녹색신앙 이야기

지구 환경 위기와 한국 교회의 사명

작성일
2021-11-03 09: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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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 환경 위기와 한국 교회의 사명
- 기후위기 시대, 그린 엑소더스를 준비하는 한국교회

이진형, 기독교환경운동연대 사무총장


인류가 지구에 대한 인식을 갖게 된 것은 비교적 최근의 일이다. 오랜 시간동안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들이 태어나 살고 있는 마을이 자신이 경험할 수 있는 세계의 전부였고, 나라를 넘어서는 먼 세계를 경험하는 일은 무척 특별한 일이었다. 근대 이후 세계가 항해를 통해 일주가 가능한 공간이라는 상상이 실제로 입증된 이후에도 사람들이 지구에 대한 온전한 인식을 갖게 되기까지는 많은 시간이 필요했다. 현대에 들어서 과학적 사고가 보편화되고 우주에서 푸른 지구별을 내려다보게 된 순간, 비로써 지구에 대한 온전한 인식이 가능해졌다. 지구는 넓은 바다와 여섯 개의 대륙과 섬으로 구성된 지표면 위를 얇은 대기층이 감싸고 있는 태양계의 행성이었고, 인간이란 하나의 종을 비롯한 수많은 생물 종들이 살아있는 생태계 공간으로 거대한 우주 속에 홀로 존재하고 있었던 것이다.

근대 이후 과학기술과 결합된 산업 활동은 숲과 강을 인위적으로 변형시키거나 특정 생물 종을 멸종시키는 등 지구 생태계에 국지적인 영향을 미치기 시작했다. 이후 산업혁명을 통해 화석연료에서 거대한 에너지를 사용할 수 있게 되면서부터 사람들의 산업 활동은 지구 전체의 대기, 해양, 토양, 하천을 오염시키고 수많은 생물 종을 멸종의 위기에 처하게 하는 상황에 이르게 되었다. 지구 생태계의 일부인 사람들이 지구 생태계 전체의 위기를 만들어낸 것이다. 특히 수만 년 동안 지속되어 온 홀로세 기후를 빠른 속도로 변화시키는 최근의 기후 변화는 지구 생태계의 위기를 넘어 지구 생태계 붕괴의 가능성을 알리고 있다. 지금과 같은 추세로 기후변화가 지속된다면 지구의 평균기온이 산업화 이전보다 6도씨 이상이 올라 지구 생명체의 90% 이상이 멸종하는 대멸종의 상황이 아주 높은 확률로 예측되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통상적으로 이야기하는 환경위기란 단어는 지구 생태계의 위기의 인간중심적인 표현이다. 환경이란 지구 생태계에서 인간을 중심에 두고 나머지를 주변으로 바라보는 인식이 반영된 표현이다. 하지만 지구 생태계에서 인간 종만 외따로 존재하는 것도, 더군다나 인간 종을 위해 지구 생태계가 존재하는 것도 아니다. 지구 생태계에서 인간 종은 다른 종과 마찬가지로 지구 생태계의 부분일 뿐이라는 것이 현대의 생태학적 사고이다. 하지만 인간 종은 다른 종들에 비해 지구 생태계 전체를 변화시킬 정도의 강한 힘을 가지고 있다는 점에서 다른 종들과 다른 특별함을 가지고 있다. 사실 지구 생태계의 위기는 인간 종의 이 특별한 힘에서 비롯된 것이다.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특별한 힘을 지구 생태계에 부정적인 형태로 작용함으로써 지구 생태계에 위기가 발생하게 된 것이다.

근대 이후 사람들은 대기, 토양, 해양, 하천, 생물 종 등 지구 생태계를 산업을 위한 자원이자 경제적 이익을 극대화하기 위한 대상으로 여겨왔다. 지구 생태계는 인간 사회의 성장을 위한 목적으로서 존재할 뿐이었다. 근대 서구 사회가 지배적 관계를 통해 노예, 여성, 농민, 노동자들의 노동력을 약탈했던 것처럼, 지구 생태계 역시 사람들의 산업과 경제를 성장시키기 위한 도구로 약탈되었다. 현대에 이르러 사회적 평등의 확대로 사람들 사이의 지배적 관계는 표면적으로나마 사라지게 되었지만, 사람들의 지구 생태계에 대한 지배적 태도와 약탈 행위는 전혀 변하지 않고 오히려 강화되고 확대되어왔다. 바로 이러한 사람들의 지구 생태계에 대한 태도와 행위가 지금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환경위기, 지구 생태계 위기의 본질인 것이다.

