녹색신앙 이야기

그리스도인이 '생태학'을 배워야 하는 이유

작성일
2021-12-23 13: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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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여인이 있었다. 단풍나무 씨앗처럼 가을바람을 타고 빙글빙글 돌면서 하늘 세상의 구멍에서 떨어진 '하늘 여인'이었다. 기러기들이 날아올라 그를 받아 주었고, 그는 거북의 등딱지에 내려앉았다. 그를 위한 보금자리(땅)이 필요하다고 여긴 동물들은 방안을 의논했다. 그가 머물 땅을 만들 만한 진흙이 깊은 물속에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지만, 물속 깊은 곳의 수압과 어둠은 수달·비버·철갑상어처럼 물속을 제집처럼 드나드는 동물들에게도 버거웠다. 진흙을 가지러 떠났던 동물 중 되돌아오지 못한 이들도 있었다.

그러던 중 모여 있던 동물 가운데 가장 꼬마였던 사향뒤쥐가 헤엄을 쳐서 깊은 물속의 진흙을 입에 물어 가져왔다. 자신의 일을 마친 사향뒤쥐는 숨을 거뒀지만, 그가 가져온 한 줌의 진흙은 거북의 등에 발라져 점점 넓어지더니 대지(아메리카대륙)로 변했다. '하늘 여인'은 하늘의 씨앗 꾸러미를 가지고 있었고, 그것을 새로운 대지에 뿌려 정성스럽게 돌보며 세상이 초록으로 물들게 했다.

아메리카 토착민 생태학자 로빈 월 키머러의 책 <향모를 땋으며>(에이도스)의 첫머리에 나오는 하늘 여인에 대한 토착민 설화다. 이 이야기는 아메리카 토착민들이 모든 생물은 상호의존관계 속에 있다고 생각했고, 서로를 위한 헌신과 사랑이 그러한 상호의존관계를 가능하게 했다는 믿음으로 세상을 바라봤다는 것을 알려 준다. 세상엔 과학적 사실보다 중요한 믿음이 있다. 믿음이 세상을 바꾸고 새롭게 창조하는 원동력이 되니 말이다.

실낙원
성서는 우리가 우리의 죄 때문에 낙원을 잃어버렸다고 말한다. 생명의 동산, 애쓰거나 땀 흘려 경작하지 않아도 먹을거리 걱정할 필요 없는 곳, 서로를 잡아먹지 않아도 나무 열매만으로 충분히 배불렀던 시절이 있었다고 전한다. 성서가 아름다운 하나님의 동산 에덴을 그려 낸 목적은 과학적 사실을 알려 주는 데 있지 않다. 성서의 창조 이야기가 우리에게 들려주는 것은 하나님께서 창조 세계를 더할 나위 없이 완전하게 창조하셨다는 고백과 더불어, 우리가 낙원을 잃어버린 이유가 바로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 고백과 믿음은 우리를 잃어버린 낙원을 그리워하는 존재로 만들었다.

과학자들에 따르면, 지구는 지금까지 이미 다섯 차례의 대멸종을 겪은 곡절 많은 별이다. 때로는 인류의 생존 역시 위기에 직면한 적이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인류는 이곳에서 이른바 '문명'을 발전시킬 만큼 풍족한 삶을 누렸다. 그 기반은 친절하디 친절한 지구 생태계 그 자체였고, 그것을 지탱하던 힘은 생명력 넘치는 대지와 온화한 기후였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그것을 '은총'이라고 불러 왔다.

하지만 인류가 만든 문명이 이제는 인류 자체를 멸종으로 이끄는 징후가 일어나고 있다. 인류의 오랜 삶의 터전인 숲을 파괴하고, 화석연료를 태워 온실가스를 배출하고, '개발'이라는 이름으로 곳곳을 파헤치고, 온갖 오염 물질을 투기하고, 다른 생명들을 학살하는 일이 우리의 '문명'에서 일어나고 있다. 그 결과 인류는 스스로의 죄악이 불러온 기후 위기와 오염, 파괴의 후과를 겪고 있다. 실낙원 사건은 과거에 일어난 한 사건이 아니라 지금도 끊임없이 일어나고 있는 사건이다.

고향을 잃고 방황하는 사람들
한반도 면적의 약 7배에 달하는 몽골 전역에서 사막화가 이뤄지고 있다. 이에 따라 유목민들이 기존의 삶의 방식을 유지하는 것도 점점 어려워지고 있다. 가장 큰 원인은 기후변화다. 몽골은 건조 지대이지만, 숲이 있고 강물이 흐르는 덕에 여러 식물이 자랄 수 있는 환경이 유지되고 있었다. 이와 같은 생태계의 순환을 바탕으로 유목이 가능했다는 말이다. 하지만 기후변화는 생명의 순환을 깨뜨렸고, 회복력을 잃은 땅은 사막으로 변해 갔다.

