녹색신앙 이야기

탈핵 에너지 전환과 자립사회를 향하여 - 왜 이집트 탈출에 40년이 필요했을까?

작성일
2020-02-20 1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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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핵 에너지 전환과 자립사회를 향하여 - 왜 이집트 탈출에 40년이 필요했을까?

이진형 (기독교환경운동연대 사무총장)


이제 한 걸음을 내디뎠을 뿐인데

팔레스타인 지역에 몰아닥친 기근으로 기후난민이 되어버린 야곱의 가족들은 아브라함이 하나님과 축복의 약속을 맺었던 가나안 땅을 떠나 기후 위기를 대비했던 이집트로 집단 이주를 하게 되었다. 그리고 430년이 훌쩍 지나버렸다. 우여곡절 끝에 노예생활을 하던 히브리 사람들은 이집트를 탈출하는 여정에 나섰다. 그런데 한 걸음을 내딛자마자 이집트의 군대가 출동한다. 전차와 창검으로 무장한 정예 부대다. 꼼짝 없이 몰살당하거나 다시 이집트로 끌려와 노예가 되어야 할 판이다.

1977년부터 가동되었던 고리 1호기가 40년 만에 가동이 중단되었습니다. 문재인 대통령은 2017년 6월 19일 부산 고리핵발전소 앞에서 열린 고리 1호기 영구정지 선포식에서 “원전 정책을 전면적으로 재검토해 원전 중심의 발전정책을 폐기하고 탈핵시대로 가겠다. 새 정부는 탈원전과 함께 미래에너지 시대를 열겠다.”고 말했습니다. 한국사회의 수십 년 간의 탈핵 주민운동과 후쿠시마 핵사고로 힘을 모은 탈핵 시민운동의 작은 결실이었습니다. 촛불로 탄생했다고 스스로를 규정한 정부의 확고한 탈핵과 에너지전환의 의지가 제법 단단해 보였습니다. 이른바 ‘탈원전 신재생에너지’ 정책은 그렇게 첫 발을 내디뎠습니다.
하지만 공사가 중단되었던 신고리 5,6호기가 다시 건설로 돌아섰습니다. 전열을 가다듬은 친핵 진영은 시도, 때도, 맥락도 없는 ‘탈원전 정책 탓하기’에 나섰습니다. 언론, 학계, 업계, 정계가 한 목소리를 내며 탈핵 정책을 압박했습니다. 급기야 유력 야당은 ‘탈원전 정책 되돌리기’를 이번 총선 1호 공약으로 내걸었습니다. 원자력안전위원회와 한국수력원자력은 사용후핵연료 관리정책 재검토위원회를 배제한 채 월성 핵발전소 부지에 사용후핵연료 조밀건식저장시설 증설을 막무가내로 추진하고 있습니다. 심지어 정부 내의 과학정보통신부 차관이 나서서 ‘스마트 원자로’라는 이름의 소형핵발전소의 상용화와 수출 의지를 밝히면서 10년 전에 대국민사기극으로 판명된 ‘원자력 르네상스’를 또다시 들먹이고 있습니다.


어디로 갈 것인가

구사일생으로 이집트 탈출에는 성공을 했지만 거친 광야의 여정은 상상 이상으로 힘에 겨웠다. 정말 약속의 땅이 있기나 한 것인지, 그 땅에 들어갈 수 있는지 의심이 되었다. 소위 지도자라고 하는 이들도 확신이 없기는 마찬가지였다. 몇몇 이들에게 가나안 땅을 살펴보게 했다. 감히 넘보지 못할 땅이라는 다수의 이야기에 희망을 가지고 가나안 땅으로 가자는 소수의 이야기는 묻혀버렸다. 다시 이집트로 돌아갈 수도, 가나안 땅으로 갈 수도 없는 오도 가도 못하는 신세가 되고 만 것이다.

