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녹화의 필요성 장도곤 (나심교회 담임목사, 숭실대기독교학대학원 겸임교수) 한국의 교회가 변하고 있다. 1990년대 이후 개신교의 침체가 현실화되자 자성의 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교회건축과 지교회 성장에만 관심을 갖던 한국의 교회 속에서 사회봉사에 눈을 돌리는 교회들이 늘어나고 있는 것은 좋은 현상이다. 극심한 공해와 오염에도 불구하고 각 지방행정기관이 앞서서 산림과 자연을 파괴하며 지방경제의 성장에만 급급한 한국의 상황을 볼 때, 기독교환경운동연대의 교회녹화운동은 시대의 요구에 부응하는 매우 중요한 일이라고 본다. 이에 즈음하여 교회녹화의 필요성을 환경적, 성서적, 그리고 선교적인 입장에서 정리하여 제시하는 것은 교회녹화운동에 더 많은 교회를 참여토록 인도하는 중요한 의미가 있다고 본다. 1. 환경적 근거 한국의 경제가 다시 회복되고 있다고 한다. 2001년 8월 IMF를 졸업했고, 현재 GDP는 다시 만 불을 향해 육박하고 있다. 그러나 한국의 생활환경, 특히 자연환경은 나아지고 있는 것 같지 않다. 세계경제포럼(WEF)이 발표한 '환경지속지수'에 근거한 환경평가에 의하면, 세계 122개국가 중 한국의 환경등수는 95위라고 한다. 한국의 경제는 세계에서 15위 안에 들어가지만, 환경에 의한 등수는 95위이다. 1인당 국민소득이 우리와 비슷한 포르투칼의 환경등수는 20위, 체코는 29위이다. 이러한 수치는 "한국의 경제는 국토를 파괴하며 얻는 졸속 경제!"임을 증명해준다. 환경파괴를 기초로 이룩된 경제는 언제 무너질지 모른다. 그런데도 정부는 현재 그린벨트를 풀고 있다. 서울의 산을 올라가 보라! 사방 팔방을 둘러다 보아도 전부 콘크리이트, 콘크리이트뿐이다. 아파트, 아파트, 빌딩, 빌딩의 연속이다. 콘크리이트의 회색과 함께, 하늘도 공해로 인해 짙은 회색을 띠고 있다. 우리는 회색의 도시에 살고 있다. 아무도 내 땅을 양보하지 않기 때문이다. 내 땅이 100평이면 100평 가득 건물을 짓기를 원한다. 내 땅이 1000평이면 1000평을 전부 건물로 채우기를 원한다. 최대의 이익을 창출하려는 사람들의 욕심은 건폐율 100%의 건물을 짓기를 원한다. 해당지역마다 건폐율과 용적율을 규정하는 법규가 있건만 이 법규가 잘 지켜지고 있는지 의문이다. 교회도 이러한 세상의 추세에 합류하여 건물을 짓고 있다. 콘크리이트로 가득 찬 세상 안에 교회도 또 하나의 콘크리이트를 채워 넣고 있다. 성전을 건축할 때 가장 큰 관심사는 주어진 땅 안에서 최대의 교인을 수용하는 건물을 짓는 것이다. 때문에 도시에 있는 대부분의 교회에는 마당이 없다. 정원이 없다. 나무가 없다. 주차장도 별로 없다. 내 땅에 주차장을 만드는 것이 아까워 주변의 도로에 주차하자는 계산이다. 우선 교인부터 채워 넣고, 주차문제는 나중에 생각하자는 발상이다. 때문에 주일이면 교회주변에 주차전쟁이 일어나고, 교회와 주변의 주민들과 주차문제로 분쟁이 일어나고 있다. 건강한 몸에 건강한 정신이 깃든다고 했다. 공해는 사람들에게 육체적 질병과 함께 정신적 질병을 일으키기도 한다. 공해로 인해 두통과 호흡기 질환으로 시달리는 사람은 정신적 여유가 없어지게 된다. 