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농작물 이야기          씨만 뿌려 놓아도 저절로 자라는 수수
                                                           
이철수

수수는 차츰 잊혀지는 작물 가운데 하나다. 옥수수나 고구마에 밀려 전분 원료로도 설자리를 잃고 플라스틱 빗자루에 밀려 수수비도 자취를 감추고 있다. 중국산 수수비가 겨우 명맥을 잇는다. 지금까지 우리나라에서는 수수밭이라고 이름붙일 만한 곳이 없었다. 주로 콩밭에다 심심풀이 삼아 드문드문 세우거나 울타리처럼 밭 가장자리를 에두르는 게 고작이다. 중국은 재배면적이 아주 넓다. 중국 영화 '붉은 수수밭'은 끝없이 펼쳐진 수수밭과 배갈을 제주하는 술도가가 배경이다. 배갈은 고량주라고도 하는데 독주이다. 고량(高梁)은 수수의 한자 이름이다.

수수는 재배한다기보다는 저절로 자란다는 말이 더 어울린다. 씨뿌리는 시기는 5-6월이다. 밭 둘레나 뒷간 길 옆에 드문드문 씨를 흘려놓는다. 환경 적응력도 강해 건조한 곳이나 척박한 곳을 가리지 않고 햇빛만 닿으면 신명나게 자란다. 키가 커서 다른 잡초는 경쟁 상대가 못된다. 거름을 뿌린 만큼 갚는 작물이다. 수수만 재배하려면 밭에 거름을 충분히 주고 쟁기로 간 골을 켠다. 거름을 잘 흡수해 이듬해 심을 작물에까지 영향을 주는 점을 감안해 거름을 줘야 한다. 골에다 두세 알씩 한 뼘 간격으로 점뿌림한다. 물론 알곡을 거두고자 할 때는 조금 드물게, 잎줄기를 거두려 할 때는 약간 간격을 좁힌다.

수수에는 바람소리도 거름이 되나 보다. 쑥쑥 자라는 게 눈에 보일 정도다. 병충해는 신경쓰지 않아도 된다. 옛날에는 이름이 천박해야 병에 걸리지 않고 오래 산다며 아이들 이름을 개똥이 등으로 천박하게 지었다. 수수는 이름이 천박해서가 아니라 다른 곡류보다 홀대당해서 병충해마저 피해가나 보다. 그러다 보니 메뚜기류가 즐겨 찾는다.

바람에 뒤뚱거리면서도 달이 차니 배가 부풀어오른다. 이내 이삭을 밀어 올리느라 분주해진다. 출렁출렁 춤을 추면서 씨알이 붉게 물들기 시작한다.

실내용 비를 예쁘게 만들려면 이삭이 여물기 전에 뽑고 청예 사료용은 이삭이 나오기 전에 거두면 한 번 거둘 수가 있다. 곡물용인 경우는 껍질 잎에서 뻘건 핏빛이 배어나오고 이삭에 붉은색이 돌 때 거두면 된다. 알곡을 떨어내고 남는 빈 이삭대는 비를 만드는데 실내비보다는 좀 거칠다. 가을에 고구마를 삶는 솥에다 수수를 이삭째 삶는다. 한 솥이면 참새입으로 종일 까먹을 수 있어 심심풀이로는 최고다.

수확한 수수를 도정한 것을 '수수쌀'이라 한다. 정월 대보름날 오곡밥에도 수수쌀이 들어가야 제맛이 난다. 그러나 수수는 조, 기장과 함께 시원찮은 곡류로 밀려난 지 오래다. 요즘엔 건강식으로 찹쌀에 수수, 조, 기장 등을 섞은 잡곡밭을 먹거나 이들을 생으로 가루낸 걸 선식이라 하여 장복하기도 한다. 이쯤 되면 위상이 제법 올라간 게 분명하다. 하지만 실제 이용하는 이는 매우 적으니 여전히 멸종 위기다.

찰수수는 어느 곡류보다도 찰기가 강하다. 그래서 찰부꾸미는 입 안에서 짝짝 소리를 내며 맛이 오래 남는다. 밤톨만하게 떼어 낸 수수가루반죽을 번철 위에 얹고 숟가락으로 얇게 민다. 그 위에 무지개색 잎맨드라미를 곱게 수놓는다. 기름이 자르르하게 발린게 별미다. 이게 수수부꾸미다.

수수깡 공작은 수수 이삭대를 이용한다. 적당한 길이로 잘라 칼로 껍질을 벗긴다. 이삭이 달렸던 쪽에서 벗겨 내려야 고르게 벗겨진다. 하얗게 드러나는 속살은 손에 닿는 감촉도 좋지만 그냥 먹고 싶은 생각이 들 정도다. 이빨로 지그시 깨물어 본다. 스티로품 같지만 질이 전혀 다르다. 속살은 속살대로 껍질은 껍질대로 따로 모은다. 수북이 쌓아 놓으면 가슴이 뿌듯한 게 천석꾼이 부럽지 않다.

별다른 놀이감이 없던 시절 수수깡이 아이들을 데리고 놀았다. 칼과 수수깡만 있으면 하루 종일 혼자 있어도 심심하지 않다. 못 만드는 게 없다. 갖가지 동물부터 생활 용구까지 그대로 흉내냈다. 하얀속살을 토막내어 이음 재료나 몸통으로 쓰고 껍질로는 안경테와 다리를 만든다. 이렇게 만든 안경을 코 끝에 걸치고 마른 기침을 뱉으며 할아버지 시늉을 한다.

수수깡 따먹기에 쓰는 수수깡은 껍질을 벗기지 않는다. 길이도 젓가락 정도로 일정해야 한다. 수숫대는 껍질이 매끈해서 손끝 감촉만 즐겨도 될 정도다.

방 윗목에 수숫대로 바자를 엮어 고구마를 보관하는 걸 통가리라 한다. 원래 통가리는 쑥대나 싸리 등으로 바자를 엮어 마당에 세우고 속에 감자나 곡식을 보관하는 걸 말한다. 그 위에 짚으로 고깔을 엮어 씌우면 지붕이 되어 눈비를 막아준다. 마당에 만드는 바자도 수숫대 바자가 보온 방습효과가 높다.

수수깡과 콩으로 한 해 일기를 점치는 풍습도 있었다. '달불이'라 하는데 음력 정월 14일 저녁에 만들어 우물에 넣는다. 콩 열두 개에 정월서 동지까지 달을 표시해서 쪼갠 수수깡에 차례로 끼운다. 그러고는 지푸라기로 묶어 우물 속에 넣어 뒀다가 이튿날 새벽에 건져 올린다. 콩이 불은 정도로 열두 달 일기를 점쳤다. 콩이 많이 불은 달은 비가 많고 콩이 좀 덜 불은 달은 비가 귀하다.

이처럼 우리 정서에 친근한 존재였다. 모두 어디로 갔을까. …… 이런 난세를 그냥 보고만 있을는지?(우리가 정말 알아야 할 우리 농작물 백가지(이철수 글, 현암사)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