녹색신앙 이야기

한국교회와 기독교의 기후위기 대응에 관한 정책제안

작성일
2020-09-01 15: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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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교회와 기독교의 기후위기 대응에 관한 정책제안

이진형 목사 (기독교환경운동연대 사무총장)


에큐메니칼 운동의 핵심 가치 : JPIC
1983년 밴쿠버 WCC 총회, 그리고 1990년 JPIC 서울대회 이후 오늘에 이르기까지 거의 반세기 동안 에큐메니컬 운동의 핵심 가치는 여전히 ‘JPIC : Justice, Peace Integrity of Creation, 정의 평화, 창조질서의 보전’ 이라고 이야기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지난 2013년 부산 WCC 총회에서는 “생명의 하나님, 우리를 정의와 평화로 이끌어 주소서”(God of Life, Lead Us to Justice and Peace)라는 주제를 통해 ‘창조질서의 보전’(Integrity of creation)이라는 단어가 ‘생명’(Life)으로 바뀌었지만 운동의 방향과 의미에서 두 단어가 큰 차이가 없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창조질서의 보전’(Integrity of Creation)과 ‘생명’(Life) 모두 ‘존재의 거대한 사귐과 나눔 속에서 모든 피조물들이 맺고 있는 상호연관 혹은 상호의존의 관계’를 의미하는 ‘창조세계의 온전성’(Integrity of Creation)을 내포하는 개념이기 때문입니다.
신학자도 아닌 제가 NCCK 정책협의회의 생태 부문발표의 첫머리에서 JPIC의 개념을 다시 이야기하는 이유는 최근 ‘창조질서의 보전’(Integrity of creation)이라는 단어가 그 본래의 ‘창조세계의 상호의존성’이라는 의미와는 전혀 무관하게 차별과 혐오를 정당화하고 조장하는 단어로 오용되거나 남용되고 있는 안타까운 현실 때문입니다. 왜 그 당시에 ‘Integrity of Creation’을 ‘창조세계의 온전성’이라고 직역을 하지 않고 ‘창조질서의 보전’이라고 의역을 해서 지금 여러 사람들을 뜻도 제대로 모르고 단어를 사용하는 사람으로 만들고 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이제부터라도 에큐메니컬 운동과 신학에서는 무분별하게 오남용되고 있는 ‘창조질서의 보전’ 대신 더욱 의미가 분명한 ‘창조세계의 온전성’이라는 단어를 사용하면 좋겠습니다. 에큐메니컬 운동의 실천 과제이자 에큐메니컬 비전의 핵심인 ‘JPIC’는 ‘정의 평화, 창조세계의 온전성’입니다.
이야기가 나온 김에 한 가지만 더 덧붙이자면, 인간중심성을 내포하고 있는 ‘환경운동’이란 단어도 앞으로는 종(種)간의 차별을 포함한 모든 차별을 극복하려는 세계적인 추세에 맞추어 ‘생태정의(Eco-justice)운동’이란 단어로 바꾸어 사용하면 좋을 것 같습니다.

