녹색신앙 이야기

기후위기, 자본세 600년의 한계점

작성일
2021-04-06 1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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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후위기, 자본세 600년의 한계점
- <저렴한 것들의 세계사> (라즈 파텔, 제이슨 무어 저, 백우진, 이경숙 역, 북돋움, 2020년) > 서평


이진형 (기독교환경운동연대)

지난주에 기독교환경운동연대는 강원도 홍천군 군청 청사 앞에서 전국에서 모인 40여 명의 목회자들과 생명정의평화 예배를 드렸다. 강원도를 가로질러 건설될 예정인 송전탑 건설과 전기가 남았을 때 상부댐으로 물을 올려두었다가 전기가 모자랄 때 하부댐으로 물을 내려 발전을 하는 양수발전소 건설을 반대하는 홍천군 주민들과 함께하는 예배였다. 홍천군 지역 주민들이 송전탑과 양수발전소 건설을 반대하는 이유는 송전탑과 양수발전소가 오랜 시간 지역사회와 공유해온 미적, 생태적, 경제적 가치를 지닌 생태환경을 훼손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문제는 지역 주민들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한전과 한국수력원자력에서는 송전탑과 양수발전소 건설을 강행하고 있다는 것이다. 공사를 추진하는 기업의 입장에서는 주민들의 건설 반대는 건설비용이 상승하는 문제일 뿐이다. 아무리 지역 주민들이 결사반대를 외친다고 해도 기업은 사업 추진으로 이익이 발생하는 한 송전탑과 양수발전소 건설을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 홍천 주민들의 답답하고 억울한 마음을 예배의 자리에서 격려하고 위로할 수밖에.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저렴한 것들의 세계사>는 이 일이 600년 전, 대서양의 섬 ‘일리야 다 마데이라’에서 시작되었다고 이야기한다. 1419년에 포르투갈 사람들은 숲으로 빽빽한 마데이라 섬을 발견하고 섬의 나무를 베어 배를 건조했다. 사람들은 숲이 사라진 자리를 개간해 밀을 재배했다. 그런데 마데이라 밀 농장에 투자를 했던 사람들은 사탕수수를 재배하는 것이 밀보다 수익성이 높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사람들은 투자를 통해 마데이라를 설탕산업 기지로 만들었다. 설탕을 정제하기 위해서 마데이라의 숲의 나무를 연료로 사용했다. 설탕 1Kg을 얻기 위해서는 목재 50Kg이 소요되었기에 1530년이 되었을 때에는 숲으로 울창하던 마데이라의 나무란 나무는 모두 사라지고 말았다. 사람들은 설탕산업을 지속하기위해 마데이라로 나무를 실어왔다. 그리고 사람들은 사탕수수를 재배할 노동력과 설탕 정제를 위한 노동력을 얻기 위해 식민지에서 노예도 실어왔다. 머지않아 마데이라는 설탕산업보다 수익성이 좋은 노예산업의 중심지가 되었다. 교회도 수익성 좋은 노예산업을 지지했다. 유럽의 백인 남성만이 하나님의 온전한 창조물이었고, 자연에 속한 존재인 여성과 식민지의 사람들을 지배하고 정복하여 교화해야 한다는 생각이 널리 퍼져나갔다. 자연과 노동, 여성과 유색인종, 식량과 연료를 비롯한 다른 생명체들은 모두 더 많은 돈을 모으기 위한 구조 속에서 ‘저렴한 것’(Cheap Things)이 되어야했다. <저렴한 것들의 세계사>는 이 일들이 어떻게 시작되고 발전해서 오늘에 이르게 되었는지에 대해 이야기를 하고 있다.

그런데 문제는 이 저렴한 것들의 세계가 더 이상 이어질 수 없는, 생태적 한계에 봉착했다는 점이다. 지난 600년 동안의 자본세가 확장되는 동안 저렴하게 만들었던, 그래서 감춰졌던 비용들이 ‘기후위기’라는 이름으로 한꺼번에 청구되고 있다. 현재의 기후위기는 자연과 노동, 여성과 유색인종, 식량과 연료를 비롯한 다른 생명체들에 공정하게 지불했어야 할 불평등의 비용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비용을 누구에게 청구해야 할 것인가? 회복적 정의를 이루자면 그동안 불평등의 체제 속에서 막대한 이익을 취해온 사람들이 ‘보상 생태’에 나서야 한다. 기후위기 대응 운동은 생태적 정의를 이루는 일이다. 오늘날의 지구적 불평등은 우리가 경건하지 못해서가 아니라 우리 사회가 정의롭지 못한 체제를 방치한 결과일 뿐이다. 마데이라는 지금은 관광산업의 기지이다. 예전 설탕산업과 노예산업의 유적을 돌아보기 위해 사람들은 마데이라로 관광을 간다. 그렇게 마데이라의 자본세는 계속 이어지고 있다.

(이 글은 3월 30일 바이블25 오늘의 책에 기고한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