녹색신앙 이야기

위기의 위기에서

작성일
2020-05-06 10: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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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기의 위기에서

김국진 집행위원 (목사, 감리교 종립 대안학교 산돌학교 교목)

몇 해 전, 아내가 노푸를 하겠다고 했다. 노푸라는 말을 새로 나온 다이어트쯤으로 넘겨짚고 무심하게 대답했던가? 아내가 냄새나냐고 물으며 근심어린 표정으로 정수리를 내 코에 들이댈 때 문득 알게 되었다. 아하! 노푸는 ‘No-Shampoo’의 줄임말이었구나! 내 마음에서 피어난 냄새라도 날 것만 같은 거리였기 때문에, 평소에 샴푸로 감은 머리도 그렇게 가까이에서 냄새를 맡아본 적이 없기 때문에 나는 별반 답할 말을 찾지 못하고 잘 모르겠다고 대답했다. 냄새는 기억나지 않지만 자는 동안 머리에서 버섯이라도 자라날까 염려하는 것 같던 아내의 재미있는 표정은 잊기 아까운 것이다. 아내가 샴푸를 쓰지 않은 이유는 자연환경보다는 모발환경을 위한 것이었다. 듬성해지는 모발보다 더 절박한 사안이 또 있을까? 간절한 마음일지언정 익숙하고 당연했던 것에서 멀어지는 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를 아내의 노푸를 통해서 새삼 느꼈다. 아내의 머리숱은 결혼 전이나 지금이나 여전하지만 아내는 달라지는 것들 때문에 더 매력적이다.

달라지지 않는 사람들 때문에 지지리 고생했던 성경 속의 한 인물 얘기를 하련다. 에스겔 선지자! 그가 예루살렘성과 공성퇴의 모형을 만들고 유다가 망하는 모습을 보여주어도, 줄로 묶여 모로 누워 지내는 모습이나 쇠똥으로 음식을 구워먹는 모습, 날카로운 칼로 자신의 머리카락과 수염을 쳐내는 모습에도 사람들은 꿈쩍하지 않았다. 어디 에스겔 선지자뿐이랴? 이사야 선지자는 삼 년 동안 벗고 다니며 외쳤다. 그렇게까지 하셔야 했나 싶다가 그렇게 명령하실 정도로 사람들이 돌이키기를 바라셨던 하나님의 마음을 생각해 본다. 그리고 그 어려운 걸 순종했던 선지자들의 애절하고 다급한 마음도 생각해 본다. 경고와 위기의 순간이었고 그런 상황에서야 나올법한 격한 선포 방식이겠다. 그런데 이스라엘도 유다도 변하지 않고 망했다.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하나님께서 에스겔 선지자를 또 보내신다면 에스겔 선지자는 아마도 지구본에 불을 지피며 외쳐야 하지 않을까? 지구의 주인인척, 시간의 주인인척하지 말고 단박하게 살아가라고, 위기의 위기를 통탄하며 말이다.

위기라는 말은 다급함을 일깨우는 말이다. 그런데 환경위기, 기후위기라는 말은 사람들에게 큰 감정을 불러일으키지 못하는 것 같다. 적어도 나에게는 그런 말이었다. 대학원에서 환경에 관한 강연을 듣고서 생각했다. ‘그래서 어쩌란 말인가?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샴푸 조금씩 짜서 쓰고 분리수거 잘하는 정도가 고작인데?’ 그 정도는 환경파괴적인 거대한 자본과 산업의 구조 앞에서 스스로의 정신을 위로하는 정도의 미미하고 의미 없는 노력처럼 느껴졌기 때문일까? 더한 노력들은 엄두가 나지 않았기 때문일까? 성경에 일회용품을 쓰지 말라는 말씀이 없기 때문일까? 나의 푸념은 말로 정리하기 힘든 막연한 답답함 그 자체였다.

막연한 것들은 미루게 된다. 미뤄둔 것은 잊히기 마련이다. 그런 주제들은 내 머릿속에서 수업과 과제들, 교회의 사역들 그리고 학비 벌이 같은 일들에 맥없이 밀려났다. 그러던 어느 날 저녁 학교 앞 골목길에서 반가운 선배 형님을 만났다. 짧았던 대화에서 어쩌다가 그런 말이 나왔는지는 모르겠지만 그 형은 샤워할 때 비누를 쓰지 않는다고 했다. 놀랐지만 감히 정말이냐고 되물을 수 없었다. 골목의 어스름에 내리는 조명이 비누를 쓰지 않는 조용한 혁명가의 실루엣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그 모습이 참 멋있었다. 그 만남 이후 한동안 비누를 집어들 때마다 그 형님의 실루엣이 떠올라서 불편했다. 분명히 고르면 안 되는 것을 골라서 하고 살았던 사실이 비누 거품을 씻어내도 살에 스미는 것 같았다. 순종은 나만의 착각이었다. 나도 모르게 내 입맛에 맞는 것들이 나에게 익숙해지고 당연해진 것이다.

에스겔서의 뒷부분에는 성전에서 흘러나온 물이 유다 광야를 적시고 죽은 사해바다도 살려 생명으로 넘치게 되는 하나님의 뜻이 담겨있다. 지금도 피조물들은 탄식하며 하나님의 아들들이 나타나기를 기다리고 있다.(롬8) 하나님의 뜻과 말씀은 분명하다. 외면하지 않으면 날로 더욱 분명하다. 내 삶은 분명하지 못했다. 반드시 해야 하는 일을 조금 더 잘하게 되는 일쯤으로 여겼기에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일상의 관심과 일들도 늘 벅찼기 때문에 ‘조금 더 잘하게 되는 일’은 ‘안 해도 되는 일’과 다름이 아니었다.

청지기의 사명을 생각하며 살아가기 시작한다는 것은 아마도 개종하는 것보다 일상에 더 많은 변화가 필요한 일일지도 모르겠다. 고민과 결심이 필요한 일이다. 누가복음 9장을 보면 예수님이 예루살렘을 향하여 올라가기로 굳게 결심하셨다는 말씀이 나온다. 나는 그 구절이 좋다. 가벼운 마음으로 임하면 되지 않을 일을 앞두고 예수님도 고민하시고 결단하신 모양이다. 예수님은 공감도 응원도 없이 누가 봐도 처참하게 지는 자리로 향하셨고 예루살렘 성전을 정화하셨다. 나사렛 촌사람들의 난동이 그 거대하고 부패한 종교권력과 예루살렘 성전을 얼마나 바꾸었을까? 효율과 의미를 즐겨 따지는 내 안의 내가 묻는다. ‘네가 노력해서 바뀌는 게 뭐니?’ 십자가와 구원을 교리로 만나면 굳은 마음을 먹은 예수님은 만날 수 없다. 결심으로 시작되었다. 그리고 아직 끝나지 않았다. 그러니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질 때까지, 마음을 단단하게 하셨던 예수님처럼 단단히 마음먹고 시작하자. 위기라고 외치자 정말 위기니까. 개그맨 박명수씨 말마따나 늦었다고 생각할 땐 정말 늦은 거니까.

(이 글은 기독교환경운동연대 집행위원들의 연속 기고문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