녹색신앙 이야기

우리가 가야 할 곳은

작성일
2020-06-09 1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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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가야 할 곳은

이진형 목사 (기독교환경운동연대 사무총장)


데라는, 아들 아브람과, 하란에게서 난 손자 롯과, 아들 아브람의 아내인 며느리 사래를 데리고, 가나안 땅으로 오려고 바빌로니아의 우르를 떠나서, 하란에 이르렀다. 그는 거기에다가 자리를 잡고 살았다. 데라는 이백오 년을 살다가 하란에서 죽었다. 주님께서 아브람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네가 살고 있는 땅과, 네가 난 곳과, 너의 아버지의 집을 떠나서, 내가 보여 주는 땅으로 가거라. 내가 너로 큰 민족이 되게 하고, 너에게 복을 주어서, 네가 크게 이름을 떨치게 하겠다. 너는 복의 근원이 될 것이다. 너를 축복하는 사람에게는 내가 복을 베풀고, 너를 저주하는 사람에게는 내가 저주를 내릴 것이다. 땅에 사는 모든 민족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받을 것이다." (창세기 11:31-12:4)

창세기 11장은 아브라함의 아버지 데라의 이야기를 간략하게 언급하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의 아버지 데라는 아브람과 나홀과 하란, 삼형제를 낳았습니다. 데라는 아브람과 그의 아내 사래, 그리고 일찍 세상을 떠난 하란의 아들 룻을 데리고 그가 살던 우르를 떠나 가나안 땅으로 가려고 했지만, 하란이라는 곳에서 머물다 죽음을 맞았다는 이야기 입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창세기 12장에서는 하나님께서 아브람에게 다시 하란을 떠나 가나안 땅으로 가라는 말씀을 전하시고, 그 말씀을 따르면 큰 민족의 아버지가 될 것이라고 아브람에게 약속을 하십니다.
그런데 왜 아브람의 아버지 데라는 익숙한 고향 땅인 우르를 떠나 낯선 가나안 땅으로 가려고 했을까요?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아브람에게 하란에 머물지 말고 가나안 땅으로 떠나라고 이야기 하셨을까요? 우리가 잘 아는 것처럼 가나안 땅은 훗날 아브라함의 자손들이 주를 이루는 이집트의 노예였던 히브리 사람들이 이집트를 탈출하여 광야를 떠돌며 찾아 나선 땅이기도 합니다. 왜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사람들을 가나안 땅에 살게 하시지 못해 안달이 나셨을까요? 우리가 그 이유를 알게 된다면 오늘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따라서 사는 삶이 무엇인가를 보다 잘 알게 되지 않을까요? 저는 오늘 여러분들과 우리가 가야 할 곳인, 가나안 땅의 의미에 대해 몇 가지 이야기들을 나누고자 합니다.

