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농작물이야기 [ 3 ]

초가지붕 위에서 도란거리는 박

박은 다분히 여성적이다. 호박의 거친 세력은 남성에 비유한다면 박은 소박한 여인 쪽이다. 호박 덩굴은 만지면 손에 가시가 묻어나지만 박은 종일 만지고 싶을 정도로 살결이 부드럽다. 호박과 박은 애초부터 같이 살 수 없는 처지다. 같이 심으면 호박의 털가시가 박에 박혀 자라는 것은 물론 달렸던 박도 죄다 오그랑쪽박이 되고 만다. 그래서 같이 심지 않고 하나는 초가 지붕에 다른 하나는 울타리에 심는다.

박꽃은 너무 하얘 보기만 해도 눈이 시릴 정도다. 쳐다만 보고 있어도 고개를 떨구는 게 너무 연약해 보인다. 그래서 환한 대낮을 피해 밤에 몰래 피었다가 아침 햇살에 고개를 떨구나 보다. 박꽃이 하얗게 핀 밤이면 눈이 온 밤처럼 길이 훤하게 드러난다. 이 길을 걷는 선남선녀가 어찌 사랑하지 않고 배겨내겠는가.

씨만 던져 놓으면 저절로 자라는 박

사람 가까이에서 자라는 박은 채소류에 속할까 바가지를 만들기 위한 공예작물이라 해야 할까? 아무튼 일찍부터 우리와 가까이 지내온 작물임에는 분명하다. 보통 죽담이나 울타리 위로는 박을 올리고 초가지붕 위로는 위채 아래채 구분없이 박을 올렸다. 그러나 일반 농지에 다량 재배하는 경우는 아주 드물었다. 농가마다 몇 포기만 올려놓아도 집에서 쓰고 남아돌아 바가지를 만들어 시장에 내다 팔 만큼 달렸다. 요즘은 바가지가 필요 없고 박나물에 입맛이 끌려 몇 포기 심는 게 고작이다.

박은 특별한 재배법이 없다. 일 년 자라면 초가지붕을 죄다 덮을 정도니 두엄만 넉넉하게 주면 제 스스로 자라준다. 뿌리가 사방으로 몇 발씩 뻗어 거름을 흡수하는 힘이 아주 강하고 병이라고는 모른다. 그래서 요즘 수박 재배 농가에서 수박을 접붙이는 대목으로 박을 이용하고 있다. 접붙인 모종은 거름을 잘 흡수하고 덩굴 쪼김병에 강하며 연작 피해도 줄여 거의 접붙인 모종을 재배한다.

뿌린 씨앗이 싹이 트면 녀석들이 붙들고 올라갈 손을 준다. 이내 덩굴 손을 뻗어 칭칭 감고 기어오른다. 박이 익어간다. 딴에는 덩굴손으로 새끼줄을 꼭 붙들고 있지만 곧 굴러 떨어질 것만 같다. 지붕 위에 올라가서 아래쪽에 꼬챙이 두 개를 꽂고 새끼를 엮어 받쳐준다. 기와 지붕은 덩굴손이 움켜쥘 만한 것이 없어서 박을 올리지 못한다.

크게 키우려면 한 포기에 몇 개만 두고 나머지는 생기는 대로 죄다 따 없애면 된다. 커진 박은 꼭지 부분을 뚜껑으로 도려 내고 속을 파내어 뒤웅박을 만든다. 뒤웅박은 들이가 아주 커 쌀독은 물론 다른 곡식을 담고 때론 물동이로도 쓴다.

박바가지에 담긴 박나물에서는 달빛 냄새가 나고

속을 파서 회무침을 하고 겉은 썰어 나물을 해먹는다. 박속을 회무침하면 맛이 어떨까? 껍질이 채 딱딱해지지 않은 박을 따서 닳은 숟가락으로 껍질을 긁고 쪼갠다. 하얀 박속을 숟가락으로 발라낸다. 반으로 쪼갠 수박을 숟가락으로 파먹듯이, 발라낸 박 속에 소금을 뿌려 손으로 주물럭거리면 이내 물을 게워 올리며 흐물흐물 숨이 죽는다. 손으로 쥐어짜면 씨가 톡톡 볼가진다. 이를 물에 헹궈 갖은 양념을 한 초고추장으로 회무침한다. 육류처럼 졸깃하게 씹히는 게 노란 달빛 냄새를 풍기며 꿀꺽 삼킬 때마다 산뜻한 바람 냄새가 난다. 하얀 접시에 담고 그 위를 참깨와 흑임자로 물들이면 그림 같은 박 속 회무침이 된다. 미나리 줄기를 약간만 넣으면 더욱 생기를 띤다.