코로나19 바이러스의 확산 : 생태정의의 관점
UN식량농업기구(FAO)는 사람들이 경험하지 못한 새로운 바이러스의 출현의 원인이 인간 거주지의 팽창, 야생동물의 서식지 침범, 야생동물의 포획과 이동, 개발로 인한 생태계 교란, 산림 파괴, 농업생산 증대를 위한 화학약품 사용, 가축과 야생동물의 동시 사육, 가축에 대한 광범위한 항생제 사용에 따른 바이러스의 저항성 증가, 그리고 지구적인 기후변화에 있다고 밝히고 있습니다. 지금 우리나라와 전 세계에서 수많은 감염자를 양산하고 있는 코로나19 바이러스가 확산된 직접적인 원인은 인간의 무분별한 개발로 인해 야생생물의 서식지가 감소하여 인간과 야생생물과의 접촉이 확대되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생태정의의 관점에서 인간은 바이러스가 오랜 시간 공생의 관계를 구축한 숙주생물의 생명을 위협하는 위험한 존재이자, 오랜 시간 조심스럽게 상호공존의 관계를 구축하기 전에 갑작스레 바이러스를 찾아와 싸움을 걸고 심지어 아주 멸종을 시키려드는 아주 두려운 존재인 것입니다. 때문에 지금 코로나19 바이러스의 감염으로 고통을 받고 있는 사람들과 함께 코로나19 바이러스도 사람들에게 집단적인 면역체계가 만들어지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을 것입니다. 바이러스 역시 하나님의 창조세계의 한 일원으로 다른 피조물과 상호의존의 관계를 맺고 살아가는 피조물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풍성한 생명의 지구는 약 160만 종의 바이러스들의 왕성한 활동에 기인한 것이며, 지금 우리의 몸에만 해도 약 1만 종, 100조 개 가량의 바이러스와 박테리아가 함께 살아가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처럼 새롭게(Newly) 만난 바이러스와 생명을 건 싸움을 벌이기도 하지만 대부분의 시간은 유익한(Friendly) 바이러스와 함께 협력하며 생명을 풍성케 하는 하나님의 뜻을 이루고 있습니다.
지금 코로나19 바이러스의 확산은 근본적으로 우리 인간의 생태적 불의가 만들어낸 일입니다. 인간의 생태적 불의는 그동안 인간이 자연을, 다른 생명체들을 대해온 방식에서도 그대로 드러납니다. 생물다양성과학기구(IPBES)는 머지않아 지구에서 살아가는 800만 종의 동식물 가운데 100만 종이 멸종 위기에 처할 것이라는 보고서를 발표하기도 했습니다. 생태정의의 관점에서 코로나19 바이러스의 위기를 통해 우리는 어떻게 해야 바이러스를 정복하고 하나도 남김없이 없애버릴 것인가를 생각할 것이 아니라, 과연 우리가 어떻게 바이러스와 생태정의를 이루며 평화롭게 공존할 수 있을 것인가를 숙고해보아야 합니다. 이제 앞으로 코로나19 바이러스보다 더욱 심각한 질병의 위기가 빈번하게 발생할 것입니다. 기후변화는 전 세계의 곤충매개 전염병을 광범위하게 확산시킬 것이기 때문입니다.