탈핵은 에너지전환을 이루는 일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여전히 에너지전환에 막연한 두려움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동안 핵발전으로 이루어낸 경제 성장과 풍요로운 삶이 끝날지도 모른다는 생각 때문이겠지요. 여기에 일부 언론은 탈핵에 나선 독일에서는 전력난이 발생한다더라, 탈핵으로 수십조 원의 사회적 비용이 든다더라 하는 가짜뉴스로 두려움을 부추기고 있습니다. 게다가 전문가인 척하는 사람들은 재생에너지 시설이 환경을 파괴한다, 기후위기의 대안으로 핵발전을 적극적으로 확대해야 한다는 정신 나간 소리를 천연덕스레 내뱉고 있습니다. 두려움에 사로잡혀 핵발전을 끝내지 못하는 사이, 우리는 OECD 국가들 중 재생에너지 비중에서 꼴찌에서 못 벗어나고 있습니다.
세계는 탈핵 에너지전환을 향해 거침없이 달려가고 있습니다. 2022년까지 탈핵, 2038년까지는 탈석탄 에너지전환을 추진하는 독일은 이미 전력생산에서 재생에너지의 비중이 45%를 넘어섰습니다. 독일이 탈핵 에너지전환으로 경제성장이 멈추었다거나 독일 사람들의 생활이 궁핍해졌다는 이야기를 들어본 적이 있으신가요? 오히려 문제투성이 핵발전소의 퇴출로 에너지 기업들은 공정한 경쟁을 통해 효율성을 높이고 있고, 지역분산형 재생에너지는 새로운 일자리들을 만들어내고 있습니다. 이웃나라 중국은 에너지전환에 사활을 걸었다고 할 정도로 어마어마한 투자를 하고 있고, 미국 역시 이에 질세라 에너지 기술개발에 힘을 쏟고 있습니다. 차라리 여기서 조금 더 방황할망정 다시 핵문명으로 돌아가는 길은 죽음의 길입니다. 이제 우리의 갈 길을 가야합니다.


어떻게 갈 것인가

비굴한 노예로 살았었지만 배고픔을 걱정하지는 않았다. 주인의 고기 가마 옆에서 주인이 남겨준 고기를 배불리 먹을 수도 있었으니까. 원망과 불평이 마음에 가득했다. 하지만 광야에는 만나와 메추라기가 있었다. 그 날 그 날 내려주신 만나와 메추라기를 감사히 먹으면 될 뿐이었다. 주인의 눈치를 보며 굽신거릴 필요도 없었고, 더 많이 챙기려고 경쟁할 필요도 없었다. 끝없는 욕심대로 살아가는 대신 하늘에서 주시는 것에 맞추어 살아가면 될 일이었다. 그렇게 약속의 땅은 가까워졌고 노예가 아닌, 자유인의 삶이 익숙해졌다.

정작 중요한 것은 이미 답이 분명한 ‘어디로’가 아니라 ‘어떻게’ 입니다. 지금처럼 지구의 생태적 수용성을 고려하지 않고 에너지원만을 핵이나 화석연료에서 재생에너지로 바꾸는 것이 에너지전환은 아닐 것입니다. 에너지전환은 에너지의 생산과 소비의 모든 과정이 지구 생태계 모두에게, 또한 미래세대에게 정의로운 일이어야 합니다. 이주대책을 요구하는 월성, 고리 핵발전소 인근 주민들의 두려움과 고통을 공감하신다면, 송전탑 아래에서 쇠사슬에 몸을 묶으셨던 밀양 할머니들의 눈물을 기억하신다면, 그레타 툰베리의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요?”라는 분노의 목소리에 부끄러우셨다면, 이제 정의로운 에너지전환을 위해 가장 먼저 우리의 생각과 삶을 바꾸어야 합니다.
이제 우리는 힘없는 이들의 것을 푼돈을 주고 빼앗거나 미래세대의 것을 말없이 훔쳐오는 것이 아니라, 내가 사용할 수 있는 것만큼 만을 사용해야 합니다. 우리가 사용할 수 있는 것의 한계를 먼저 정하고 그에 맞추어 살아가는 것을 생각하고 익숙해져야 합니다. 에너지뿐만이 아닙니다. 우리의 삶의 기반이 되는 음식과 물, 옷과 집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의 삶이 정의로운 전환을 이루는 것이어야 합니다. 이제 우리는 혼자 서야할 때가 되었습니다.
‘자립사회’는 YWCA 목적문에 있는 ‘정의, 평화, 창조질서의 보전이 이루어지는 세상’의 다른 이름일 것입니다. 성, 종, 세대에서 일방적인 억압과 착취가 사라진 정의롭고(Justice), 평화로우며(Peace), 창조세계의 온전함(Integrity of Creations)이 이루어진 사회를 만드는 일은 지금 이 시대에 우리에게 주어진 사명입니다. 한국 YWCA가 한국사회, 나아가 세계 모두에게 당당히 새로운 삶의 방법을 찾아가자고 이야기하게 되기를 바랍니다. 안타깝게도 이제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에너지전환의 첫 걸음은 결국 우리 모두를 구원의 길로 인도할 것입니다.

(이 글은 한국 YWCA연합회 격월간 매체 <한국YWCA> 2020년 1,2월호에 기고한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