단을 의미한다.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를 염려하지 말라."(마 6:31) "양식을 값없이 먹지 말고 수고하고 애써 주야로 일함으로 먹어라."(살후 3:8) 하늘의 양식을 구한다는 것은 먹을 가치를 추구함을 의미한다. 그 먹을 가치는 참다운 노동에서 나오는 것으로, 우리는 일함을 통하여 먹어야 하는 것이다. 참된 노동은 나만의 빵을 위한 것이 아니라, 우리 모두를 위한 것이자 하나님의 일이어야 한다.

내일의 양식, 성만찬적 양식

가치 있는 일을 하는 자에게만이 참된 양식이 주어진다. 우리는 과연 먹고 살 가치가 있는 자인가? 가치 없는 우리에게 양식이 주어졌다면 그것은 은총의 양식일 수밖에 없다. 우리가 밥상을 받음은 나 자신의 노동과 공적의 대가라 할 수 없다. 그것은 하나님의 그저 주시는 은총에 의한 것이다. 그것은 감사함으로 받아야 할 밥상이며, 믿음으로만 받을 수 있는 밥상이다. 모든 양식은 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이다. 그것은 은총의 양식으로서 값없이 우리에게 주어진 것이다. "너희 목마른 자들아 물로 나아오라 돈 없는 자도 오라 너희는 와서 사 먹되 돈 없이 값없이 와서 포도주와 젖을 사라."(사 55:1) 예수 그리스도는 최후의 만찬을 베푸시며 음료가 죄 사함을 위해 자신이 흘리시는 대속의 피라고 말씀하셨다(마 26:28). 그 피로 말미암아 무가치한 죄인이 가치 있는 곧 밥을 먹을 가치가 있는 의인으로 변화한다.

그러면 우리는 그 성만찬의 은총의 밥상을 어떻게 받을 수 있게 되는 것일까? 회개하는 자에게만이 성만찬적 밥상이 주어진다. 스스로 먹을 가치가 있다고 말하는 자에겐 어떤 음식도 감사한 것이 못된다. 그러나 스스로 무가치하다고 고백하는 자가 받은 밥상은 감사와 감격의 밥상일 수밖에 없다. 감사가 없는 밥상에는 투정만이 있을 뿐이나, 일하고 감격하여 먹는 양식은 아무리 소박한 것이라도 아름답다. 성만찬의 밥상은 천국에서 맛볼 밥상의 선취를 의미한다. 미래에 맛볼 밥상이 우리에게 앞당겨 주어진 것이다.

성만찬적 밥상은 오늘에 주어진 '내일의' 양식이다. 그것은 종말적인 양식이며, 인류가 맛볼 수 있는 최후, 최상의 밥상이다. 우리는 내가 차린 밥상 속에서 하나님이 차려주신 밥상을 보아야 한다. 매일의 식사가 성례전이다. 진수성찬을 차려놓고도 그 속에서 하나님의 은총을 발견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썩는 양식이지 참된 양식이 될 수 없다.

마 6:25은 우리에게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하지 말라고 하셨다. 살기 위해 먹는 것이 되어서는 안 된다. 살기 위해 먹으면, 먹기 위해 살게 된다. 오히려 우리는 일하기 위해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활동을 위해서 먹어야 한다. 그 순서가 바뀌면 먹는 것을 탐닉하게 된다. 물질적 양식이 우리의 전 생명을 좌우하는 것으로 착각하게 되면, 양식이 우리의 우상이 된다. 양식을 모시고 사는 사람들이 많다. 그렇게 되면 먹는 것이 삶의 중심에 오게 된다. 인간이 양식을 부리고 사는 것이 아니라, 양식이 인간을 쥐고 흔들게 된다. 우리가 경배할 분은 양식이 아니라 하나님이다. 그 하나님에게서 양식이 오는 것이지, 양식에서 하나님이 오는 것이 아니다. "너희가 어찌하여 양식 아닌 것을 위하여 은을 달아주며 배부르게 못할 것을 위하여 수고하느냐. 나를 청종하라 그리하면 너희가 좋은 것을 얻을 것이요 너희 마음이 기름진 것으로 즐거움을 얻으리라."(사 55: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