게다가 도시사람들은 자동차가스, 공장매연, 교통난, 주차전쟁, 넘치는 인구로 인해 공해와 스트레스로 시달리게 된다. 그러므로 도시에서 사람들의 인심은 각박해진다. 만성적인 공해와 높은 인구밀도는 사람들에게 육체적인 질병은 물론 정신적, 심리적인 악영향을 미치고 있다. 또한 공해와 오염은 다른 피조물의 생존을 위협하고 있다. 현재 서울 등의 대도시에는 공해와 오염에 약한 많은 종류의 미생물, 곤충, 나비, 새 등이 자취를 감추었다. 대도시의 나무는 공해물질에 오염되어있어 이들의 먹이가 되지 못하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도시의 나무들도 죽어가고 있다. 가로수가 병들어 죽어가는 것은 물론이고, 도시에 있는 산의 나무도 죽어가고 있다. 남산에 있는 8m이상의 교목의 70%가 뿌리가 썩어 죽어가고 있다고 한다. 대기와 땅의 오염 때문이다. 이는 오염이 적은 오대산의 죽어가는 나무의 비율이 7%인 것과 비교해 볼 때 10배에 달하는 엄청난 양이다. 도시에 다른 피조물이 못산다는 것은, 도시의 시민들도 이미 이런 나쁜 환경의 영향을 받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한국의 대도시에 사는 사람들은 이미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병들어 가고있는 것이다. 서울의 취학 전 아동들, 그리고 초등학교 저학년 생 중에 감기를 달고 사는 아이들이 많은 이유의 하나는 공해의 영향으로 볼 수 있다. 공해로 인하여 기관지와 호흡기가 약한 아동들이 고통을 겪고 있는 것이다. 또한 대기오염이 저체중신생아의 원인이라는 연구의 발표가 있었다. 오염된 대기가 태아의 성장을 저해한다는 것이다. 자동차에서 나오는 일산화탄소가 이의 치명적인 요인이라고 한다. 산모의 피속의 헤모그로빈에 산소가 붙어야 아기에게 좋은 성장환경을 제공할 수 있는데, 대기중의 오염물질은 헤모그로빈에 부착하는 힘이 산소보다 몇 배 강하다고 한다. 그러므로 오염된 환경에서는 산모의 피에 산소공급이 잘 안되어, 태아의 성장이 저해되고 있다는 것이다. 한국의 공해와 오염의 문제에 대한 해결책이 시급한 때이다. 우리는 공해와 오염을 줄이는 여러 가지 법적인 조치를 강화하고, 기술적 방법을 강구해야 할 것이다. 특히 대기오염을 개선하기 위해서는 도시녹화에 힘을 기울어야 할 것이다. 나무는 대기를 정화하는 가장 강력한 수단이다. 콘크리이트로 가득 찬 도시에 나무를 심는 것은 도시의 허파의 기능을 강화하는 것이다. 나무는 하나님이 이 지구에 주신 보물이다. 이 지구상에서 가장 능력있는 생산자이다. 많은 피조물의 생명유지에 필요한 먹이와 산소의 생산자이다. 나무는 대기의 불순물인 유해가스를 흡입하여 동물의 생명유지에 필요한 산소와 엽록소를 생성해준다. 나무를 심으면 우선 인간들이 더 좋은 환경에서 살 수 있게되며, 동시에 도시를 떠났던 나비, 곤충, 새 등의 다른 피조물이 다시 도시로 돌아오게 될 것이다. 나무는 이들에게 먹이를 제공하고, 또 쉼터와 집을 제공해준다. 뿐만 아니라, 나무들 자체도 더 나은 환경에서 건강하게 살게 될 것이다. 