녹색신앙 이야기

기후변화 고민하지 않는 교단들…한국교회에 미래 없다

작성일
2020-09-28 11:55
조회
1156

뉴스앤조이.jpg

기후변화 고민하지 않는 교단들…한국교회에 미래 없다
총대들이 권한만 갖고 책임은 지지 않는 이상한 구조…환경문제, 지금 당장 나서지 않으면 생존 못 해

임준형(기독교환경운동연대 간사)

2020년 여름, 사상 최장의 장마를 기록했다. 함께 장마를 겪은 중국과 일본도 심각한 홍수 피해를 입었다. 중국에서는 산샤댐이라는 대규모 댐이 홍수 때문에 붕괴할지도 모른다는 이야기가 나오기도 했다. 대한민국은 40일 이상 계속된 장마로 제방이 무너지고 곳곳에서 어려움을 겪었다.

장마가 끝나자, 더위와 함께 슈퍼 태풍이 찾아왔다. 홍수 피해를 채 복구하기도 전에 찾아온 태풍은 다시 많은 비를 뿌리고 강풍으로 심각한 피해를 만들어 냈다. 특히 이번 태풍은 핵발전소의 '소외 전원 상실'이라는 심각한 사건을 일으켰다. 자칫하면 인구 수백만의 도시를 후쿠시마와 같은 상황으로 몰고 갈 위협이었다. 태풍이 지난 후 미국 콜로라도주 덴버에는 갑자기 폭설이 내렸다. 태풍이 찬 공기를 밀어내 사흘간 폭염이 이어지던 지역에 갑작스레 눈이 내린 것이다.

지난 2월, 여름을 지나던 남반구 호주에서는 7개월 지속된 산불이 진화되었다. 그러나 7개월 동안 수많은 야생동물이 죽었고, 사람들의 피해도 적지 않았다. 비가 내려야 할 시기에 비가 내리지 않았고, 가물어 말라 버린 숲은 거대한 장작더미와 다를 바 없었다. 산불의 진화는 인간의 능력 밖이었다. 최종 집계된 피해 면적은 대한민국 영토보다 넓은 12만 4000㎢였다. 결국, 호주 전역에 내린 비 덕분에 산불을 겨우 진화할 수 있었다.

그로부터 얼마 후 서남아시아에는 메뚜기 떼가 출몰했다. 2018년과 2019년 아라비아해 인근 사막지대에서 발생한 비정상적 사이클론과 집중호우로 필요 이상의 습기가 메뚜기 산란지에 축적되면서 메뚜기 수가 급증했기 때문이다. 비슷한 시기 시베리아에서는 이상고온현상이 발생했다. 아직 추워야 할 시기였는데도, 따뜻한 수준을 넘어 기온이 20도 이상을 기록한 것이다. 시베리아 동토층이 녹아 동토층 위에 있던 유류 탱크가 쓰러져 강이 기름으로 뒤덮이고, 북극해까지 오염시킬 위험에 처했다는 뉴스가 보도되기도 했다. 거기다 코로나19 팬데믹까지 더해져 2020년 지구는 거의 세기말을 떠올릴 만큼 심각한 위기를 겪고 있다.

이 수많은 재난의 원인으로 지목되는 것은 단 하나의 사건이다. 바로 지구온난화 혹은 기후변화라고 불러왔던 기후 위기다. 기나긴 장마를 지나는 동안 많은 사람에게 공감을 얻었던 한 문장이 있다. "이 비의 이름은 장마가 아니라 기후 위기입니다." 사상 최장의 장마, 슈퍼 태풍, 호주 산불, 서남아시아의 메뚜기떼, 시베리아의 고온 현상, 코로나19 팬데믹까지, 원인을 따지고 들 때 기후 위기가 어떤 방식으로든 연결돼 있었다. 이러한 위기는 오래전부터 과학자들이 경고했던 내용이기도 했다.

특별히 몇 해 전 인천 송도에서 열린 기후변화에관한정부간협의체(IPCC) 총회가 채택한 1.5℃ 특별 보고서는, 산업혁명 이전보다 약 1℃ 상승한 지구 평균기온을 1.5℃ 이하로 제한하지 못하면, 티핑 포인트를 넘어서면서 회복 불능 상태로 이어질 것이라고 경고했다. 한마디로,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말이다. 기후 위기를 경고하는 이들은 남은 시간을 7년 혹은 7.5년 정도로 예상한다. 이 기간 안에 1.5℃ 특별 보고서가 말하는 대로 탄소 배출량을 최소한 45%는 감소시켜야 한다. 2050년에는 '넷제로', 즉 배출하는 온실가스의 양과 자연이 흡수하는 양이 동일한 수준까지 이르러야 한다.