속을 발라 내고 남은 나머지 살을 썰어서 식용유에 볶으면 박나물이 된다. 들깨를 갈아 넣어 걸쭉하게 해서 먹기도 한다. 박고지는 덜 익은 박 껍질을 깍고 속을 발라낸 나머지 육질을 호박고지처럼 뱅뱅 돌려 가며 적당한 두께로 도려낸다. 꼬맹이가 어머니가 깍는 끝을 잡고 대청과 안방을 오간다. 끊어질까 조마조마해가며. 이렇게 깍아낸 걸 빨랫줄에 널어 말린다.

꼽꼽할 때 빨래를 개키듯이 한 묶음씩 묶어 보관했다가 풋나물이 귀한 겨울철에 나물해 먹는다. 박 정과를 만들 땐 썰어말린 연근, 당근, 인삼, 무 심지어는 미역 줄기도 함께 넣어 졸인다. 정과 나름대로 맛과 멋이 있지만 박 정과는 속이 말갛게 드러나서 꼭 맑게 언 얼음 같다.

바가지 쓰임새는 아주 폭넓었다. 그런 바가지 대부분은 박바가지가 차지했다. 바가지용 박이 따로 있는 게 아니고 박이 익어 껍질이 굳어진 걸로 만드는 것이다.

"동냥은 못 줄망정 쪽박은 왜 깨!" 옛날 거지가 밥을 얻어먹으려고 들고 다니던 바가지를 쪽바가지라 한다. 가정에서도 바가지로 밥그릇을 대신한 경우가 허다했다. 가볍기가 요즘 스티로폼 같아 논밭에 새참을 이고 나갈 땐 바가지로 밥그릇, 국그릇을 대신했다. 바가지로 막 떠올린 샘물이 너무 차 행여 체할까봐 버드나뭇잎을 띄워 주었던 새색시. 그이를 떠올리니 시원함이 간장을 녹일 정도다.

박바가지를 만든다. 하얗게 색이 바랜 박에 손톱자국이 찍히지 않으면 잘 여문 거다. 따서 타는데 이가 가는 톱으로 톱질한다. 톱질할 때 속까지 하지 않고 빙 둘러가며 겉만 톱질해 벌리면 속이 쏙 빠져 나온다. 박 속 가운데 작은 숨구멍이 있는데 이곳에 가는 새끼를 꿰어 처마 밑에 매달아 두었다 이듬해 씨로 쓴다. 어떤 녀석은 이걸 공처럼 차고 다니기도 한다. 솥에다 격자 겅그레를 하고 그 위에다 바가지감을 올려 김으로 찐다. 푹 익었다 싶으면 들어내어 식기 전에 겉껍질을 얇게 긁어낸다. 닳은 숟가락이나 칼을 이용하면 깨끗하게 벗겨진다. 나무 그늘 아래 멍석을 깔고 쭉 널어 말린다. 노릇하게 익은 바가지에는 박 특유의 향이 나며 마르면 반질반질 윤기가 난다. 이렇게 만든 바가지는 주로 부엌용품으로 쓰는데 튼튼하지 못한 게 흠이다. 그래서 수십 개가 넘는 바가지를 끈에 꿰어 주렁주렁 매달아 둔다. 누구에게나 고향의 정감을 느끼게 하는 모습이다. 바가지로 탈을 만들어 쓰고 사물놀이패에 끼여 덩실덩실 어깨춤을 추는 풍경이 눈에 선하다(우리가 정말 알아야 할 우리 농작물 백가지(이철수 글, 현암사)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