도시에 한 줄로 심은 가로수는 자신의 한계능력을 초과한 공해와 오염을 감당하지 못하고 죽어가고 있지만, 더 많은 나무를 군락으로 심은 공간이 도시에 늘어나면 나무들도 지금보다 나은 환경에서 더 건강하게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이와 같이 나무는 인간의 육체와 정신의 건강뿐만 아니라, 다른 피조물에게 삶의 터전, 생존의 터전이 되는 것이다. 하나님의 섭리는 모든 인간과 다른 피조물이 함께 사는 것이다. 때문에 우리는 나무를 심어야 한다. 2. 성서적 근거 교회를 다니지 않는 사람들도 환경운동을 하고있다. 이들이 환경운동을 하는 것은 파괴된 환경을 복구하여 자연을 회복하고, 동시에 우리 인간도 다같이 잘 살자는 것이다. 기독교인의 환경운동도 기본적으로 이러한 목표를 수용하나, 우리에게는 이외에도 신앙적인 목표가 있다. 기독교인이 환경운동을 하는 것은 현시대를 향한 하나님의 뜻을 수행하려는 것이다. 하나님은 우주 만물의 창조자이며 주인이다. 인간은 하나님의 청지기로서 하나님의 창조를 보호하고 관리할 책임과 권리가 있다. 환경과 관련된 가장 큰 문제 중의 하나는 인구는 기하급수적으로 늘어가고 있는 반면, 다른 생물들은 점점 더 멸종되고 있다는 것이다. 지난 100년간 지구상의 인구는 3배 이상으로 증가하는 반면, 다른 피조물은 반 이하로 줄어들고 있다. 즉 20세기초 세계의 인구는 20억이 안되던 것이 1999년 60억이 되었다. 19세기초에 약 2억종 정도 존재하던 다른 피조물은 현재 반 이상이 멸종되었다. 인간의 조치가 없으면 21세기에는 더 많은 생물이 멸종이 될 것이다. 이는 인간이 하나님의 뜻을 간과하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은 인간에게 생육하고 번성하라고 명하시기 전에 먼저 다른 피조물에게 먼저 생육하고 번성하도록 명령하셨다(창 1:22, 8:17). 하나님은 다른 피조물의 생육번성을 먼저 명하시고, 그 후에 인간에게 생육하고 번성하는 축복을 주셨다(창 1:28, 9:1).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하기 전에 빛, 궁창, 바다, 땅, 식물, 해, 달, 별, 새와 물고기, 그리고 동물을 먼저 창조하신 것은 이러한 하나님의 창조가 없이 인간이 생존해 나갈 수 없기 때문이다. 생태계 안에서 소비자의 정점에 있는 인간은 다른 피조물의 도움 없이 스스로 생존할 수가 없다. 하나님의 창조 안에서만 인간이 생존할 수 있다. 소비자인 인간 살려면 생산자인 다른 피조물, 즉 나무를 비롯한 다른 식물이 있어야한다. 또한 생산자에게 원료를 제공하는 분해자인 미생물이 인간과 함께 살아줘야 한다. 이는 인간은 영원토록 자연과 함께 살아야 함을 의미한다. 인간은 자연을 떠나서는 살 수 없다. 이것이 하나님의 섭리이다. 그런데 인간은 자신들의 생육번성권은 최대로 누리고있는 반면, 다른 생물의 생육번성권은 무시하고 파괴하고 있다. 다른 생물이 멸종되는 가운데 끝없는 인구증가와 무분별한 개발은 하나님의 뜻을 무시하는 것이며, 그 하나님의 섭리를 벗어난 결과는 고통과 공멸뿐이다. 다른 피조물의 생육번식권을 청지기인 인간이 준수하고 보장할 때, 인간과 자연은 하나님의 뜻대로 풍성한 삶을 함께 누릴 수 있게 된다. 창조보전은 기독교인의 이웃사랑의 표현이다. 