녹색신앙 이야기
무엇을 위한 환경운동인가
작성일
2011-07-18 13: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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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을 위한 환경운동인가 김영락 / 본회 사무총장, 목사 10년 전에 환경운동을 막 시작했을 때, 필자는 '환경운동은 성공할 것인가'라는 질문을 받은 적이 있다. 아마도 그때의 대답은 '환경오염으로 종말이 오더라도 환경운동은 해야 되지 않겠느냐'고 반문했던 것 같다. 요즈음에는 환경에 대한 강의를 하고 나서 받는 질문 중에는 '환경보전을 위한 노력보다 환경오염의 속도가 훨씬 더 빠른데, 환경운동은 환경파괴에 의한 파국을 늦추는 것에 불과한 것이 아니냐'라는 내용도 있다. 이런 질문을 하는 사람은 환경문제에 대해서 고심을 하고 있는 사람임에 틀림없다. 사실 세계화의 거센 물결 속에서 온 세계가 경제개발에 전력을 쏟고 있는 상황에서는 에너지의 소비가 급격히 늘어나고, 산림자원을 비롯한 모든 자연자원이 소모될 수밖에 없고, 동시에 대기오염과 수질오염은 심화될 수밖에 없다. 올해 우리나라만 하더라도 사회개혁의 기대를 받고 출범한 참여정부도 환경문제를 다루면서 경제논리나 정치논리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종교인들의 삼보일배로 국민들의 감동을 불러 일으키게 했던 새만금 갯벌 매립사업이나 주민들의 격렬한 반발을 초래한 핵폐기장 건설문제가 바로 그것이다. 세계적으로는 석유자원을 확보하기 위한미국의 이라크 침공 등, 인명과 환경을 희생시키는 전쟁은 곳곳에서 끊이지 않고 있다. 사실 비극은 눈으로 보이는 대규모의 사회적 사건에만 있는 것은 아니다. 지구환경의 중요한요소가 되는 인간 하나 하나가 어떠한 생각을 가지고 어떻게 살고 있느냐 하는 문제가 지구적 비극의 바탕이 되고 있음이 분명하다.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에덴동산을 지어주시며, 그곳에서 유유히 거닐며 평화와 사랑을 만끽하도록 하셨음에도 불구하고, 인간들은대도시를 건설하고 그 곳에서 경쟁과 싸움을 일삼으며 자신과 사회를 병들게 하고 있으니 이보다 더 큰 비극은 없다. 이러한 비극적 현실 속에서 '녹색 십계명'을 외치며, 피켓을 들고 거리로 나가고, 정치인들을 설득시키고, 사회구조를 변화시키려는 노력을 하는 등등의 환경운동이 과연 상황을 역전시킬 수 있을 것인가? 회의적인 생각이 들지 않을 수 없다. 그런데 레위기 26장을 읽으면서 필자는 하나님께서는 섭리 가운데 이 땅을 회복시키시고 '남은 자'를 하나님의 백성으로 다시 부르심을 믿게 되었다. 26장은 하나님께서는 계명을 잘 지키는 자를 배부르게 하시고, 계명을 어긴 자는 굶주리게 하고, 그 땅은 폐허가 될 것이며, 거기에 사는 자를 땅에서 쫓아내신다는 말씀을 하고, 땅에서 인간이 쫓겨난 후에 그 땅은 비로소 안식을 누리고 회복된다고 말씀한다. 그렇다! 자연은 인간의 죄에 의하여 파괴되지만 하나님의 섭리는 인간이 그 땅에서 쫓겨난 후에 회복되도록 하셨다. 지역사회의 경제적인 목적으로 벌이고 있는 새만금 사업은 실패하도록 되어 있다. 짧게는 시화호의 예를 보아도 알 수 있고, 아주 길게 보면 자연의 흐름을 방조제로 막을 수는 없기때문이다. 핵폐기장 건설문제의 본질은 우리나라의 주요한 에너지원으로 원자력을 사용할것인가 하는 문제이다. 이 원칙에 대해서는 오랜 토론을 거쳐 국민적인 합의를 얻어야 한다. 근래에 독일은 원자력발전소를 폐쇄하기 시작함으로 향후 20년 내로 모든 원자력발전소를 없앤다고 한다. 대부분의 선진국에서 이와 같은 결정을 하고 있다. 2003년도 예외없이 환경을 파괴하며 개발을 추진한 한 해였다. 환경보전이냐 경제개발이냐 하는 해묵은 논쟁을 이제는 멈추어야 한다. 우리는 개인의 자발적 가난과 절제된 삶을 미덕으로 얘기 해 왔었다. 이제는 사회와 국가도 절제된 경제개발을 미덕으로 받아들여야 할 때다. 물론 이러한 주장은 전혀 먹히지 않을 것이다. 인도를 다녀온 어느 목사가 그들의 가난에 찌든 생활을 보고와서 '우리나라를 비롯한 개발국들의 경제적 풍요는 인도와 같이 가난한 나라 사람들 덕분에 가능하다'고 말했다. 그렇다. 만약에 인도와 중국의 이십억이 넘는 인구가 자가용을 타고, 수세식 화장실을 사용한다면 지구의 공기와 물은 지금보다 훨씬 더 많이 오염되었을 것이다. 지구의 모든 사람이 미국인의 생활수준으로 살려면 지구가 여섯 개가 더 있어야 가능하다는 얘기는 지금 이대로 가면 지구는 파국임을 말하고 있다. 사실 이미 파국은 시작되었으며, 이제 남은 것은 인간이 언제 경제개발의 길에서 돌아오는가 하는 것이다. 기독교인이 잊지 말아야 할 것은 개인이나 사회나 물질적 풍요는 정신적 빈곤과 매우 밀접한 관계에 있다는 사실이다. 몸과 마음이 둘이 아니므로, 정신적 빈곤은 육체적 허약을 가져올 수밖에 없고, 이는 스스로 무덤을 파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레위기 26장 1절에서 우상에 절하지 말라는 것은 물질적 풍요, 즉 물신을 섬기지 말라는 것이며, 33절에서 하나님이 인간을 땅에서 쫓아낸다는 말은 사실은 인간 스스로 도태되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환경운동을 하는 것은 사회를 변화시키기 위해서 하는 것이라기보다는 자신을 변화시켜서 생명을 풍성히 누리기 위한 것이다. 이렇게 될 때 땅에서 쫓겨냄을 당하지 않고 '남은 자'가 되어 하나님 나라를 누리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남들에게 환경을 지키라고 말하기 보다 자신이 먼저 실천하는 환경운동이 되어야 한다. 그러면 설사 파국이 올지라도 나는'남은자'가 될 것이다. (격월간 새하늘 새땅 - 2003년 11, 12월호 게재의 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