성서를 고고학적으로 분석하고 연구하는 학자들에 따르면 데라와 아브라함이 우르를 떠났던 시기를 대략 기원전 2,100년경이라고 추정을 합니다. 기원전 2,100년의 우르의 상황을 조금 더 잘 이해하기 위해서는 조금 더 역사를 거슬러 올라갈 필요가 있습니다. 지금으로부터 20,000년 전, 그러니까 기원 전 18,000년 무렵은 지질학적으로 홍적세라고 하는 지구의 빙하기가 절정에 이릅니다. 온 유라시아 대륙과 북아메리카 대륙이 얼음에 뒤덮여있었고, 동식물들은 추위를 이겨내는 것이 생존의 관건이었던 때입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 기원전 10,000년 무렵에는 지질학에서 홀로세라고 부르는 온난한 기후가 지구에 펼쳐지기 시작합니다. 비로써 지구는 온갖 생명들이 풍성한 땅으로 탈바꿈하게 되었습니다. 조금 더 시간이 지나 기원전 5,000년 무렵의 메소포타미아의 유프라테스강 유역은 따뜻한 온도와 비가 많이 내리는 기후 조건이 형성됩니다. 이로 인해 이 일대에 울창한 초원과 산림이 만들어지고, 풍요로운 자연 환경을 바탕으로 수메르 사람들은 우르라는 농경 공동체를 만들 수 있게 됩니다.
그런데 기원전 약 3,800년 무렵부터 메소포타미아 지역의 계절풍의 방향이 바뀌어 강수량이 줄어드는 위기가 발생하게 됩니다. 언제나 땅을 촉촉하게 적셔주던 비에 의존해서 농사를 짓던 우르 공동체에 위기가 닥치게 된 것이지요. 이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수메르 사람들은 비에 의존하지 않고 사시사철 물을 댈 수 있도록 강에 제방을 세우고, 운하를 파는 인류 최초의 관개시설을 개발해서 농업 생산성을 비약적으로 증가시킵니다. 그리고 그들은 한껏 오른 농업 생산성을 바탕으로 수송체계를 정비하고, 곡물을 분배하는 중앙 집중적인 경제 시스템을 바탕으로 우르를 인류 역사의 최초의 도시 문명으로 발전시키게 됩니다. 수레바퀴, 문자, 수학, 천문학, 그리고 그 유명한 길가메시 서사시와 같은 문학이 시작된 곳, 인류 문명의 발상지가 바로 아브라함과 데라가 살았던 도시 우르였던 것이다.
그리고 이 고대 도시 우르에 또다시 위기가 닥치게 됩니다. 이번에는 시간이 조금 더 지나 기원전 2,200년 경, 앞서 말씀드린 데라와 아브라함이 우르를 떠났던 시기입니다. 이 때에 메소포타미아 북쪽 지방에서는 거대한 화산이 폭발을 합니다. 이로 인해 엄청난 화산재가 대기에 뒤섞여 햇빛이 줄어들어 기온이 갑자기 떨어지는 일이 발생하게 됩니다. 게다가 엎친 데 덮친 격으로 300여 년 동안 이어진 지독한 가뭄이 시작되어 우르 북쪽의 넓은 평원이 말라붙고 수량이 줄어든 유프라테스 강 유역 토양에 영양분을 공급해주던 강의 범람이 사라지게 됩니다. 결국 우르의 도시 시스템을 지탱해주던 농업이 위기에 처하게 됩니다. 도시를 떠받치던 농업이 붕괴하자 어떤 일들이 일어났을까요? 먹고 살기가 어려워진 사람들은 그동안 저장해둔 곡식이 쌓여있는 도시로 몰려들었고 이로 인해 우르의 인구가 세 배나 늘어나게 됩니다. 하지만 계속해서 흉작이 계속되자 도시의 풍요도 점점 사라지게 됩니다. 사람들은 더 이상 희망이 없는 우르를 떠나기 시작했고, 결국 몇 세대를 지나지 않아 우르는 신기루처럼 사라져버립니다. 지금은 바그다드 남쪽 황량한 사막의 한 가운데 있는 폐허만이 우르라는 도시가 있었다는 것을 기억할 뿐입니다. 이 사건은 기후변화로 인해 도시와 문명의 붕괴가 일어난 인류가 경험한 최초의 위기였습니다.

