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연과 인간의 아름다운 만남(5) 마음밭 가꾸기 이현주 / 목사, 작가 동산양개(洞山良价)의
게(偈)에 이런 내용이 있습니다. "나 이제 홀로 가거니와 가는
곳곳에서 그를 만난다. 그는 곧 나인데 나는 그가 아니다. 이렇게 깨달아야
바야흐로 부처와 하나되리" 저와 선생님 사이도 양개의 '나'와
'그' 사이 같다고 할 수 있을까요? 선생님은 바로 나인데 나는 선생님이 아닙니까? - 그렇다. 무슨 뜻인지요? - 나는 네 길에 동행하는데 너는 내 길에 동행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그래도 잘 모르겠습니다. - 네가 무엇을 느끼면 나도 그렇게 느낀다. 네가 무엇을 생각하면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 네가 무엇을 말하면 나도 그렇게 말한다. 네가 무엇을 뜻하면 나도 그렇게 뜻한다. 이렇게 내가 동의하지 않으면 너는 아무것도 느끼거나 생각하거나 뜻할 수 없다. 일찍이 내가 말하지 않았느냐? 네가 나에게 붙어있지 않으면 아무 것도 할 수 없다고. 그게 그런 말씀이었습니까? - 숨이 너보다 크고 숨이 너보다 먼저다. 숨이 네게 붙어 있는 게 아니라 네가 숨에 붙어 있는 것이다. 네가 태어나기 전에 숨은 있었고 네가 죽은 뒤에도 숨은 있을 것이다. 내가 바로 그 숨이다. 숨이 너를 떠나지 않았기에 네가 좋은 짓이든 나쁜 짓이든 할 수 있는 것 아니냐? 그러면 제가 좁은 소견으로 누구를 탓할 때 선생님께서도 그를 탓하시는 겁니까? - 그렇다. 네 안에서 너와 함께 그를 탓하고 있다. 제가 만일 사람을 죽인다면 선생님께서 그를 죽이시는 겁니까? - 그렇다. 네 안에서 너와 함께 그를 죽인다. 무슨 말씀이신지, 납득이 되지 않습니다. - 네가 나와 동떨어진(동떨어질 수 있는) 존재인 줄로 아는 착각이 두터워서 그렇다. 나는 곧 너다. 네가 지금 종이에 글을 쓰고 있는 게 아니라 내가 쓰고 있는 것이다. 만물이 한 송이 꽃이다. 모두가 내 얼굴이다. 네가 선악(善惡)을 분별짓는 마음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한, 내 말을 납득하기 어려울 것이다. 선악이 있는 겁니까? - 있다. 그러나 그 둘이 '하나'의 다른 얼굴임을 네가 자주 잊는 게 탈이다. 산을 보아라. 같은 산에 응달과 양달이 있지 않느냐? 사람들은 흔히 응달은 나쁘고 양달은 좋다고 하지만, 응달과 양달은 다 좋은 것이다. 악도 좋은 것이란 말씀입니까? - 아버지께서 지으신 세계에 '좋지 않은 것'은 없다. 선생님께서 제 느낌과 생각, 말, 뜻에 동의하신다는 데는 더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그건 어디까지나 선생님 일이니까요. - 그렇다. 그건 네가 왈가왈부할 문제가 아니다. 그러나 제가 그 사실을 받아들이지 않을 수는 있잖습니까? - 물론! 그러면 나도 너와 함께 그 사실을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다. 결국 문제는, 제가 어째서 선생님 뜻에 동조하지 않느냐, 어떻게 해야 동조할 수 있느냐, 여기에 있는 겁니까? - 한 몸으로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는 법인데, 네가 네 뜻을 움켜잡고 있기 때문이다. 