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학마당/생태학적 신학자들15

도르데 죌레(D. Söle) 정치신학적 생태학자

이정배/부설 연구소 소장,감신대 교수

죌레는 독일 함부르크 출신의 여성정치신학자이다. 그는 본래 부유한 중산층 가정에서 태어나 개인주의적 신앙을 갖고 신학공부를 시작했던 사람이다. 최근 몰트만의 70세 생일을 기념하며 기고한 논문에서 그녀는 자신의 신학여정을 다음처럼 기술하고 있다. "중산층 가정에서 태어나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느님만을 알다가, 아우슈비츠 경험 이후 신의 죽음을 말하기 시작했고 그 대리자로서의 예수의 정치적 삶을 추종하다가, 뒤늦게 여성에 대한 자각을 하게 되면서 하느님의 여성성(어머니)을 새로이 느끼게 되었고 지금 일흔을 넘긴 나이에 이르러 하느님을 신비로 고백하며 그 신비 속에 담겨진 저항의 의미를 배우고 있다"고 고백하였다. 생태신학자로서의 그녀의 자각은 여성신학적 자의식이 생겼던 시기와 맞물려 있으며, 하느님의 신비를 말하는 현재에 이르기까지 이어지고 있다. 그러나 그녀의 생태신학은 정치신학적 배경을 지니고 있음으로 해서 여타의 생태신학자들과는 구체적 내용에 있어서 다른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지금까지 출판된 도르테 죌레의 책으로는 「Stellvertre-ter(대리자)」, 「Phantasie und Gehorsan(환상과 복종)」, 「Leiden-Themen der Theologie(고난-신학의 주제)」, 「Gott Denken. Einf hrung in die Theologie(현대신학의 패러다임)」이 있고 생태학과 관련된 책으로는 「Liebe und Arbeit(사랑과 노동)」이 있다.

죌레는 과정신학의 모델을 사용하여 하느님의 일은 인간에게 전적으로 의존되어 있음을 말한다. 인간의 활동이 올바르게 이루어질수 없다면 하느님은 아무런 일도 성취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물론 그 반대의 경우도 죌레에게 있어서는 진리이다. 하느님의 본래적 계획이 없다면 인간의 힘씀도 무의미해지기 때문이다. 요컨대 신(神)과 인간의 상호의존적인 관계성에 대한 성찰이 죌레에게 있어서 근간이 되고 있는 것이다.

죌레는 인간이 하느님과 관계맺는 방법은 '사랑과 노동'이라고 이해한다. 이 때의 사랑이란 남녀간의 사랑으로서, 종교적 의미를 갖는 아가페가 아니라 '에로스'를 뜻한다. 남녀간의 참다운 육체적, 정신적 사랑이 없다면 하느님의 일이 지속될 수 없다고 보는 것이다. 에로스를 神人관계를 이어주는 형식으로 보는데는 그녀의 여성신학적 통찰이 자리하고 있다. 일방적인 희생을 요구받는 남녀의 관계가 아니라 상호평등한 남녀간의 사랑의 행위를 바라고 있기 때문이다.

한편 노동 역시 하느님의 창조행위를 이어가는 인간의 세계 내 행위이다. 죌레는 노동을 이해하는데 있어서 맑스의 개념을 사용한다. 맑스만큼 인간노동의 본질과 그로 인해 생겨나는 모순을 정확히 이해한 사람이 없다고 보기 때문이다. 생태학이 거론되는 자리도 바로 여기에 있다.

죌레는 노동의 세차원을 다음처럼 이해한다.

첫째는 자기표현의 행위, 둘째는 공동체를 이롭게 하는 일, 그리고 마지막으로 자연을 보존하는 것. 인간의 노동이 자신의 본질을 드러내지 못하고 먹고 살기 위한 일이 된다면, 그리고 억압적인 행위라고 한다면 그것은 저주받은 노동이며 하느님의 창조활동과 역행된다는 것이다. 또한 자신의 일이 자신만을 위하고 공동체를 섬기고 이롭게 하는 일이 못된다면 그것 역시 소외된 노동이라고 보았다. 마지막으로 인간의 노동이 궁극적으로 자연을 보존하고 자연과 함께 하는 것이 못 될 때 죌레는 그것이 하느님의 일이 될 수 없음을 역설하였다.

이렇듯 노동의 세차원이 충분히 갖추어지지 못할 때 인간은 하느님의 일을 하지 못하는 것이 되며, 인간사회가 사람으로 하여금 이런 노동을 하지 못하도록 하는 구조가 됨으로써 그것을 개혁하는 정치적 노력이 요구된다고 하였다. 특별히 여기서 죌레가 인간의 노동은 자연을 보존하는 것이 되어야 한다고 말했을 때 우리는 생태학과 관련된 중요한 신학적 통찰을 얻게 된다.

우리들이 행하는 일상적인 일들이 과연 자연을 보존하는 일이 되고 있는가? 아니면 소비자(consumer)로서 우리의 삶이 그 어원대로 파괴자로 살고 있는지를 심각하게 묻도록 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과연 하느님의 일을 하며 살아가는 존재인지를 숙고해 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