당면한 생태정의의 중요하고도 시급한 과제 : 기후위기
기후변화의 원인은 이 자리에서는 더 이야기를 하지 않아도 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분명한 것은 올해 우리나라에 큰 피해를 남긴 집중호우에서 보았듯이 기후변화로 인한 위기상황은 이미 우리의 현실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나라뿐만이 아니라 지금 전 세계는 국지적인 가뭄과 홍수, 농업생산성의 감소, 해수면 상승으로 인한 해안 저지대의 침수, 대규모의 화재, 기후난민과 기후분쟁 발생, 생물 멸종의 위기를 경험하고 있습니다. 문제는 이러한 기후변화의 속도가 예상을 넘어 너무 빠르고, 그 피해도 상상을 초월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기후변화를 위기상황으로 인식하는 가장 큰 이유는 기후변화가 세계 경제체제를 위기로 몰아넣고 있기 때문입니다. 지금 세계 경제체제는 인간의 무한한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해, 이윤을 극대화하기 위해 지구 생태계를 자원으로 사용하도록 설계된 시스템입니다. 하지만 기후변화로 인해 지구 생태계가 인간의 무한한 욕망을 추구하기에는 한계가 있다는 것이 여실히 증명되었습니다. 하지만 아직도 세계 경제체제는 이전과 다름없이 이윤을 추구하는 시스템을 가동하기 위해 화석연료에 막대한 보조금을 퍼부으며 기후변화를 가속하고 있습니다. 차에 탄 모두가 기후변화라는 빨간불이 켜졌다고 큰 소리를 치지만 아무도 브레이크를 밟으려 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올해 봄철 저온 현상과 60여 일간 계속된 장마를 통해 기후변화는 일시에 농업생산성을 떨어뜨릴 수 있다는 것을 경험하였습니다. 기상청에서는 기후변화로 인한 해수면의 온도 상승으로 한반도에 한 해 슈퍼태풍을 비롯해 20여 개의 태풍이 영향을 끼칠 수 있다고 예측을 하고 있습니다. 전문가들은 가장 먼저 기후변화로 식량생산이 감소하는 것에서 세계 경제체제의 위기가 닥칠 것이라고 예측을 합니다. 그리고 그러한 위기의 가장 큰 피해 국가는 식량자급률이 20%에 불과한 우리나라가 될 것입니다. 우리나라가 항상 4대강이 흐르고 큰 호수들이 여기저기에 있는 금수강산이면서도 ‘물 부족 국가’인 이유는 우리가 수입하는 80%의 식량, 즉 곡류와 육류를 생산하는 데 필요한 물의 양을 계산하면 지금 우리나라는 엄청난 양의 물을 수입해서 사용하는 상황이기 때문입니다. 수백만 명의 난민을 발생시킨 시리아 내전이 중동지역의 기후변화로 인한 농업생산 감소와 밀 수출국인 러시아의 밀수출 중단으로 시리아의 경제가 붕괴했기 때문에 발생한 사건이라는 것을 돌아볼 때, 식량자급률이 턱없이 부족한 우리나라는 기후변화로 인한 위기에 매우 큰 혼란을 겪게 될 것입니다.
또한 기후변화는 대량의 기후난민을 발생시키고 대규모의 기후분쟁을 지속시킬 것입니다. 세계의 대부분의 도시는 큰 강의 하구인 해안 저지대에 자리하고 있습니다. 기후변화에 관한 정부 간 협의체(IPCC)에서는 2050년 무렵에는 3억 명의 기후난민이 발생할 것이라고 예측을 하고 있고, 지속적인 기후변화로 지구의 평균기온이 3도 상승한다고 했을 때 극지방의 대부분의 빙하가 녹아 해수면의 상승이 50m에 이르게 될 것이라고 합니다. 만일 그런 일이 발생하면 수십억 명의 기후난민이 발생하여 오갈 데 없이 떠돌다 굶어죽게 될 것이고, 농경지와 산업 시설도 대부분 물에 잠겨버릴 것이며, 해안가에 건설된 핵발전소들은 줄줄이 후쿠시마 핵발전소와 같은 운명을 맞게 될 것입니다. 그동안 인류가 쌓아온 문명과 경제 시스템은 붕괴의 수순을 밟게 될 것입니다.

생태적 대전환
이러한 기후위기에 대응하기 위해 가장 시급한 것은 에너지전환 입니다. 온실가스인 이산화탄소를 배출하는 화석에너지와 수십만 년 동안 지속적으로 관리를 필요로 하는 핵쓰레기를 만들어내는 핵에너지의 사용을 중단하고 햇빛과 바람과 물을 이용하는 재생가능 에너지의 사용을 확대하는 것입니다. 독일의 경우는 2022년까지 모든 핵발전을 중단하고 2038년까지는 석탄발전마저 중단하는 에너지전환 계획을 수립하고 그 시기를 앞당기기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유럽(EU) 의회는 2050년까지 회원국들이 탄소배출 저감과 재생에너지의 확대로 탄소배출이 제로(0)가 되는 ‘넷 제로’(Net Zero)를 실현할 것을 결의하였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몇몇 나라의 노력과는 다르게 우리나라를 포함한 세계 대부분의 나라들은 넷 제로에 근접하지도 못한 온실가스 감축 계획을 세우고 있으며, 아예 미국처럼 기후변화협약을 탈퇴해버리는 몰지각한 행태를 보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오늘 당장 전 세계가 넷 제로를 실현한다고 해도 대기 중에 배출된 이산화탄소는 수백 년 동안 계속해서 기후변화의 요인으로 작용할 것입니다. 수백 년 동안은 기후변화에 적응하고 고통을 감수할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또한 에너지전환이 기후변화의 위기의 근본적인 해결책은 아닐 것입니다. 결국 기후변화가 인간중심주의와 성장주의를 기반으로 하는 근대 자본주의 세계 경제체제에서 비롯된 사건이라는 것을 생각할 때, 근본적인 대응책은 우리 사회가 생명중심의 지속가능사회로, 생명경제체제의 미래문명으로 나아가는 생태적 대전환이 필요합니다. 생태적 대전환의 핵심은 지구 생태계의 한계와 지속가능성을 고려한, 생태적으로 정의롭고 평화로운 생명경제를 모색하고 실현하는 것입니다. 최근 그린뉴딜과 같은 기존 경제체제 안에서의 부분적인 변화를 시도하는 정책들이 우리나라를 비롯한 여러 나라 정부에서 제시되고 있지만, 내용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여전이 성장주의와 인간중심주의를 벗어나지 못한 기존의 경제개발 정책을 녹색으로 포장한 정책일 뿐입니다. 이제는 톨게이트를 빠져나와 차를 반대편으로 돌려야 할 때지 차선을 바꾼다고 해결될 상황이 아닌데도 말입니다.