비가 내려야 할 때는 내리지 않았고, 비가 오지 않던 시기에 홍수가 났다. 강물은 메말랐고 땅은 더 이상 풀을 자라게 하지 못했다. 변해 버린 기후 탓에 나무들이 병들어 떼죽음을 당하는 경우도 있었다. 땅속 깊은 곳에 얼어 있는 상태로 존재하던 물이 녹아 지표에서 증발해 버린 탓에, 땅 곳곳에서 심각한 지반침하가 일어나기도 했다. 수천 개의 강과 하천과 실개천이 메말라 버렸다. 땅속 염분이 올라와 지표면에 있는 미생물들을 죽이고 땅이 윤기를 잃어 가기도 했다.

일련의 사건은 유목이 불가능한 환경을 만들어 냈다. 너른 땅을 옮겨 다니며 가축에게 풀을 먹이고, 이듬해 다시 돌아와 그 자리에 다시 돋아난 풀을 먹이는 방식으로 유목 생활을 하던 이들에게 하천의 고갈과 사막의 확장은, 사실상 지금의 삶의 방식이 더 이상 유효하지 않다는 말이나 다름없었다. 이들은 난민이 되어 도시 빈민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몽골 울란바토르 주변을 둘러싼 판자촌에는 유목이라는 일상을 잃어버린 난민들이 거주하고 있다.


수많은 난민을 발생시킨 시리아의 10년 내전은, 가뭄으로 황폐한 농토, 도시로 밀려든 농민들, 이에 더한 러시아의 밀 수출 중단(이 역시 가뭄이 원인이었다)이 불러온 식량 가격 상승이 주요 원인이었다. 시리아뿐만이 아니다. 노르웨이난민위원회(NRC·Norwegian Refugee Council)는 미군이 철수한 아프가니스탄의 상황을 두고, "아프간은 미군 철수 이전에 이미 가뭄과 코로나에 무릎을 꿇은 상태였다"고 지적했다. 탈레반은 거의 모든 지역에 무혈입성했다. 난민이은 이미 350만 명에 이르렀고, 1800만 명이 인도적 지원을 필요로 하는 상황에서 정부는 무의미했다.

해수면 상승으로 바닷속으로 가라앉을 위기에 처한 투발루와 같은 남태평양 섬들도 있다. 인도네시아의 자카르타도 같은 운명에 처했다. 인도네시아는 자카르타에서 동칼리만탄 지역으로 수도를 이전하기로 했다. 지하수 과다 사용으로 지반침하가 일어난 것이 주요 원인이긴 하지만, 해수면 상승 역시 한몫했다. 자카르타는 도시의 절반이 해수면보다 낮은 고도에 위치하는 상황에 이르게 됐다. 이처럼 대규모의 기후 난민 발생은 단지 먼 미래의 이야기가 아니라 오늘날 진행되고 있는 현실이다.

쓸모없는 공학적 해결 방식
기후 위기 해결을 가능하게 할 '신기술'이라고 말하는 것들이 등장하고 있다. 탄소 포집, 활용, 저장(CCUS, Carbon Capture, Utilization and Storage)이나, 소형 모듈 원전(SMR, small modular reactor)이 가장 많이 거론되는 기술이다. 그 외에도 다양한 방식의 기술이 기후 위기를 해결 할 수 있다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걸음마도 떼지 못한 이 기술이 기후 위기의 해결책이 될 것이라고 믿는 순진한 믿음은 오히려 문제 해결을 불가능하게 만들 것이다.

이런 공학적 접근을 하는 사람들은 순진하게도 '탄소 중립' 그 자체가 목표라고 착각하곤 한다. 그러나 탄소 배출량을 줄이는 것, 다시 말해 '탄소 중립'은 기후 위기 해결을 위한 과정일 뿐 궁극적인 목표가 아니다. 이 사실을 잊어버리면 결국 CCUS·SMR같이 본말이 전도된 해결책을 가져오기 마련이다. 우리가 꿈꿔야 할 목표는, 기후 위기가 전 지구 생명 공동체를 파괴해 멸종시키고 우리마저 그 멸종의 대열에 합류하는 비극을 막는 것이다. 우리에겐 공학이 아니라 '생태학'이 필요하다.

은총의 숲
기독교환경운동연대는 2009년부터 몽골에 '은총의 숲'이라는 이름의 숲을 조성해 왔다. 처음엔 사막화되는 몽골 지역에서 날아오는 황사 때문에 시작한 사업이었으나 시간이 지나며 몽골에 대한 이해가 깊어졌고, 자연스럽게 사업의 이유도 변해 갔다. 사막화와 기후 위기가 어떻게 얽혀 있는지, 변해 가는 몽골의 생태계로 얼마나 많은 이가 도시 주변 슬럼가를 형성하고 기후 난민이 되는지 깨달았기 때문이다.