성서는 지구 생태계를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계라고 이야기하고 있다. 창조세계는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생명이 번성하도록 만들어진 공간이다. 창조세계 안에서 창조된 모든 생명들은 하나님의 은총을 입게 되며 창조세계의 구성원으로 살아간다. 그리고 성서는 하나님의 창조세계에서 사람에게 피조물의 일원으로 살아가는 것과 동시에 피조물들을 다스리는 사명이 부여되어 있음(창 1:28)을 이야기한다. 사람들 역시 창조세계의 구성원으로써 살아가되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모든 생명들이 번성하도록 돌보는 존재라는 것이다. 하지만 성서는 사람들이 하나님께서 부여하신 사명을 잊고 탐욕에 사로잡혀 살아가는 죄악에 빠진 존재가 되고 말았음을 이야기한다.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죄악에 빠진 사람들을 심판하게 되고 창조세계의 모든 피조물들도 사람들로 인해 죽음과 고통의 상황에 놓이게 된다.

출애굽 사건은 이러한 죄악의 상황으로부터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 다른 삶을 선택하여 정의와 평화, 창조세계의 온전성을 회복하는 이야기이다. 이집트는 기근을 피해 찾아온 사람들을 노예로 삼아 노동력을 약탈해 도시를 건설하고, 히브리 사람들의 어린아이들을 집단적으로 살해하던 죄악이 만연한 사회였다. 하나님의 경고로 발생한 열 가지의 생태적 재앙의 상황 속에서도 이집트 왕은 히브리 사람들을 향한 지배와 약탈을 끝까지 포기하려하지 않았을 정도였다. 이집트의 지배로부터 탈출했던 히브리 사람들은 이제 광야에서 다른 존재를 지배하고 약탈하는 삶이 아닌 하나님이 원하시는 언약의 삶을 추구한다. 약속의 땅 가나안으로 들어가기 전 광야의 40년은 히브리 사람들에게 지배와 약탈이 아닌 하나님의 은총에 의지하는 삶을 회복하는 시간이었고, 동시에 돌봄의 공동체를 회복하는 과정이었다.

한국 사회는 그동안 ‘기후악당국가’라는 비난을 받을 정도로 기후위기 대응에 무책임한 태도를 보여 왔다. 하지만 이제 지구 곳곳에서 발생하는 기상이변과 대규모 화재와 같은 기후재난들을 통해 기후위기는 먼 미래에 경험될 사건이 아닌 지금 현실의 시급하고 중요한 과제란 것을 깨닫게 되었다. 때문에 지금 우리 정부와 국회, 시민사회, 그리고 기업에서도 과학자들의 권고대로 2050년까지 탄소배출을 줄여 탄소중립을 이루기 위한 온실가스저감대책을 만들기 위해 애를 쓰고 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한국교회에서는 아직까지도 기후위기를 교회가 대응해야 할 중요한 선교적 과제로 인식하지 못하고 있는 것으로 보이며, 위기에 처한 하나님의 창조세계를 지키고 돌보는 일에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고 있다. 이제 다시 한 번 출애굽의 길에 나서야 한다.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기후적 재앙은 나날이 더욱 심각한 형태로 다가오고 있는데, 죄악의 문명을 벗어나는 길을 이끌어야 할 한국교회의 준비가 아직 부족하다.