데라와 아브라함이 우르에 살고 있었던 시기에는 기후변화로 인한 도시의 위기가 시작되었지만 아직 우르의 거대한 도시 문명이 굳건히 남아있는 시기였을 것입니다. 사람들은 거대한 도시 우르가 붕괴할 것이라고는 꿈에도 상상하지 못했을 것이고, 우르의 회복과 번영을 기다리면서 감히 우르를 떠나는 것을 생각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바로 이때, 하나님께서는 데라와 아브람을 인도하셔서 그들이 머물고 있던 우르를 떠나게 하시고 가나안 땅으로 가자고 하신 것입니다.
아직까지 우르는 화려하고 웅장하고 안전해 보였을 지라도 이제 풍요의 기반이 사라진 도시 우르에는 더 이상 생명의 희망이 없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데라와 아브라함을 우르에서 이끌어 내신 이유는, 우르라는 도시가 어쩔 수 없이 가지고 있는 한계를 바라보셨기 때문일 것입니다. 강자가 약자를 억누르고, 가진 자가 갖지 못한 자를 지배하고, 인간이 자연을 마음대로 파괴하는 폭력적인 도시 문명을 생명과 평화의 하나님께서는 용납할 수 없으셨을 것입니다.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기후위기 앞에서 껍데기만 남아 간신히 버티고 있는 도시 우르를 떠나, 거칠고 척박한, 때로는 험하고 위험해 보일지라도 생명의 희망이 있는 가나안 땅에서 새로운 삶을 시작하라고 데라와 아브라함을 부르신 것일 테지요. 데라와 아브라함은 마침내 우르를 떠나게 됩니다. 그리고 결국 아브라함은 하나님이 말씀하신 곳 가나안 땅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가나안 땅에서의 아브라함은 그리 행복하지 못했습니다. 이어지는 창세기의 이야기에서 아브라함은 가나안 땅에서 큰 기근을 만나 아내를 빼앗기면서까지 생존을 위한 처절한 몸부림을 쳐야만 했습니다. 천신만고 끝에 낳은 그의 자손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이삭과 야곱과 야곱의 아들들 역시 가나안 땅에서 가뭄으로 인한 기근에 시달리다 결국 이집트 땅으로 들어가 이집트 사람들의 노예가 되고 맙니다. 성서 속의 아브라함과 그의 자손들은 지금 현재의 기준으로는 전형적인 기후난민의 모습입니다. UN난민기구(UNHCR, UN Refugee Agency)에 의하면 홍수, 태풍, 산불, 가뭄, 토양황폐화, 해수면 상승 등 기후위기와 관련된 위험으로 집과 고향을 떠나는 ‘기후 난민’이 해마다 2,500만 명이 발생하고 있다고 합니다. 또한 기후위기는 사람들이 전통적으로 이용해온 물, 토양 등의 한정된 환경자원이 고갈되는 긴장을 고조시켜 세계 곳곳의 빈곤과 분쟁을 증가시키는 가장 큰 원인이기도 합니다. 유럽에서 대량의 전쟁난민을 발생시킨 시리아 내전의 배경에도 기후변화로 인한 시리아 농업의 붕괴가 주된 원인이었습니다. 기후변화에 관한 정부 간 협의체(IPCC)에서는 2050년 무렵에는 3억 명의 기후난민이 발생할 것이라고 예측을 하고 있습니다.
기후위기로 인한 피해는 그동안 상당량의 온실가스를 배출해온 선진산업국가가 아니라 저개발국가의 ‘기후 약자’들에게 집중되고 있습니다. 올해 환경주일의 주제가 ‘작은 생명 하나까지도, 기후위기 시대 생명다양성을 지키는 교회’ 인데, 지금 지구 생태계에서도 식물, 어류, 양서류, 파충류와 같은 기후환경 적응성이 약한 ‘생태적 약자’들이 우선적으로 멸종위기에 처하고 있습니다. 기후위기는 세계의 기후 불평등과 생태적 불평등을 고조시키고 있는 가장 큰 요인입니다. 저희 기독교환경운동연대가 지난 2010년부터 몽골 아르갈란트 지역에 은총의 숲이라는 이름의 작은 숲을 조성하는 사업을 진행하고 있습니다. 지금 몽골은 심각한 기후위기로 인해 숲의 나무들이 말라 죽고 지하수와 하천이 말라 초지가 사라지는 일들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몽골의 국토의 90% 가량에서 이러한 사막화가 진행되어 동물과 사람이 마실 물이 사라졌고, 양과 소, 말에게 먹일 풀이 사라져 몽골 유목민들은 유목을 포기하고 도시로 몰려들어 도시 빈민으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때문에 수용 가능 인구를 이미 초과한 수도 울란바토르는 심각한 교통 체증을 겪는 것은 물론, 겨울이 되면 호흡기 질환자와 관련 질병으로 인한 사망자가 급격히 증가합니다. 몽골의 도시 빈민들은 혹독한 겨울을 나기 위해 폐타이어를 비롯하여 수많은 독성물질을 포함한 물건들을 집안에서 태웁니다. 때문에 몽골은 호흡기질환 사망률이 가장 높은 나라이기도 합니다. 기독교환경운동연대의 몽골 은총의 숲은 이러한 기후변화로 인한 생태적 불평등의 상황 속에서 하나님의 정의를 세우고자 하는 작은 노력입니다. 지금 아르갈란트 은총의 숲에는 지금 25,000여 그루의 어린 나무가 자라고 있고, 점차 숲의 모습을 갖추고 있습니다. 저희의 바램은 이 숲이 기후위기로 기후난민이 되어버린 몽골의 유목민들에게 작은 희망이 되는 것입니다. 이 나무들의 열매로 소득을 얻고, 숲이 물을 머금어 다시 샘이 솟고, 이 샘의 물로 동물들을 먹이고 땅을 일구어 농사를 지어 마을을 회복하게 되는 것, 아브라함을 바라보며 가나안 땅에서 하나님께서 꿈꾸셨던 그 일을 은총의 숲을 통해 이루어보려고 합니다.

