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태적 전망에서 성서읽기

로마서 : 피조물의 탄식

              노영상 / 본회 집행위원, 장신대 교수

                         

"생각컨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 피조물이 고대하는 바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나타나는 것이니 피조물이 허무한 데 굴복하는 것은 자기 뜻이 아니요 오직 굴복케 하시는 이로 말미암음이라. 그 바라는 것은 피조물도 썩어짐의 종노릇 한데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의 자유에 이르는 것이니라. 피조물도 다 이제까지 함께 탄식하며 함께 고통하는 것을 우리가 아나니 이뿐 아니라 또한 우리 곧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를 받은 우리까지도 속으로 탄식하여 양자 될 것 곧 우리 몸의 구속을 기다리느니라."(로마서 8:18-23)

이 본문은 피조물도 인간과 같이, 하나님의 구원을 기대하고 있음을 말한다. 피조물은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에 이르기를 바라고 있다. 인간뿐 아니라, 온 피조물이 해방과 자유의 구원을 바라는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자연의 구원은 자연 자체의 힘으로 되는 것이 아니며, 하나님의 성령의 능력에 의해서만 가능하다. 그 피조물은 하나님의 아들들이 나타나서 자신들을 해방 또는 구원하기를 고대하고 있다. 여기서 하나님의 아들들(the sons)이란 단어가 복수로 쓰여진 것으로 보아 예수 그리스도를 일차적으로 의미하기보다는 신자들을 언급하는 것으로 보는 것이 좋다고 여러 주석들은 말한다. 자연의 회복을 위해 인간 나름의 역할이 있다는 것이다. 이에 생태적 구원에 있어서의 인간 편의 책임이 요청된다. 자연은 하나님의 아들들이 나타날 것을 바라보며, 현재 고통 중에 신음하고 있다. 그러나 그러한 고통은 절망을 향한 고통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들이 나타나면 새로운 기쁨이 될 일종의 산고와 같다. 현재의 고통은 장차 전 피조물을 포함한 우리에게 미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는 것이다.

인간의 영은 이미 하나님의 성령에 의해 새롭게 되었지만, 인간의 몸은 그와 다르게 현재에 있어 고통을 당하는 중에 있다. 하나님의 처음 익은 열매인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우리의 영은 새로워졌으나, 우리의 육체는 아직도 구태의연한 고통 중에 있다. 그렇게 몸의 구원이 영의 구원과 같이 하듯, 자연 만물의 구원에 인간의 구원이 선행하여 있다는 것이다. 인간의 몸에 대해 인간의 영이 차지하는 위치가, 자연에 대한 믿는 자 곧 인간이 담당하는 위치와 같다. 영이 새롭게 되어 몸도 새롭게 되는 것 같이, 인간이 책임을 다하지 못하면 자연 또한 무너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피조물들이 허무한 데 굴복하는 것은, 자기의 뜻이 아니며, 그들을 허무한 데로 굴복케 하는 인간들에 있음을 본문 20절은 말하고 있다. 우리 인간이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자연은 행복한 가운데 있을 수 있으며, 헛된 불행함에 빠질 수도 있다. 오늘의 자연에 대한 파괴는 전적으로 자연에 책임이 있다기보다는 우리 인간의 잘못에 있다고 보는 것이 옳다. 강이 이렇게 된 것, 산이 이렇게 된 것, 공기가 이렇게 된 것 모두 우리 인간의 욕심과 무분별함 때문이다. 동물과 식물들은 자연을 파괴하지 못한다. 그들을 파괴의 자리로 가게 하는 것은 우리 인간들이다. 그러나 그 피조물들이 헛됨에 굴복하는 중에도 희망이 없는 것은 아니다. 우리의 성경엔 생략되었으나, 헬라어 성경엔 19절에 '소망 안에'(in hope)라는 단어가 '오직'이라는 단어 앞에 삽입되어 있다. 그러한 헛된 자연의 고통 가운데에도 희망이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그때가 오면 이루어질 전 피조물의 완전한 회복을 기다리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