한국교회와 기독교의 기후위기 대응
과연 우리의 교회와 기독교는 기후위기 상황에 어떻게 대응을 하게 될까요? 지난 교회의 역사를 통해 위기상황에서 교회의 대처를 짐작해볼 수 있을 것입니다. 지금부터 260여 년 전인 1755년, 당시 유럽에서 네 번째로 큰 도시였던 포르투칼의 항구도시 리스본에서는 규모 8.5로 추정되는 아주 큰 지진이 발생했습니다. 이 지진으로 리스본의 대부분의 건물이 무너져 버렸는데, 엎친 데 덮친다고 지진에 이어진 쓰나미가 리스본의 무너진 건물들을 뒤덮어버립니다. 이 지진과 쓰나미로 5만여 명의 시민들이 목숨을 잃었고, 도시의 85%가 지진과 쓰나미, 그리고 엿새간 이어진 화재로 처참하게 파괴되고 맙니다. 그런데 이 지진이 발생한 날, 리스본에서 가장 큰 인명피해가 발생했던 곳은 다름 아닌 리스본 교회였고, 교회가 있던 광장 맞은편 유흥가에도 역시 똑같은 지진이 닥쳤지만 상대적으로 사람들의 피해가 적었다고 합니다. 아침 미사를 드리던 독실한 신자들은 떼죽음을 당하고, 유흥에 빠졌던 방탕한 사람들은 목숨을 건진 것입니다.
그동안 자연 재해는 하나님의 심판이라고 생각했던 유럽 사람들에게 리스본 대지진은, 특히 신자들의 죽음과 비신자들의 생존은 너무나 충격적인 사건이었습니다. 리스본 대지진 이후 가톨릭교회는 이 지진이 하나님의 심판이라고 이야기하며 리스본이 개신교를 받아들인 결과로 지진이 발생한 것이라고 이야기했고, 개신교교회는 이 지진을 우상을 숭배하는 가톨릭교회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라고 이야기하며 서로를 공격하기에 바빴습니다. 하지만 볼테르와 같은 철학자는 리스본 대지진을 통해 신이 선한 세계를 창조했고 자연재해를 신의 처벌로 보는 교회의 관점을 비판했고, 루소는 자연에는 특정한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며 자연재해는 인간의 자유의지의 결과일 뿐이라고 이야기 하며 리스본 대지진으로 혼돈에 빠진 유럽 사회에 이성적 사고를 확산시킵니다. 또한 과학자들은 지진에 대한 과학적 조사를 바탕으로 암반 위에 돌로 지어진 교회 건물이 모래흙 위에 나무로 얽기 설기 지은 유흥가 보다 지진의 진동에 취약하다는 사실을 설명하고, 지진에도 안전한 건축기술을 개발하고 보급하여 유럽 사회의 신뢰를 얻게 됩니다. 결국 리스본 대지진 이후 유럽 사람들은 종교적 신념보다는 이성적 사고를 신뢰하기 시작했고, 교회의 영향력은 쇠퇴하고 철학과 과학이 비약적으로 성장하게 됩니다.
기후위기의 시대에 교회는 손쉽게 이 재난은 하늘의 심판이니 회개해야 한다, 종말이 가까웠으니 더욱 열심히 신앙생활에 매진해야 한다는 이야기를 하게 될 것입니다. 나아가 난민, 이주민, 소수자, 약자, 타종교인이 이러한 재난을 불러온 사람으로 지목하고 이들에 대한 차별과 혐오의 목소리를 더욱 높이며 희생양을 삼을 지도 모릅니다. 실제 그러한 일이 1923년 일본 관동 대지진에서 발생했었습니다. 물론 그 때는 조선 사람과 중국 사람, 사회주의자가 희생양이 되어야 했었습니다. 그러한 일이 일어나지 않기 위해서라도 이제 깨어있는 교회와 기독교가 반드시 다가올 기후위기에 대비한 대책을 마련해야 합니다.
지금까지 1970년대부터 기후위기에 대한 경고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한국 교회와 기독교에는 기후위기에 대응하는 기구가 조직되지도 않았고, 기후위기에 대응하는 예산이 편성된 적도 없었으며, 기후위기의 시대를 해석하고 길잡이가 될 의미 있는 신학적 논의도 부족했습니다. 최근 각 교단과 단체에서 진행된 코로나19에 대한 교회의 대응 세미나에서도 대부분 코로나19가 생태위기, 기후위기의 일부라고 분석하면서도 아직 어느 교단도 기후위기에 대응하기 위한 비상기구를 조직했다거나 신학적 연구와 논의를 준비하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어보지 못했습니다. 이쯤 되면 못하는 게 아니라 안 하는 거라고, 하기 싫은 거라고 생각이 됩니다.
이에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에 부탁을 드립니다. 먼저 NCCK가 기존의 정의평화국의 생명문화위원회 차원이 아니라 기후위기국을 새롭게 신설해주시든, 특별위원회를 조직해주시든, 소속 교단이 공동으로 기후위기에 대응할 인력과 조직을 마련해주시기 바랍니다. 이 조직을 통해 사회선교 단체들과 기독교 비상행동을 조직해나가고, 신학자들과 함께 기후위기 신학포럼을 정기적으로 개최하며, 각 교단의 책임 있는 분들을 모아 기후위기 한국교회 생태적 전환 매뉴얼을 만드는 일을 시작해 주시기 바랍니다. 또한 전국의 그리스도인과 교회가 자발적인 탄소세를 헌금으로 모아 기후위기 탄소 기금을 조성해서 생태계 회복, 멸종위기생물 복원, 생명경제 연구, 생태적 전환 마을 만들기를 위한 예산으로 사용하는 생태정의 운동을 확산시켜주시기를 제안합니다.