내가 창조를 보전하면 나는 물론이고, 내 이웃과 내 이웃국가, 나아가서 전세계가 더 나은 삶을 누리게 된다. 내가 환경을 파괴하고 오염시키면, 내 이웃이 해를 입고, 이웃국가가 해를 입게된다. 환경파괴와 오염의 시대에 사는 우리는 이웃의 개념을 확대해야한다. 다른 피조물을 우리의 이웃으로 수용해야한다. 인간의 공간적 이웃인 다른 피조물을 보호하고 사랑할 때 인간은 더 나은 삶을 누리게 된다. 또한 우리의 후손은 우리의 시간적 이웃이라는 것을 깨달아야한다. 현시대를 사는 우리가 단 하나뿐인 지구를 마구 개발할 때 우리의 시간적 이웃인 우리의 후손들은 살 터전을 잃게 된다. 그러므로 현시대를 사는 기독교인에게 창조보전은 중요한 이웃사랑의 한 표현이며, 기독교인의 기본적인 윤리이다. 성경은 물질에 대한 끝없는 욕심은 우상숭배임을 아르켜준다. "더 편안하게, 더 많이"를 추구하는 인간의 욕심, 그리고 과소비는 창조파괴의 근본원인이다. 예수는 겸손과 청빈의 삶을 살며, 제자들에게 그러한 삶을 살도록 가르쳤다. 또한 성경은 많은 곳에서 절제와 자족의 삶을 가르친다. 이러한 하나님의 창조의 섭리와 예수의 삶과 가르침, 그리고 성경의 많은 가르침은 창조보전의 기본적인 근거가 된다. 기독교환경운동연대에서 교회녹화사업을 실시하는 것은 그린벨트의 해제와 함께 각 지방단체가 경쟁적으로 자연과 삼림을 파괴하며 경제개발을 도모하고 있는 현재 한국에 매우 필요한 일이다. 세상의 회사, 단체들은 이익을 최대로 추구하는 목적을 가진다. 그러므로 남의 이익보다는 나의 이익을 먼저 생각한다. 그러므로 땅값이 비싼 도심지 안의 내 땅을 양보하여 그곳을 녹화공간으로 만든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내가 손해를 보는 일이기 때문이다. 교회는 "모든 일에 모든 사람을 기쁘게 하여 나의 유익을 구치 아니하고 많은 사람의 유익을 구할 것"을 명령받았다(고전 10:33). 교회가 내 땅을 할애하며 나무를 심으려면 양보하는 마음이 있어야한다. 세상은 양보하려 하지 않는다. 교회가 모범을 보이자. 교회가 먼저 담장을 헐고, 건폐율을 낮추고 그 공간에 나무를 심어야 한다. 한국의 도시에 가장 부족한 녹지를 교회가 솔선하여 제공하면 그것이 이웃사랑이다. 교회가 욕심을 줄이고 비싼 내 땅을 양보하여 나무를 심고, 정원을 만드는 것은 교회가 이웃사랑을 실천하는 것이다. 특히 각박한 도시에서 교회에 나무를 심고 녹지공간을 만드는 것은 비싼 땅을 사회에 헌납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거기다 의자놓고, 테이블놓고, 이웃이 쉴 장소를 제공하면 금상첨화이다. 이웃사랑을 먼데서 찾지 말자. 비싼 땅을 할애하여 교회에 나무를 심는 것은 21세기의 한국의 교회가 실천해야 될 이웃사랑의 하나이다. 이웃사랑은 하나님의 가장 큰 계명이다. 3. 선교적 근거 1990년대 이후 개신교의 성장이 정체되고, 청년들이 교회를 떠나고 있다는 진단이 있다. 이런 정체의 대표적인 이유로는 교회에 대한 불신과 신뢰감 결여, 교회 이기주의 및 교회의 사회봉사와 사회참여의 부족 등을 들고 있다. 라이츠 앤더슨(Leith Anderson)은 연령별로 미국의 사회구조를 분석하여, 21세기의 주역이 될 젊은 세대는 현재의 기성세대보다 사회적 이슈에 대한 해결책을 종교에서 찾으려는 경향이 강하다는 결론을 내린다. 