녹색신앙 이야기

관계가 우릴 구원할거에요.

작성일
2021-11-26 1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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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아들이 세상에 오셨다. 우리는 12월을 그렇게 기억하고 있다. 그리고 우리는 예수께서 오셔서 우리를 구원하셨다고 고백한다. 복음서는 그렇게 찾아온 하나님의 아들이 어떻게 살다가, 어떻게 죽고, 어떻게 부활했는지를 그린다. 그리고 그 사건을 약 2천 년 전 어느 중동 마을의 일이 아니라 나의 사건으로 받아들이는 기적 같은 일들이 벌어진 이들에게만 구원은 현실이 된다. 그 과정에서 예수를 나의 주님이라고 고백하는 일도 벌어지고, 예수께서 아버지라 부르신 분을 우리도 아버지라 부르며 기도를 하게 되는 일도 일어난다. 그렇기에 신앙이나 구원은 신비에 관한 이야기이면서도 관계에 대한 이야기가 된다.

신학자 보프는 생태학을 관계에 대한 학문이라고 이야기한다. 그래서 어쩐지 ‘생태’라는 말에는 ‘공동체’라는 말이 어울리기도 한다. 우리가 따로 떨어져 혼자 존재하는 이들이 아니라는 말은 위로가 된다. 사람들끼리도 ‘더불어’, ‘함께’가 힘든 세상이니 말이다. 생태학의 세계에선 세상의 모든 것은 연결되어 있고, 서로 영향을 주고받는다. 우리는 홀로 살아가는 것처럼 느끼지만 결국 물과 공기, 바람과 햇볕, 흙과 풀, 나무와 새, 벌레와 미생물, 동물들과 떨어져 살아갈 수 없다. 본적도 없고, 목소리도 들은 적 없는 이들과 우리는 이미 하나의 공동체로서 살아가고 있다. 아울러 우리가 공동체로 살고 있다는 말은 인류가 초래한 기후 위기와 생태계 파괴가 우리(생태공동체)의 긴밀한 관계망을 깨뜨릴 때 그것이 공동체에 속한 모두의 위기가 된다는 말이기도 하다.

흔히 “적자생존”, 강한 자가 살아남는 세상을 살고 있다고 많은 이들이 믿고 있다. 하지만 브라이언 헤어, 버네사 우즈는 <다정한 것이 살아남는다>라는 책을 통해 ‘적자생존’은 틀렸다고 말한다. 우리는 서로가 영향을 깊이 주고받으며 진화해왔고, 그 과정은 강자가 약자를 집어삼키고 강자만이 살아남는 것이 아니었다. 먹고 먹히는 일이 있으나 가학과 피학의 관계는 아니다. 우리가 성찬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의 살과 피를 먹는다고 고백할 때 그 관계가 ‘적자생존’이 아니듯, 먹고 먹히는 관계도 결국 힘의 구조는 아니다. 성찬이 우리에게 보여주듯 우리는 서로의 먹이가 되고, 서로를 위해 자신을 내어줄 때 새로운 존재, 새로운 관계로 나아갈 수 있다. 하지만 이 관계의 신비를 잃어버린 순간, 즉 힘의 관계로 모든 것을 설명할 때 위기가 시작되었다. 인류는 강자로 군림하면서 공동체의 다른 이들을 착취했다. 그리고 순환을 통해 유지되던 세계를 망가뜨렸다.

바울 사도는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지녀 십자가에 죽기까지 순종하신 예수를 이야기한다. 군림하거나 착취하기 위해 오신 분이 아니라 세상을 구하기 위해 자신을 낮추고 희생하기 위해 오신 분이라는 고백이다. 가장 낮은 자의 자리, 폭력과 착취의 굴레 속에서 죽어가는 이들과 공동의 운명을 자처하신 것이다. 함께 한다는 말은 그런 것이다. 고통당하는 이들과 공동의 운명을 거부하지 않는 것 말이다. 구원을 이루는 관계는 그렇게 시작된 것이다. 이는 꽃 한 송이, 들풀 하나, 하늘을 나는 새, 나무 한 그루, 자라나는 곡식 낱알 하나에 깃든 하나님의 사랑을 아는 예수이기에 가능했던 일이다. 사도 바울은 우리를 향해 그리스도 예수의 이 마음을 품으라고 권면한다.

예수의 삶과 십자가의 죽음, 그리고 부활이 생태 문제와 어떤 연관이 있는지 묻는 이들이 종종 있다. 그럴 때마다 지배하고, 군림하고, 착취하는 인류의 삶의 양식이 불러온 위기가 현재의 기후, 생태계 위기라는 사실을 직면해야 한다고 말하곤 한다. 구원은 그 폭력의 자리, 착취의 굴레로부터 벗어나는 일이고, 이를 위해 예수께서 오셨다고 말이다. 사도 바울은 모든 피조물이 하나님의 아들의 출현을 기다린다고 로마서 8장에서 이야기한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닮아 살아갈 때 피조물이 기다리는 구원도 가능해질 것이다. (임준형)

*월간 <새가정> 12월호에 실린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