제가 어떻게 해야 선생님 뜻에 동조할 수 있습니까? - 네 뜻을 비우면 된다. 내가 겟세마네 동산에서 어떻게 했는지, 알고 있잖느냐? 그렇게 하여라. 그게 참 어렵습니다. - 네가 어렵다고 여기는 것일 뿐, 사실은 조금도 어려운 일이 아니다. 네 뜻을 비우고 내 뜻에 따르기를 진심으로 서원한 다음, 네게 다가오는 모든 상황과 사건 속에 내가 있음을 잊지 말고, 그것들을 알몸으로 받아들여라. 내가 친구의 배신과 빌라도의 재판과 눈 먼 군중의 욕설을 모두 받아들이고 마침내 아버지의 버림까지 받아들였듯이. 지인(至人)은 용심약경(用心若鏡)이라, 거울처럼 마음을 써서 오는 자 환영하지 않고 가는 자 떠밀지 않는다 했거늘, 네가 그렇게 하면 끝까지 간 자 아니겠는냐? 그러니 그게 얼마나 어려운 일입니까? - 해보았느냐? 아니면 미리 발 앞에 금을 긋고 그것을 넘지 않겠다고 버티는 거냐? 해본 사람은 안다. 그것이 하나도 어렵지 않다는 사실을. 선생님, 제가 제 뜻을 비우는 방법에 대하여, 좀더 구체적으로 일러주십시오. - 한 생각이 일어나면 뒷생각으로 그것을 지우는 연습을 평소에 자주 하거라. 뒷생각으로 앞생각을 거의 동시에 없애는 방법이다. 예를들면, 어떻게 하는 겁니까? - 한 송이 꽃을 보면서 너는 '저건 민들레다'라고 생각할 것이다. 그 때 곧이어 '저건 민들레가 아니라 생명이다'라고 생각하여 '저건 민들레다'라는 생각을 지우는 것이다. 거기서 끝나지 않고 다시 '저건 생명이 아니라 관념이다'라고 생각하면 '저건 생명이다'라는 생각이 지워진다. 이렇게 끝없이 '앞생각'을 지워나가는 연습을 하여라. 그 모든 생각을 다 지우고 최후로 남는 생각은 없습니까? 예를들어 '저것은 하나님 얼굴이다' 또는 '만물이 한 송이 꽃이다'라고 하면 그 생각을 지울 '뒷생각'은 없잖을까요? - 천만의 말씀! 그렇게 모든 생각을 지워버릴 '마지막 생각'이란 없는 것이다. 하나님에 관한 생각도 마땅히 지워져야 할 네 생각일 따름이다. 수련의 목표가 '네 생각' 비우는 데 있음을 명심하여라. 그러면 제가 한 송이 꽃을 보고서 '이건 하나님 얼굴이다' 라는 생각이 들었을 때 얼른 '이건 민들레다'라고 생각하여 '이건 하나님 얼굴이다'라는 생각을 지우라는 말씀이십니까? - 그렇게 하여라. 어떤 생각에도 머물지 말아라. 그게 바로, 아무데도 머물지 않고 마음을 내는(無所住而生基心) 것이다. 그렇게 자꾸 연습하다 보면, 네 뜻과 네 생각과 네 의지가 차츰 걷히고 마침내 너까지 사라져 구름 한 점 없는 푸른 하늘만 남을 것이다. 저기 이병철이 옵니다. 제가 그를 보고 '이병철이 온다'고 생각했다가 얼른 '사람이 온다'고 생각했다가 다시 '세상에 대한 애정'이 온다고 생각했다가 '귀농운동'이 온다고 생각했다가 이렇게 계속 제 생각을 지우고만 있으면 언제 그를 만나서 볼 일을 보겠습니까? - 너는 밥을 먹으면서도 숨쉬고 똥을 누면서도 숨쉬지 않느냐? 생각지우기를 숨쉬듯이 할 수 있어야 한다. 자꾸만 연습하면 버릇이 되어 자기가 하는 줄도 모르고 하게 된다. 그렇게 되면 한 생각에 머물지 아니함이 네 일상생활을 어지럽히는 일은 없을 것이다. 숨쉬기가 밥 먹고 똥누는 일을 방해하지 않듯이. 네가 생각지우기를 연습하느라고 볼일을 못본다면 한 생각에 사로잡힌 채 볼일을 보는 것보다 너를 위해서나 그를 위해서나 오히려 잘 된 일이다. 공자 사절(孔子四節: 無意, 無心, 無固, 無我)이 공자가 그런 경지에 이르렀음을 말한 것일까요? - 네 생각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