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며, 생각하며                          자연의 시간, 인간의 시간
                                        
윤구병/철학자, 변산 공동체 학교 대표

이 세상에는 사람이 없습니다. 그저 겉으로 보기에 사람 모습을 띠고 있을 뿐입니다. 이렇게 묻는 분도 계실 겝니다. "사람이 아니라니? 그러면 우리가 짐승이란 말이냐?" 아닙니다. 짐승이기라도 하다면 그나마 안도의 가슴을 쓸어내릴 수 있을 겁니다. 적어도 짐승은 자연 속에서, 생명의 시간 속에서 살아갑니다.

현재 인류의 대부분은 철없이 살고 있고, 철없는 세상을 지향하고 있습니다. 이른바 '문명화'한 도시에서 생명의 시간, 다시말해 '철'은 어디서도 찾아보기 힘듭니다. 도시에서 봄, 여름, 가을, 겨울은 의미를 잃어버리고 말았습니다. 24절기는 더 말할나위도 없고요. 따라서 도시에서는 오래 살면 살수록 철이 들고 나는 게 아니라 점점 더 철이 없어집니다. 도시에서 살아남는 힘은 빠른 두뇌회전, 생명의 시간을 눈에 보이는 공간형태로 바꾸어내는 능력에 달려 있습니다.

도시에서는 실제 시간은 사라지고 인위적으로 단축되거나 연장된 공간화된 시간, 생명의 시간을 대신 기계의 시간이 그 자리를 차지합니다. 시계가 측정하는 시간은 진짜 시간이 아닙니다. 그 시간은 생명의 시간과는 아무런 연관이 없는 공간화된 시간, 도시인들의 편의를 위해서 조작된 인공의 시간에 지나지 않습니다. 일례로 우리시대 문명인들의 눈에는 물질대상으로밖에 보이지 않는 해와 달이 뜨고 지는 시간도 날마다 같지 않습니다. 하물며 생명계를 구성하고 있는 갖가지 생명체의 시간이야 더 말할 나위가 있겠습니까? 그 시간은 종에 따라, 개체에 따라, 또 지역과 기후에 따라, 성장단계에 따라 천차만별입니다.

어떤 생명체도 생명의 시간 속에서가 아니라면 살 길이 없습니다. 그런데 바벨탑을 쌓던 시대에서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멸망의 연대기를 끊임없이 써오면서도 인류는 철없이도 살 수 있다는 철부지 꿈을 기회만 있으면 현실화하려는 가당찮은 유혹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 세상에 철들지 않은 생명체가 살아남을 길은 없습니다. 왜냐하면 철은 생명체의 몸에 각인되어 생명체를 살아남게 하는 자연의 시간이기 때문입니다. 대부분의 생명체는 따로 철드는 과정이 필요없습니다. 자연의 시간은 많은 생명체의 생체구조 안에 유전정보, 또는 본능의 형태로 각인되어 몸에서 몸으로 물려주고 물려받게 됩니다. 그러나 사람은 이 유전정보로나 본능의 힘으로만 살아남을 수가 없습니다. 사람은 한철 한철 접어들면서 철이 들고, 한해 두해 철을 나면서 철이 납니다. 따라서 지혜의 함수는, 축적과 내면화를 거친 자연의 시간, 곧 철입니다.

그런데 철없으면 살아남을 수 없는 생명체인 사람이 철들지 않고도, 철나지 않고도 살아남을 수 있다는 오만으로 철없는 세상인 도시를 형성하고, 자연의 시간 밖에서 따로 인간의 시간을 만들어내어 이것을 문명이라고 부릅니다. 많은 사람들이 혼동을 하고 있는 것이 하나 있습니다. 인류 역사에서 대부분의 사람들이 인간의 시간 가운데 크게 두 개의 흐름이 있음을 인식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 하나는 삶의 길로 우리를 이끌고 다른 하나는 죽음의 길로 이끄는 갈림길인데도요. 그 하나는 문화의 시간이고, 다른 하나는 문명의 시간입니다. 인간의 시간 가운데 자연의 시간이 있는 것이 문화의 시간이고 자연의 시간 밖에 있는 것이 문명의 시간입니다.

인간이 자연의 시간과는 다른 시간을 만들어냈다는 것을 문제로 삼을 수는 없습니다. 사람은 자연의 시간만이 지배하는 에덴동산에서 쫓겨나는 순간부터 살아남기 위해 일을 해야 했습니다. 또 철없던 유년시절에서 낙원에서 누렸던 행복에 대한 그리움이 철없는 세상, 지상의 낙원을 사람 손으로 지어보자는 열망을 낳고, 그 열망이 인류역사에서 끊임없이 바벨탑을 쌓게 하는 원동력을 작용했는지 모릅니다.

생명의 시간에서 일탈하는 순간, 인간의 순간은 끝나고 맙니다. 저는 도처에서 멸망과 죽음의 그림자를 봅니다. 오늘날 인류문명은 도시라는 '철없는' 세상, 현대판 인공의 에덴동산을 빚어내는 데 여념이 없습니다. 그 결과 사람 모습을 띠고 있으나 사람 아닌 사람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가고 있습니다.

미래에 희망이 있느냐고 묻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예, 있습니다. 아니, 있겠지요. 이 지구상 어느 곳엔가 아직도 물레를 돌리는 사람이, 베틀에 올라 베를 짜거나 한겨울에 허벅지에서 피가 나도록 모시나 삼 실을 부벼잇는 사람이, 사랑방에서 한겨울에 새끼꼬는 사람이 있는 한, 산에 다니면서 약초캐는 사람, 가까운 바다에 띠배를 띄우고 철따라 고기를 잡되, 어린 고기와 알밴 고기는 그물에 들지않게 애쓰는 '뱃놈'이 있는 한, 아직 희망이 있겠지요. 그리고 그들 밑에서 산살림, 들살림, 갯살림을 익히려는 의지가 있는 젊은이들이 뒤를 잇는 한, 미래도 있겠지요.

그러나 자연의 시간과 인간의 시간이 조화 속에서 상생의 관계를 수렴하는 매개고리를 이루던 기초생산 공동체의 마을 어른들은 머지않아 세상을 뜨실 겁니다. 그리고 그분들과 더불어 수천, 수만년에 걸쳐 조금씩 조금씩 눈에 띄지 않게 연장되어오던 인간의 시간도 그분들이 몸으로 익혔던 온갖 살아숨쉬는 문화유산들과 함께 땅에 묻힐 것입니다. 어쩌다 운좋게 그 어른들 밑에서 그 오래된 생활양식을 몸에 익히면서 철이 들어가는 사람도 있겠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에덴동산에서 쫓겨난 아담과 이브, 아벨과 카인이 겪었던 그 고통의 세월을 다시 겪을 수밖에 없을 겁니다. 그만한 힘이 새로운 인류에게 내재되어 있을까요?(녹색평론 2000.3-4호에 실렸던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