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의●자●리

침묵하면 하나님의 마음이 보인다.

"예수의 제자 중 하나 곧 그가 사랑하시는 자가 예수의 품에 의지하여 누웠는지라"(요 13:23)

이것은 최후의 만찬 때 일어난 일로, 예수님의 품에 안겨 있던 제자는 바로 요한이었습니다. 그가 그리스도의 가슴에 머리를 기댔고 예수님은 그를 품어주셨습니다. 이때 그의 귀에 무엇이 들렸겠습니까? 바로 예수님의 심장이 뛰는 소리였습니다. 그것은 생명과 사랑의 소리입니다. 그것을 통해서 우리는 우리의 영혼이 갈구하고 있는 것을 듣게 되는 것이지요. 우리가 침묵해야 하는 까닭은 우리의 영혼의 소리를 듣기 위함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 가운데에는 두가지 신앙양태가 있었습니다. 하나는 베드로 타입이고 또 하나는 요한 타입이었습니다. 베드로의 신앙은 그의 성격대로 적극적이고 전진적이며 목소리를 높여 선교하는 것이었습니다. 또한 세 번씩이나 주님을 모른다고 부인했던 그가 새 사람이 되었기 때문에 그는 사람들이 죄적인 존재라는 것을 강조했습니다.

반면에 요한의 신앙은 조용하고 여성적이었습니다. 예수께 안겨서 조용히 그분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침묵과 묵상으로 신앙생활을 했습니다. 그래서 그가 쓴 요한복음의 주제는 다분히 여성적으로 느껴질 만큼 생명과 사랑으로 일관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AD 416년에 어거스틴이 이 두 가지 신앙양태 중에서 베드로 타입의 신앙을 지지함으로써 요한의 신앙스타일은 점차 사라지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로마교황청은 인간의 본성을 죄적인 데 두고 회개와 구원을 강조함으로써 오늘날까지 크게 번성하게 되었습니다.

반면 어거스틴과 동시대를 살았던 펠라기우스라는 사람은 켈틱영성이라고 부르는 요한의 신앙양태를 지지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요한 타입의 신앙을 전파하면서 그 당시에는 결코 용납될 수 없는 두 가지 엄청난 일을 시도했습니다. 하나는 여성들에게 성경을 가르친 것이었고, 또 하나는 어린 아이들 속에 신성이 비춰져 있다고 주장한 것입니다. 특히 여성의 영성이 고귀하다는 것과 우리의 심령 안에 하나님의 형상이 엿보인다는 것을 강조함으로써 그는 이단으로 몰려 AD 418년에 교회에서 추방당했습니다. 그후 펠라기우스는 아이오나로 피신해서 자연 속에 숨겨진 하나님의 뜻에 귀기울이는 침묵훈련, 곧 켈틱 영성 개발의 창시자가 되었습니다.

이러한 영향으로 우리는 지금껏 힘차고 적극적인 신앙만을 선호해왔지 조용히 뒤로 물러서고, 자기를 부정하며 하나님 앞에 서서 그 분의 마음을 헤아리기 위해 침묵하는 영적 세계에는 소홀했던 게 사실입니다.

이제 우리는 하나님 앞에 서서 자신의 심령의 소리를 들을 줄 알아야 합니다. 그럼으로써 하나님의 신비한 생명과 사랑의 원천이 나의 심령에 담겨있다는 것을 인정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 우리는 침묵해야 합니다(김중기, '침묵의 훈련'(새사람, 593호)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