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태적 삶을 꿈꾸며

유토피아의 일과 여가

정수복 / 사회운동연구소 소장, 청파교회 집사

1년이 12달이라면 하루는 24시간으로 되어 있다. 그 24시간을 무슨 일을 하며 어떻게 쓰느냐가 우리의 삶을 구성한다. 그렇다면 과연 하루에 몇 시간 일하는 것이 자연의 리듬에 가장 어울리고 인간의 행복한 삶을 보장하는 것일까? 조금 적게 일하고 조금 적게 소비하며 인생을 보다 잘 즐기며 사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조금 더 벌기 위해 더 많이 일하면서 실속 없이 바쁘게만 사는 사람들도 있다.  

나는 제대로 살기 위해서는 게으름의 권리와 낮잠 잘 수 있는 권리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하루 몇 시간이나 일하는 것이 가장 이상적이고 인간적인가? 우선 유토피아를 꿈꾸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모든 유토피아 사회에서 사람들은 결코 삶의 대부분의 시간을 일로 보내지 않는다. 그리고 동서양 어느 곳에서나 현자들은 일에 매이지 않는 자유로운 삶을 살았다. '게으름의 권리'에서 라파르그는, 인간은 근면한 노동을 통해 다시 낙원에 들어갈 수 있다는 구원의 기대를 거부한다. 라파르그의 확고한 법칙에 따르면, 하루에 3시간 이상을 일해서는 안된다. 부자연스러운 욕심은 조직의 쇠퇴를 가져온다. 게으름만이 창조적이고, 실업이야말로 우리가 도달해야 할 이상적 상태다. '아름다운 삶, 사랑 그리고 마무리'를 쓴 헬렌과 스코트 니어링 부부도 하루 3시간 노동을 주장하고 실천했다. 그들은 떠났지만, 그들이 일구어놓은, 미국 메인주에 위치한 '조화로운 삶 센터'에 사는 사람들은 아직도 하루 3시간만 노동하고 나머지는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보낸다. 다른 한편 캄파넬라는 '태양의 제국'에서 개인이 하루에 해야 할 일은 채 4시간도 안된다고 보았다. 어니스트 칼렌바크도 '에코토피아'라는 소설에서 하루 4시간만 일하는 것을 다음과 같이 묘사한다. "에코토피아 사람들은 무능하고 게으르게 보인다. 그들은 독립 이후 주 20시간 근무제(하루 4시간씩 5일)를 채택했다. 결과적으로 국민 총생산량은 3분의 1로 줄었다. 근무시간 축소의 가장 심오한 의미는 철학적이고 생태학적인 것이었다. …"

유토피아가 아니라 역사에 존재한 미국의 원주민인 인디언들도 하루에 3시간에서 5시간밖에 일하지 않았다. 평균해서 그러했고 일하지 않는 날도 많았다. 철학자 버트란드 러셀도 유토피아가 아니라 현실에서 4시간 노동제가 가능하다고 주장했다. 그는 노동시간 단축과 실업 문제 해결을 동시에 이룰 수 있다고 생각했다.

하루 3-4시간 노동이 아무리 생각해도 너무 적다는 사람들은 토마스모어의 '유토피아'를 읽어보라. 그는 사회의 욕구를 만족시키는 것은 하루 6시간의 노동으로 충분하다고 말한다. "허랑방탕한 소비만 일삼는 귀족과 부자들 모두 생산에 참여하면 하루 6시간 노동으로도 필요한 것을 생산하기에 충분하다. 생산된 물품은 약한 자들에게 먼저 나눠주고, 나머지는 골고루 나눈다. 잉여물자가 있으면 기근이나 역병으로 고생하는 이웃과 나눈다. 금, 은 등은 하찮은 것을 만드는 데 쓰이니, 탐할 이유도 없다."