필자가 사역하고 있는 기독교환경운동연대는 한국교회가 환경문제에 대응하기 위해 1982년에 설립한 ‘공해문제연구소’로 시작된 한국사회 최초의 환경운동단체이다. 기독교환경운동연대에서는 오래 전부터 기후위기가 우리 사회와 한국 교회의 가장 중요한 과제가 될 것이라고 예상하고 한국교회가 기후위기의 상황 속에서 어떤 일들을 해야 할 것인가에 대한 연구와 교육을 지속해왔다. 지난 2020년에 기독교환경운동연대에서는 성서의 출애굽 사건이 기후 위기에 한국 교회가 어떻게 대응해야 할 것인가를 보여주는 ‘오래된 미래’라고 생각하고, 기후위기 시대에 한국 교회가 한국 사회의 생태적 전환, 생태적 출애굽을 준비하고 이끌어 나가기 위한 방안을 제시한 바 있다. ‘그린 엑소더스(Green Exodus) 프로젝트’라는 이름으로 발표된 한국교회 기후위기 대응방안은 세 가지 전환의 방향 속에서 향후 10년 동안 한국교회가 실천해나가야 할 과제들을 설정하고 있다.

그린 엑소더스의 첫 번째 방향은 ‘회색에서 녹색으로’의 전환으로, 한국교회를 기후녹색교회로 만들어 창조세계를 돌보는 일에 앞장서도록 하는 일이다.
기독교환경운동연대는 지난 1984년부터 환경의 날을 전후한 6월 첫째 주일을 ‘환경주일’로 정하고 예배 자료집을 만들고 연합예배를 드리면서 한국교회 안에서 환경주일 성수를 확대해 나가는 운동을 지속해왔다. 아울러 창조세계의 온전성을 지키는 일을 주요 선교적 과제로 삼고 있는 교회들을 ‘녹색교회’로 선정하고 ‘녹색교회 네트워크’를 조직하여 환경선교의 활성화에 힘을 쏟아왔다. 하지만 이제 기후위기 비상사태 속에서는 녹색교회뿐만 아니라 기후위기 대응의 중요함과 긴박함을 인식하고 행동하고자하는 ‘기후교회’를 폭넓게 조직하고, 9월 25일 ‘세계 기후행동의 날’을 전후로 ‘기후행동주일’을 정하여 한국교회가 기후위기 대응에 한 마음으로 기도하며 협력하는 일을 준비하고 있다.

아울러 이러한 일들이 일부 교회들만의 관심이 아니라 한국교회 전반으로 확산되고, 한국교회가 기후위기 대응에 공동으로 대응하기 위해서는 교단 총회와 연합기구의 차원에서 기후위기 비상사태를 선언하고 기후위기 대응을 위한 전담기구와 담당 위원회의 조직과 활동이 필요하다. 다행이 지난 3월에는 한국교회의 기후위기 대응을 위해 ‘기후위기 기독교 비상행동’이 조직되어 출범식을 가졌었고, 지난 5월에는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에 속한 9개 교단과 연합기관의 대표들이 한 자리에 모여 ‘한국교회 2050 탄소중립 선언’을 하고, 이후 실천과제들을 이행해 나갈 것을 결의하였다. 이러한 선언과 실천들이 모든 한국 교회로 확산된다면, 한국 교회가 한국 사회의 기후위기 대응에 적극인 목소리를 낼 수 있게 될 것이다. 아울러 우리 사회의 생태적 회심을 통한 생태적 전환을 이루는 일을 한국교회가 이끌어 나갈 수 있을 것이다.

그린 엑소더스의 두 번째 방향은 ‘탐욕에서 은총으로’의 전환으로, 기후위기를 발생시킨 경제 시스템을 창조세계에 임하는 은총에 의지하는 생명의 경제로 바꾸어 나가는 일이다.
생태학을 뜻하는 에콜로지(Ecology)와 경제를 뜻하는 에코노미(Economy)는 모두 집을 의미하는 헬라어 ‘오이코스’(oikos)에서 비롯된 영어 단어이다. 오이코스란 단순히 건물로서의 집이 아니라 집과 그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 가축들을 모두 포함한 생태계로서의 집을 뜻하는 단어이다. 생태와 경제가 집이라는 한 단어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은 생태와 경제는 항상 함께 고려해야하는 일들로, 지구 생태계를 위기로 몰아넣는 경제란 성립할 수 없음을 뜻한다. 하지만 근대 이후 경제는 지구 생태계를 약탈하는 방식으로 작동하여왔고, 이제 더 이상 약탈의 경제가 지속가능하지 않다는 것이 기후 위기로 여실히 증명되었다. 이제 밑돌 빼서 윗돌 고이는 식의 자신의 집을 파괴하면서 집을 성장시키는 어리석기 짝이 없는 일을 멈추어야 한다. 지금은 타오르는 불을 끄고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공동의 집을 온전한 모습으로 회복시킬 때이다.