창세기에서 이어지는 출애굽기에서 하나님께서는 이집트에서 탈출한 히브리 사람들에게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인도하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아브라함의 자손 히브리 사람들은 40년간의 광야 생활과 처절한 가나안 정복 전쟁 끝에 가나안 사람들을 몰아내고 가나안 땅을 차지합니다. 하지만 그들이 차지한 땅 그 어디에도 실제 ‘젖과 꿀이 흐르는’ 곳은 없었습니다. 땅에 젖과 꿀이 흐르지 않는 이유는 그 땅의 비옥함이나 척박함의 문제가 아닙니다. 땅의 비옥함이야 해마다 강이 범람하여 유기물이 가득한 토양이 켜켜이 쌓인 그 옛날 우르의 땅과 이집트 땅을 건조한 가나안 땅을 갖다 댈 수 있었을까요?
때문에 아브라함의 가나안 땅과 히브리 사람들의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은 사람이 자연과 어떤 관계를 맺고 살아가는가에 대한 상징일 것입니다.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은 지배와 수탈의 제국주의적인 삶이 아니라, 상호의존의 생태적인 삶으로부터 만들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히브리 사람들에게 약속한 것은 가나안 사람들이 풍요롭게 살아가던 땅을 빼앗아 히브리 사람들에게 주겠다는 특권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히브리 사람들이 창조세계의 온전함을 지키고 돌보는 삶을 따라 살아가는 언약의 삶을 유지할 때, 가나안 땅은 결국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 될 것이라는 보편적인 약속이었습니다.
환경문제를 비롯한 현대사회의 거의 모든 문제는 사람들이 ‘약탈자’의 삶을 살기 때문에, 정의롭지 못하기 때문에 발생합니다. 우리가 지구 생태계에서 지속가능하게 얻을 수 있는 서비스에는 분명한 한계가 있습니다. 하지만 욕망에 사로잡힌 사람들은 그 한계를 넘어서는 소비와 소유를 추구하는 삶을 결코 포기하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너무나 당연히 다른 존재들의 것을 빼앗는 약탈의 삶을 선택합니다. 하지만 지구 생태계는 상호의존의 법칙으로 창조된 공간입니다. 결국 약탈의 삶의 방식은 지구 생태계의 공멸을 가져올 뿐입니다.

우리는 지금 우리가 누리는 화려하고 편리한 문명이 참 당연한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그만큼 애쓰고 노력하고 있고,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이 그리 쉽게 허물어질 것처럼 보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성서가 일관되게 이야기하는 것은 창조주 하나님의 뜻에 맞지 아니면, 창조세계의 한계와 균형을 넘어서는 성장과 번영은 있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최초의 도시 우르도, 거대한 피라미드를 세웠던 이집트도, 이스라엘을 지배했던 앗수르와 바벨론도, 그리고 거대한 제국을 이루었던 로마도, 생태적 한계와 상호의존의 창조의 원칙을 벗어난 문명을 추구했을 때, 작은 생명을 살리기 위해 애쓰시는 하나님의 뜻에 어긋날 때 모두 사라지고 말았다는 것을 우리는 성서와 역사를 통해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가 그토록 따르고자 하는 아브라함의 믿음은 눈에 드러나 보이는 세상이 아닌 오직 하나님의 뜻인 생명과 평화를 따르는 길에 참된 축복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 길이 풍요와 화려함을 떠나 작고 소박한 길을 걷는 길이라고 할지라도, 우리는 당당히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믿음의 자녀가 되어야 한다는 것을 오늘 성서는 우리에게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그 길이야 말로 참된 생명으로 살아가는 길이고, 영원한 축복의 길이기 때문입니다.

(이 글은 6월 7일 서울제일교회 환경주일 설교문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