그러나 이 또한 최소한의 생존 조건을 지키는 일에 불과하다. 즉 1.5℃는 인류가 생존하기에 최적의 조건인 것이 아니라, 지금과 비슷한 재난이 반복되지만 인류가 생존 자체가 불가능한 상황에 이르는 일을 막을 수 있다는 말이다. 겨우 산업화 이후 1℃가 올랐을 뿐인데도, 인류의 생존을 고민해야 하는 상황에 이르렀다.

말 그대로 기후가 위기 상태에 도달한 것이다. 이미 세계 곳곳에는 가뭄과 홍수, 슈퍼 태풍, 폭염과 냉해 등 기상이변이 수시로 찾아오고 있다. 이런 현상들은 서로 연결되어 심각한 변화를 낳는다. 이러한 변화를 막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 1.5℃ 특별 보고서의 경고대로라면 전 세계가 매년 7% 정도 온실가스 배출량을 줄여야 한다. 그중 탄소 배출량이 많은 나라의 책임은 막중하다. 한국은 매년 15~20%의 탄소 배출을 감소시켜야 한다. 한국은 산업화 이후 꾸준히 탄소 배출량을 증가시켜 왔다. -15%를 기록한 해가 있었으나, 그해는 외환 위기로 회사들이 줄도산하고, 수많은 이의 삶이 수렁에 빠지는 정도로 큰 충격이 찾아왔던 때였다.

스웨덴 환경 활동가 그레타 툰베리는 '금요 결석 시위'를 통해 기후 위기가 초래할 끔찍한 세상을 경고했다. 그에게 동조하는 이들이 늘어나면서 이 시위는 방송 등을 통해 사람들에게 알려졌다. 툰베리는 이 운동을 통해 UN총회에 초대받았고, 그는 비행기를 타지 않겠다는 신념을 따라 무동력배로 대서양을 건넜다. 뉴욕에 당도한 툰베리는 세계 각국 정상을 향해 "어떻게 감히"(How dare you!) 사람이 죽어 가고, 생태계 시스템이 붕괴되고, 수많은 생물이 멸종당하는 위기 앞에서 돈과 성장의 신화에 대한 이야기만 하고 있느냐고 질타했다. 만약 청중이 교단 총회의 총대들이었다면, 그 연설은 다음과 같이 바뀌지 않았을까.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사람들이 죽어 가고, 하나님이 지으신 창조 세계가 불타고, 하나님께서 함께 살도록 지으신 이웃의 생명들이 멸종을 당하고 있습니다. 여름철 폭염으로 야외 노동을 하다가 온열 질환으로 사람이 죽고, 쪽방촌에서 살인적 무더위 때문에 매일 밤 고통받는 이들이 있습니다. 봄철 냉해로 농사를 망친 농민들이 눈물짓고, 여름의 기나긴 장마로 홍수가 나서 사람들이 죽거나 다치며, 물에 잠긴 집과 떠내려간 살림살이로 슬퍼하고 있습니다. 매년 슈퍼 태풍으로 엄청난 피해가 발생하는데, '어떻게 감히' 당신들은 이 위기 앞에서 돈과 성장의 신화에 대한 이야기만 하실 수 있습니까?"

한국기독교사회문제연구원에서 2019년 발표한 주요 사회 현안에 대한 개신교인 인식 조사 결과에 따르면, 한국교회 대부분의 교인은 일반 시민보다 약간 높은 수치로 생태 문제의 심각성을 인식하고 있고, 문제 해결을 위해 구체적으로 실천하는 데 교회가 함께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다. 하지만 그들을 대표한다는 교단 총대들 논의를 보면, 이러한 주제를 찾기가 무척이나 어렵다. 총대들이 교인들의 뜻을 대의하지 못하고 있다는 이야기다. 즉 교인들은 세상의 문제에 대해 교회가 함께 고민하고 문제 해결을 위해 나서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총대들은 별로 관심이 없다는 사실을 의미하는 것이다.