기후위기 대응의 핵심은 에너지 전환이다. 그동안 약탈의 방식으로 작동해온 경제는 지구 깊은 곳에서 화석연료를 뽑아내어 지구 생태계가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의 온실가스를 배출하여왔다. 하지만 이제 온실가스 배출이 없는 재생에너지의 생산이 급속도로 확대되고 있으며, 이에 따른 송배전 시스템과 에너지 사용의 패턴 등 에너지 전환이 빠른 속도로 전개되고 있다. 창조세계 어디서나 존재하는 햇빛, 바람, 물에서 에너지를 얻는 재생에너지는 창조의 순간부터 지금까지 하나님의 은총으로 주어지고 있는 에너지이다. 출애굽 이후 히브리 사람들이 이집트의 고기와 빵 대신 광야의 하나님께서 내려주신 만나와 메추라기로 살아갔듯이, 이제 생태적 출애굽의 시대에는 하나님의 은총으로 주어지는 재생에너지를 기반으로 지구 생태계를 온전한 형태로 유지하는 경제 시스템을 설계해야 한다.

이미 세계 교회에서는 오래 전부터 정의와 평화, 창조세계의 온전성(Justice, Peace. Integrity of Creations)을 위한 ‘생명의 경제’에 대한 다양한 논의와 실험이 진행되고 있다. 공동의 식사와 공동소유를 지향하고 공동체 안의 어려운 이들을 돌보았던 초대교회의 전통을 이어가고 있는 교회는, 이미 공동체의 가치를 우선하는 사회적 경제의 정신이 이미 내면화되어 있다. 최근 우리 사회에서도 이슈가 되고 있는 ‘기본소득’, ‘사회적 경제’를 포함한 대안경제의 다양한 논의들은 생태적 출애굽을 준비하는 한국 교회의 토양 속에서 생명의 경제라는 열매를 맺게 하는 새로운 씨앗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아울러서 기독교환경운동연대에서는 기후위기로 인한 어려움을 겪고 있는 기후난민을 돕는 ‘삭개오 기금’ 운영을 제안하고 있다. ‘삭개오 기금’은 세리였던 삭개오가 예수님을 만나고 난 후 자신이 이웃의 것을 속여 빼앗은 일이 있으면 네 배로 갚겠다고 고백을 했던 것(눅 19:8)처럼, 우리도 그동안의 잘못된 탄소배출로 우리의 이웃들이 기후재난의 어려움을 겪고 있음을 기억하고 탄소배출에 대한 자발적 ‘탄소헌금’을 모아 기후난민을 돕자는 제안이다. 한국교회가 탄소헌금으로 조성한 삭개오 기금은 기근, 홍수, 침수, 화재, 이상기온 등 기후재난으로 삶의 터전을 잃은 기후난민들을 위한 긴급구호와 이들이 새로운 삶의 터전을 확보하는 일에 사용하여 지구적 차원의 생태적 정의를 회복하는 일에 사용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린 엑소더스의 세 번째 방향은 ‘절망에서 희망으로’의 전환으로, 한국교회가 두려움과 무기력에서 벗어나 창조세계를 온전한 모습으로 회복하는 행동에 나서는 일이다.
지금은 기후위기 비상상황이다. 지금 당장 온실가스를 줄이는 일에 우리가 가지고 있는 모든 힘과 지혜를 모아야 한다. 아직 기회가 있을 때 우리가 전환을 위한 적극적인 행동에 나서지 않는다면 나중에는 전환의 기회조차 주어지지 않을 것이다. 기독교환경운동연대에서는 한국교회의 탄소중립을 위한 공동 캠페인으로 식, 의, 주, 교통, 에너지, 문화, 경제의 삶의 7가지 영역에서 탄소배출을 줄여나가는 실천 프로그램인 ‘생명의 길 초록 발자국 캠페인’을 진행해 나가고 있다. 개인과 교회, 지역사회에서 탄소배출을 최소화하는 ‘기후 미식’(Climate gourmet), ‘슬로우 패션’(Slow fashion), ‘미니멀 라이프’(Minimal life), ‘녹색 교통’(Green transport), ‘그린 에너지’(Green energy), ‘녹색 서재’(green library), ‘생명의 경제’(economy of life) 실천을 통해 우리의 삶이 기후위기를 넘어서서 생명의 길을 향한 초록 발자국이 되도록 만들어가는 캠페인이다. 기독교환경운동연대에서는 이 캠페인에 참여하는 교회에 관련 자료집과 영상안내 자료를 제작하여 보급을 하고 있다.

