녹색신앙 이야기

희망은 없다.

작성일
2021-01-04 14: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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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은 없다.

- 임준형(기독교환경운동연대 간사)

이성복 시인은 그의 책 <네 고통은 나뭇잎 하나 푸르게 하지 못한다>에서 절망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근본적으로 절망은 허위다. 살아있으면서, 살아있음을 부정하는 것”, 시인은 살아있는 사람들이 절망을 말하는 것이 슬펐던 모양이다. 살아있다면 어떻게든 절망스러운 상황을 헤쳐나가며 결국은 살아야 하니 말이다.

‘기후변화’와 ‘기후위기’라는 말의 간극이 살의 경험으로 다가온다. 자포자기하듯 절망을 말하는 이들이 있다. ‘위기’, ‘붕괴’, ‘파국’ 용어를 바꾸어가며 겁을 주고, 어르기도 하고, ‘그린 뉴딜’과 같은 단 꿈같은 이야기로 유혹하고 달래보기도 하지만 강력한 일상(business as usual)에 대한 욕망은 끄떡도 하지 않는다. 와중에 코로나 19로 멈춰선 세상에서조차 온실가스의 농도는 증가했다는 소식이 들려온다. 아직 제대로 된 기후위기는 시작도 되지 않았다는 과학자들의 이야기는 가장 소름 돋는 스릴러물이다. 절망을 이길 희망을 말하지만 도대체 그 희망은 어디에 있는가?

언제나 가장 먼저 고통받는 것은 척박한 삶에 간신히 매달려있듯 살아가던 이들이다. 타는 듯한 태양 빛이 결국 곡식을 불태웠다. 가뭄은 굶주림과 가난을, 굶주림과 가난은 수 백 년, 수 천 년 삶의 터전을 버리는 이주를 강요했다. 이주의 결말은 결코 아름답지 못했다. 삶의 터전을 잃은 가난한 시골 출신들에게 삶을 나눠 줄 만큼 도시는 풍족하지 않았다. 도시의 부스러기마저 사라진 순간 잔인한 폭력이 덮쳐왔다. 수많은 난민의 행렬과 10년의 내전은 그렇게 시리아를 파괴했다. 하지만 이건 수많은 사건 가운데 하나에 지나지 않았다.

기후위기는 여러 가지 가면을 쓰고 나타난다. 폭우, 냉해, 슈퍼태풍, 폭염, 메뚜기떼, 심지어 혹한의 추위, 그리고 2020년 우리의 삶을 고통스럽게 만든 바이러스의 창궐까지 말이다. 하나의 재앙은 다른 재앙을 불러온다. 세계는 연결되어 있고 서로 영향을 주고받는다. 어쩌면 내가 오늘 당하는 직장 상사의 괴롭힘마저도 어쩌면 기후위기의 탓일 수 있다. 기후위기가 주식 가격의 폭락을 불러올 수 있기 때문이다. 앞으로 당할 일들에 비하면 아마도 애교에 가깝겠지만 말이다.

이른바 ‘신(新)기후체제’라는게 2021년, 올해부터 시작된다고 한다. 교토의정서를 대체할 파리협약을 중심으로 한 체제가 시작된다는 뜻이다. 산업화 이후 온도상승 폭을 가능한 한 1.5℃로 제한하도록 ‘노력’하기 위해 세계 모든 나라들이 힘을 모을 때가 왔다는 뜻이다. 가능성이나 실현 여부를 따지는 것은 무의미하다. 평균기온 1℃가 오른 지금의 상황에서 우리 세계가 겪고 있는 고통이 이미 심각하고, 남은 0.5℃의 상승이 가져올 변화가 얼마나 파멸에 가까운지에 대한 경고는 이미 수도 없이 이뤄지고 있다.

희망을 말하는 것은 사치이고, 절망을 말하기엔 너무 이르다. 우린 ‘이미’와 ‘아직’이 뒤섞인 종말의 시대를 살고 있다. 그러나 이 종말은 우리가 흔히 말하던 이미 온, 그리고 다가올 하나님의 나라를 일컫는 희망찬 종말은 아니다. 이 지구 안에서 인류라는 이름을 가진 우리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종말이다. 징조는 이르렀으되 우리는 아직 준비조차 되지 않은 설익은 밥과 같다. 정부의 그린 뉴딜도, 탄소 중립 선언도 푸석거리는 생쌀을 먹는 듯 이물감이 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에겐 이런 설익은 발버둥마저 절실해 보인다. 그러나 여전히 희망은 아니다. 그리고 희망은 없다.

하지만 나는 믿는다. ‘이 눈에 아무 증거 아니뵈어도’, 이루어지지 않은 구원을 믿음으로 보는 이가 그리스도인이니 말이다. 창조 세계를 향한 애끓는 사랑으로 존재하지 않는 희망도 만드는 사람, 절망의 터에 희망을 심고 거두는 사람들이 나타날 것이다. 우리는 원래 그런 밑도 끝도 없고, 대책 없는 믿음의 소유자들이었으니 말이다.

* 이 글은 월간 새가정 1월호 '생태계와 더불어 살기' 꼭지에 연재된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