몽골 은총의 숲이 조성된 후 은총의 숲은 8월이 되면 곳곳에 야생화가 피는 곳이 됐다. 2009년까지만 해도 그 지역은 꽃과 나무가 만발한 광경은 상상도 하기 힘든 황무지 같은 곳이었다. 그러나 나무를 심기 시작한 지 10년이 지난 지금 나무들 사이로 풀이 자라고, 야생화가 피어나는 공간이 됐다. 이런 극적인 변화는 다른 변화로 이어졌다. 야생동물들이 숲으로 찾아오기 시작한 것이다. 새가 날아들었고, 노루가 방문했다. 물론 유목민들이 키우는 소와 양이 숲으로 들어오려고 하는 일도 부지기수였다. 이런 방문이 아직은 어린 숲을 보호하기 위해 둘레에 울타리를 치고 동물들이 넘을 수 없는 웅덩이를 파게 만든 이유가 되기도 했으나, 숲은 장 지오노의 <나무를 심은 사람>(두레)에서처럼 천천히 여러 생명을 위한 은총을 나누는 공간이 돼 가고 있다.

생태적 순환, 공동체의 회복
'토지 황폐화 중립(LDN·Land Degradation Neutrality)'이라는 개념이 있다. 유엔사막화방지협약(UNCCD), 유엔기후변화협약(UNFCCC), 기후변화에관한정부간협의체(IPCC)가 2019년에 채택한 토지 특별 보고서에서 강조된 개념이다. 몽골 은총의 숲 추진위원으로 함께하는 임업연구사 박고은 박사(국립산림과학원)는 이 개념을 "황폐해진 토지를 조림 등을 통해 복원하고, 전 세계 토지의 추가 황폐화를 막아 전 세계 토지 황폐화 증가를 멈추게 하자는 취지에서 나온 개념"이라고 설명했다. 사막화를 비롯해 토양의 황폐화 현상은 전 세계적으로 증가 추세에 있다. 기후 위기는 토지 황폐화를 가속화한다. 하지만 숲을 만드는 일을 통해 이 황폐화를 극복할 수 있는 단초가 생긴다.

숲은 단순히 황폐화를 막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언제나 그렇듯 물길을 만들고, 땅을 비옥하게 하고, 곤충과 새들과 동물들의 먹이를 제공할 것이다. 그리고 사람도 그 곁에서 함께 하늘의 은총과 땅의 축복을 함께 누리게 될 것이다. 나무가 정착하고 숲이 제 기능을 하기 시작한다면 이 모든 사건은 현실이 된다. 이건 숲만이 아니다. 해안가 맹그로브 숲에겐 맹그로브의 축복이 있고, 갯벌에는 갯벌의 은총이 숨겨져 있다. 강물과 냇물이 흐르는 곳마다 하나님은 복을 예비하고 계신다. 인류는 언제나 그 은총 안에서 살아왔다.


거기에서 그치지 않는다. 생태적 순환을 회복한 공간은 공동체도 회복시킨다. 새만금 갯벌이 방조제에 막혔을 때 고통받은 것은 꽃게·백합·맛조개뿐만이 아니었다. 그곳에서 살아가던 어민들도 생계의 고통에 더불어 마을 공동체가 순식간에 전쟁터로 변하는 고통을 겪었다. 할멍물이 솟아나던 제주 강정의 구럼비바위가 깨어지는 과정에서 강정마을 공동체 역시 마찬가지의 고통을 겪었다. 도시에선 경험하기 힘든 일이지만, 마을은 결국 땅과 그곳에 사는 생명들이 이어진 운명 공동체이므로, 생태계의 파괴는 곧 마을의 파괴를 불러올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우리는 수차례의 경험을 통해 알고 있다.

그렇기에 반대로 회복된 생태적 공간은 새로운 공동체를 창조하는 곳이 되기 마련이다. 몽골 은총의 숲은 아직 어린 숲에 불과하지만 새로운 공동체의 가능성을 보여 주고 있다. 선교신학자 임희모 교수(한일장신대 명예)는 은총의 숲 사업을 일컬어 '생태 선교'라고 했다. 하나님의 선교(Missio Dei)가 인간의 삶뿐 아니라 생태계에까지 확장된 새로운 선교라는 것이다. 그린 엑소더스 프로젝트의 마지막 "생태 공동체 회복"은 사실 이런 믿음과 확신 안에서 계획됐다.

창조주의 숨결이 우리를 살아 숨 쉬게 하듯, 교회와 그리스도인은 가는 곳마다 하나님의 숨결처럼 세상을 살려야 한다. 그것을 위해 교회와 그리스도인은 생태학을 배워야 하고, 파괴된 생태 공동체에 대한 거룩한 분노와 아픔을 가져야 한다. 그것이 기후 위기 시대 그리스도교가 맡은 사명이자 선교다. 이제는 은총으로 돌이키는 삶이 아니고서는 우리가 절망을 이겨 낼 어떤 방법도 없다. 생태 위기가 우리의 죄악으로 말미암은 것이라면, 그 위기를 극복하는 것 역시 죄악으로부터 회심해 녹색 은총을 회복하는 길뿐이다.

[출처: 뉴스앤조이] 그리스도인이 '생태학'을 배워야 하는 이유(2021.12.23) - 임준형 간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