대부분 한국 개신교회 총회는 교단마다 차이가 있으나 대의제 정치 구조를 따른다. 대의제 정치 구조의 정신이 지켜지려면, 교회 구성원들의 다양한 생각을 대표하는 다양한 사람들이 모여 교회의 일에 관한 민주적 의사 결정을 내릴 수 있어야 한다. 그럴 때라야 비로소 의미가 있다. 그런데 교단을 대표한다고 모여 앉은 수많은 총대 가운데 기후 위기 문제를 논의의 테이블에 올려놓는 이는 한 명도 없었다. 노회나 연회도 크게 다르지 않다. 총회 연금에 대한 논의에는 심혈을 기울여도, 진짜 생존의 문제가 걸린 기후 위기에는 관심이 없다는 말이다.

교회 세습과 관련한 안건을 처리하는 데도 애를 먹는 중이다. 심지어 범죄자들과 화해하겠다고 수습안을 내고, 성문화한 헌법을 잠재하기도 한다. 돈으로 권력을 사고, 성범죄 문제마저도 돈과 권력 문제와 얽혀 있다면 언제든 눈감고 넘어가는 총회다. 실제로 개교회를 출석하는 교인들과 이 의제들은 얼마나 동떨어져 있는가. 100번 양보해서 정의를 이루기 위한 일, 교회의 자정 능력을 보여 주는 일이라고 하더라도, 이 문제들이 엄청난 에너지를 쏟고 어마어마한 비용을 지출하며 논의해야 할 주제로 교인들에게 인식되고 있을까? 범법자는 법대로 치리해야 마땅한 것이니, 재판을 주관하는 위원회에서 법에 근거해 결론짓고 총회에서는 보고로 마무리하는 게 당연하다고 여기지 않을까? 교단 대표로 모인 이들이 좀 더 생산적인, 미래를 위해 꼭 필요한 논의와 담론을 이어 가길 기대하지 않을까?

만약 1997년 외환 위기, 해고와 비정규직 전환이 발생하고 스스로 목숨을 끊는 이들이 끊이지 않던 때에 총회가 적극 목소리를 내고 노동자들의 권리를 위해 싸웠다면 어땠을까? 2014년 세월호 참사 앞에서 교회가 진실을 규명하라고 목소리를 높였다면 어땠을까? 수많은 노동자가 삶을 걸고 고공 농성과 점거 농성을 진행할 때, 총회가 이들을 위해 목소리를 높였다면 어땠을까? 만약 총회가 새만금 방조제 건설이나 4대강 사업을 저지하는 일에 나섰다면 어땠을까? 그랬더라도 교회가 지금처럼 온갖 모욕과 차별에 직면했을까? 이해관계를 떠나 정의·평화·생명을 위한 일에 진작부터 매달렸다면 지금 한국교회에 대한 평가는 달라졌을 것이다.

특히 1997년 외환 위기를 생각해 보자. 당시 수많은 청년이 불안한 삶의 무게에 짓눌려 교회를 떠났다. 이는 2010년대 교회에서 중추 역할을 맡을 중년층 부재로 이어졌다. 이는 교회학교 붕괴와 더불어 청소년·청년 부서 붕괴로 이어지는 악순환의 고리를 만들어 냈다. 자신들의 이해관계에 골몰한 교회가 내부 청년들 목소리에도 무관심했던 탓이다. 이는 이후 찾아올 기후 위기 상황에 침묵하는 교회가 마주할 위기와도 무관하지 않다.

기후변화는 순식간에 모든 것을 바꿔 놓을 것이다. 몽골의 사막화로 삶의 터전을 빼앗긴 유목민이 도시 외곽 판자촌 빈민이 되고, 투발루 주민이 해수면 상승으로 조상 대대로 살아온 삶의 터전을 잃어 난민이 되고, 시리아 농민이 2년의 긴 가뭄으로 황폐화한 땅 때문에 도시 빈민이 되는 것처럼 말이다. 러시아의 밀 흉작이 겹쳐 식량 가격이 상승하고, 증가한 인구수를 감당하지 못하는 도시 인프라가 내전과 10년간의 국제분쟁으로 비화해 많은 전쟁 난민을 만들었던 것처럼 말이다. 기후 위기가 우리 삶을 어떻게 바꿀지 명확히 인식하고 대책을 마련하는 일에 고심해야 할 교단 총회가 이 사안에 침묵하는 것은 미래를 향한 책임을 회피하는 일이다.