또한 기독교환경운동연대에서는 온실가스 발생을 저감하는 일과 함께 이미 대기 중에 배출된 온실가스를 흡수하고 저장하기 위한 방안으로 지구 생태계의 회복을 도모하는 숲 조성 사업을 계획하고 있다. 이미 기독교환경운동연대에는 지난 10여 년 동안 급속도로 사막화가 진행되고 있는 기후재난국가 몽골에 ‘은총의 숲’을 조성하면서 지역 주민들과 공동체를 돕는 일을 진행해왔다. 최근에는 몽골 은총의 숲에 생태교육센터를 건립하여 지역 주민과 학생들에게 생태임농업과 생태환경 교육을 진행하려 하고 있다. 이러한 일에 한국교회가 힘을 모을 수 있다면 세계 곳곳에 온실가스를 흡수하는 크고 넓은 숲을 조성할 수 있을 것이다. 이제는 한국교회가 기후위기에 대응을 위한 지구 생태계를 회복하는 생태환경선교로 선교 패러다임의 확장을 모색할 때이다.

교회는 지난 2,000여 년간 예수 그리스도가 보여주신 모습을 따라 정의와 평화와 생명의 공동체로 존재해왔다. 지금 우리에게 닥친 기후위기는 교회의 존재 기반인 창조세계, 지구 생태계 자체를 무너뜨리려 하고 있다. 때문에 기후위기는 교회의 위기이자 신앙의 위기이다. 그러나 아직도 우리는 우리의 집이 불타고 있는 위기 가운데도 한국교회는 너무나 무반응이다. 솔직히 필자는 기후위기 상황이 이 정도에 이르렀으면 교단과 교회연합기구마다 기후위기 대응 특별 위원회가 조직되고, 기독교환경운동연대에 기후위기 대응 사업을 위한 협력 요청이 넘쳐날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아직까지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고 있다. 위기를 위기로 인식하지 못하는 게 정말 위기가 아닐까.

이제 한국 교회는 기후위기에 대응하는 삶을 만들어감과 동시에 지구적인 생태정의, 기후정의를 이루는 일에 더욱 큰 역할을 감당하게 되기를 바란다. 기후위기는 우리가 하나님의 은총을 거부하고 탐욕에 이끌린 삶을 살아온 결과이다. 그리고 교회가 그러한 결과가 일어나기까지 세상이 빛과 소금의 역할을 제대로 감당하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이제 책임을 질 시간이다. 기후위기 시대의 한국 교회가 녹색교회가 되어 기후난민과 기후약자들을 돌보며 창조세계의 온전성을 회복하는 책임을 감당할 때이다. 지금 이 순간에도 하나님의 은총은 변함이 없다. 우리가 은총에 의지하는 삶으로 나아갈 때 언제든지 하나님께서 풍성한 생명을 이루시는 놀라운 역사를 바라보게 될 것이다. 기후위기 시대, 한국교회가 생태적 출애굽의 공동체가 되기를, 그리고 조금 더 서두르게 되기를 간절히 소망한다.

(이 글은 목회와 신학 2021년 9월호에 기고한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