신이 세계를 창조할 때, 엿새 동안 일을 했고 바로 이어지는 일곱째 날에는 기쁜 마음으로 휴식을 취했다. 인간의 육체는 기계와 달리 스위치만 누르면 작동되는 것이 아니다. 일하기 위해서는 휴식과 준비가 필요하다. 인간의 생리적인 리듬과 욕구는 어떤 외적 통제를 통해서도 완전히 제거될 수 없다. 그러므로 휴식이 없는 분주한 기계적인 삶은 결코 인간적인 삶이 될 수 없다. 우리는 일상적으로 '빨리 빨리', '피곤하다', '스트레스 쌓인다', '며칠 푹 쉬고 싶다' 등의 말을 얼마나 자주 하며 살아가고 있는가. 그래서 휴일이 늘어야 나라가 산다는 말이 나오고 있을 정도다. 휴식과 여유를 즐길 수 있고 게으름을 피우고 낮잠을 잘 수 있는 여가를 충분히 갖게 되면, 그 때 사람들은 지금보다 더 나은 상태에 대한 꿈을 꿀 수 있는 능력을 회복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지금과는 다른 대안적인 삶을 꿈꾸기 위해서는 일단 일의 쳇바퀴에서 벗어나 휴식 시간을 가져야 한다. 휴식은 절대로 텅 빈 무(無)가 아니다. 휴식은 사색과 예견, 망각과 이해를 위한 시간이다. 휴식은 삶의 긴장을 풀어 몸과 마음을 느슨하게 해준다. 점점 시끄러워지고 참을성이 없어지는 이 세상에서 휴식의 시간은 우리들의 마음을 평온하게 하고 정적과 침묵 속에서 자신과 만나는 시간을 의미한다. 참된 쉼은 우리들 마음의 거미줄을 말끔히 치워준다.

여가는 일하는 사람들에게도 중요하지만, 앞으로는 일이 없는 사람들에게 더 중요해진다. 일에서 벗어나 자유로운 시간을 누리게 된 사람들이 일 때문에 실현하지 못했던 자아를 더 성숙시키고, 하고 싶었던 일들을 하면서 시간을 의미있게 보낼 수 있는 준비를 해나가야 한다. 사회 전체적으로 앞으로 여가시간이 늘어나는 추세에 대비해서 새로운 삶의 양식을 만들어가는 일에 신경을 써야 한다. 구조조정으로 회사에서 밀려난 이들만이 아니라 경기 침체로 노동시장에의 진입이 늦어지고 있는 젊은 대졸 실업자들도 늘고 있다. 실업과 노동시간 단축으로 여가시간은 더 늘어날 것이다. 또 의학 발달로 인간의 수명은 점점 더 길어지고 있다. 이렇게 생긴 여가시간을 의미있게 보내기 위해서도 새로운 삶의 양식이 필요하다. 단순하지만 창조적인 삶의 양식을 젊은 시절부터 몸에 익혀 나가야 한다.

노동시간이 줄어들면 사람들이 늘어난 여가시간을 주체하지 못하게 될 것이라고 걱정하는 사람들이 있다. 하루 24시간 중 4시간만 일하게 되면 여가시간을 어떻게 채워갈 줄을 몰라서 지루해하고 결국은 사회적으로 문제가 되는 상황이 일어날 것이라는 예측이다. 그러나 이런 주장을 하는 사람들은 십중팔구 일하지 않고 먹고사는 사람들, 다른 사람의 근로 시간을 연장시키며 자신만 여가를 즐기고 있는 사람들일 것이다.

앞으로 모든 사람이 4시간 이상 노동하도록 강요받지 않는 세상이 오면 특정의 유한 계급이 무의미해지고 누구나 자신의 재능과 재질을 충분히 발휘할 수 있는 기회를 가질 수 있게 될 것이다. 밥 벌어먹고 살기 위해 상업적 작품만을 만들다가 자신의 취향과 재능을 다 잃어버리는 예술가의 비극은 더 이상 없을 것이다. 의사와 교사와 정치가와 사업가들은 모두 자신의 직업을 창조적으로 수행하기 위해 필요한 지식과 기술을 습득할 수 있는 충분한 시간을 가질 수 있을 것이다.

과학기술에 기초하여 인간의 욕망을 극대화하고 그것을 최대한으로 만족시키는 것을 목표로 하는 현대 문명은 내재적으로 생태위기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 이를 벗어나는 길은 새로운 문명으로의 전환 밖에는 없다. 문명전환운동은 노동시간을 줄이고 여가를 늘리고 지금까지와는 다른 새로운 생활양식을 만들어 실천하는 일에서 시작된다. 문명전환운동은 노동의 시간이 아니라 여가의 시간에 보이지 않게, 서서히 시작될 것이다('환경과 생명', 2001 여름호에서 옮겨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