UN환경계획(UNEP)은 종교계를 향해 기후 위기를 막는 일에 나서 달라고 지속적으로 요청하고 있다. 탐욕으로 질주하는 세계의 브레이크가 되어 달라는 요청이다. 이러한 요청이 있기 전부터 세계교회협의회(WCC)를 비롯한 세계 교회는 기후 위기를 비롯한 정의·평화·생명에 관한 문제들을 심도 있게 고민하면서 선언문을 발표해 왔다. 개교회를 향해 실천을 독려하면서 이 문제들을 예배와 교회 교육에 담아내 사회적 책임을 감당하려 애쓰고 있다. 하지만 한국교회는 이러한 요청이나 흐름과 동떨어져 있다. 오히려 세습·성범죄 등으로 질타를 받고 있다. 더욱이 코로나19 상황에서 8·15 광복절 집회와 사랑제일교회발 확산 등, 사회에 구제 불능의 집단이라는 인식을 심어 줬다. 과도한 욕망에 대한 제동장치가 돼야 할 복음이 한국에서는 오히려 역기능적으로 작용하고 있다.

이런 문제는 '총회'라는 대의제 정치의 맹점으로 발생하는 것이기도 하다. 총회에서 발언하는 거의 모든 사람이 60세 전후의 남성이다. 60세 전후 남성을 중심에 놓는 총회의 편협한 행태를 견제할 수단이 없다. 이들만의 교회가 아닌데도 이들의 목소리가 과잉 대표되고 있다. 세상에 문제에 보수적이고 편협한 시각을 가진 이들이 권력을 틀어쥐고 있다. 그러니 다른 목소리는 배제되거나 외면당할 수밖에 없다.

이들은 교회에서 특별한 지위를 보장받는 사람들이다. 민주적 정관을 내세우는 일부 교회를 제외하면, 이들을 징계하거나 이들에 대한 재신임을 묻는 일은 거의 불가능하다. 이들은 은퇴하기 전까지 교회의 대소사를 마음대로 결정할 수 있는 권한을 지닌 존재들이다. 견제당하지 않으니 미래에 대한 책임 있는 논의에도 관심이 없다. 자신들 안위에만 관심을 기울일 뿐이다. 상황이 이러하니, 사회적 책임, 미래에 대한 책임을 묻는 일은 불가능하다. 권한을 갖고 있지만 책임은 지지 않아도 되는 이상한 구조에서는 제대로 된 민주주의가 작동할 수 없다.

미국연합그리스도교회(UCC) 짐 안탈(Jim Antal) 목사는 저서 <기후 교회 - 기후 붕괴라는 장기 비상사태와 교회의 사명>(생태문명연구소)에서 2100년 WCC 회의에 참석한 소녀의 목소리를 들려준다.

"교회는 마침내 21세기 두 번째 10년 말에 깨어났습니다 - 그리고 그게 바로 내가 오늘 여기에 있는 이유입니다. 교회에 나가는 사람들이 점점 더 줄어들고, 하느님의 피조물들에 대한 전망이 매우 흐려지고 있을 때, 뭔가가 일어났습니다. 만일 그들이 하느님을 사랑하면, 피조 세계를 보호해야 함을 우리의 신앙 선배들은 알았습니다. 그들은 자신의 몸들을 명예를 위해 내어놓았습니다. 우리는 그들 모두의 이름을 알지는 못하지만, 그들을 집단으로는 알고 있습니다. 일단 그들 가운데 몇천 명이 권력과 당국자들과 용감하게 저항했더니, 다른 많은 사람들이 뒤를 따랐습니다." (316쪽)

이 이야기를 전한 에버그린 스즈키(Evergreen Suzuki)는 상상 속 인물이다. 그러나 그의 말은 진실이 돼야만 한다. 하나님을 사랑하기에 피조 세계를 보호해야 한다는 책임감을 지닌 이들, 미래를 위해 자신의 몸을 명예롭게 내어놓는 이들, 피조 세계를 지키기 위해 권력과 당국자에게 저항하는 이들이 나타나야만 교회가 생존할 수 있다. 지금 당장 변화를 시작하지 않는다면 우리에게 미래는 없다. 지금 한국교회는 그럴 수 있는가?

*이 글은 2020년 9월 24일 임준형 간사가 뉴스앤조이에 기고한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