따라서 21세기의 교회는 주요한 사회적 이슈에 대한 신학적, 신앙적인 해결책을 제시해야 젊은 세대들을 교회로 끌어들일 수 있다는 예측을 한다. 이런 맥락에서 보면 교회의 창조보전운동은 사회참여를 갈구하는 젊은이들을 교회로 끌어들이는 역할을 할 것으로 전망된다. 사실은 교회녹화의 자체가 이미 선교이다. 교회가 담장을 허물고 그 공간에 나무를 심고, 교회의 뜰을 제공하는 것은 이미 세상 사람들에게 교회를 개방하는 것이다. 세상 사람들을 교회로 끌어들이는 것이다. 교회가 법으로 정해진 건폐율이하로 건물을 짓고, 나의 땅의 일부를 할애하여 정원으로 만드는 것은 교회의 땅을 나누며 지역사회에 봉사하는 것이다. 콘크리이트 담장을 허물고 나무를 심으면 보기에도 시원한 푸른색의 녹음을 제공하게 된다. 교회의 땅에 나무 숲을 만들고 이웃에게 개방하면, 이웃에게 그늘, 쉼터를 제공할 뿐만 아니라, 좋은 공기와 나비, 새 등을 제공하게 된다. 교회가 담을 허물고 나무를 심는 것은, 현재 한국의 교회와 사회사이의 불신으로 막혀있는 담을 허는 좋은 기회를 제공하게 될 것이다. 현재 한국의 도시의 삶은 아파트의 철문으로 나를 철폐하고 이웃과의 대화를 단절하고 있다. 나의 사생활을 보호하고, 나의 것을 잃지 않기 위해서 더욱 더 담을 높이 쌓는 것이 세상의 현실이다. 이럴 때 교회가 담을 허물고, 교회의 땅에 정원을 만들고, 나무를 심으며 이웃에게 그늘과 쉼터를 제공하는 것은 대화의 장을 여는 것이다. 이웃을 향해 화해의 미소와 손짓을 하는 것이다. 교회가 더 많은 성도의 수용만을 생각하며 무작정 크게 건물을 지으며 주변의 주민과 주차문제로 시비와 분쟁을 일으킬 때, 교회가 이웃의 원망과 지탄의 대상이 된다. 이것은 교회가 이웃과 담을 쌓는 것이다. 세계의 모든 민족을 형제자매로 생각하며 선교하는 한국교회는 내 동포, 나의 이웃과도 좋은 관계를 형성해야겠다. 교회의 담을 허물고 이웃을 위하여 내 땅을 제공하는 것은 실지로 내 이웃을 형제자매로 사랑함을 실천하는 것이다. 이럴 때 교회는 이웃과의 자연스런 대화와 화해를 통하여 더 많은 영혼을 구원하는 선교의 사명을 이루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교회는 녹화운동에 앞장서야 한다. 내가 변하면 세계가 변한다는 진리를 믿자! 내가 나무 한 그루 심으면 한국이 변한다. 백 마디의 말보다는 한 그루의 나무를 심는 조그만 실천이 더 효과가 있다. 교회가 모범을 보이자! 교회가 담장을 헐고, 건폐율을 낮추고 그 공간에 나무를 심을 때 교회는 21세기를 사는 이웃의 필요한 것을 채워주며 이웃사랑을 실천하게 된다. 이것이 발전하여 교회와 사회단체의 전국적인 나무심기운동으로 발전하면 더 적극적인 환경보전, 적극적인 창조보전이 이루어 질 것이다. 이와 같이 교회가 나무를 심는 의미는 매우 크다고 본다. 이는 하나님의 창조보전의 명령을 수행해 나가는 것이며, 동시에 현 시대의 사회적 요구에 부응하여 이웃사랑을 실천하는 것이다. 또한 이러한 교회의 봉사는 교회가 효과적으로 선교의 사명을 수행토록 인도해 줄 것이다. 교회여 나무를 심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