성서의 창세기는 대홍수 사건과 바벨탑 이야기에 이어 아브라함의 아버지 데라로부터 시작되어 모세로 이어지는 야훼 신앙인들의 가나안 땅을 향한 열망과 여정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즉, 창세기는 야훼 하나님을 믿었던 이들이 기후난민들이었고, 이들의 신앙이 기후위기에서 출발하였다는 것을 우리에게 보여주려 하고 있습니다. 이들이 간절히 바랬던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은 지배와 수탈의 제국주의적인 삶이 아니라, 상호의존의 생태적인 삶으로부터 만들어지는, 창조세계의 온전함을 지키고 돌보는 삶을 따라 살아가는 믿음의 삶을 유지할 때 이루어지는 공간이었습니다. 창세기의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은 결국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희생의 삶이 희망을 살려내어 요한계시록의 ‘새 하늘 새 땅’의 계시를 통해 다시 우리의 믿음으로 이루어야 할 공간이 되었습니다. 기후위기는 우리가 다시 이 땅에 방주를 지어 지구 생태계의 뭇 생명을 구원으로 인도하는 40일 간의 비가 될 것입니다. 생명의 하나님께서는 결국 우리에게 언약의 무지개를 보여주시고자 이 위대한 과업에 함께할 의로운 사람들을 불러 모으고 계십니다.

(이 글은 8월 30일 NCCK 정책협의회 생태부문 발표 원고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