녹색신앙 이야기
'기후 미식'과 요한복음 4:34 [기환연과 함께 걷는 초록빛 일곱 발자국] 이번 주 공동체 식사 '생명 밥상' 차려보기
작성일
2024-11-06 13:52
조회
78
'기후 미식'과 요한복음 4:34
[기환연과 함께 걷는 초록빛 일곱 발자국] 이번 주 공동체 식사 '생명 밥상' 차려보기
# 밥상에 오를 자격
친구의 집에 도착한 시간은 자정을 훌쩍 넘긴 밤이었습니다. 야심한 밤에 두런두런 이야기하다가 입이 심심해진 우리는 이내 무엇을 먹을지 고민했지요. 친구는 마침 직접 캐 온 오이가 있다며 냉장고 문을 열었습니다. 그가 웃으며 꺼내 든 오이 두 개. 하나는 보통 오이보다 약간 더 굵은 녀석, 다른 하나는 조금 더 마른 녀석이었습니다.
"이 정도만 돼도 팔 수가 없어요."
밥상에 오르기에는 전혀 문제가 없는 오이들이지만, 상품 가치를 따지자면 팔기 어렵다고 했습니다. 오전 내내 오이를 따고, 가득 쌓인 오이를 하나하나 살피며 '특', '상', '중'으로 나눕니다. 조금이라도 결격 사유가 있다면 등급은 뚝뚝 떨어집니다. 보통 오이를 떠올리면 머릿속에 그려지는 그림에서 조금이라도 엇나가는 오이들은 특에서 상으로, 상에서 중으로, 그마저도 등급을 붙일 수 없는 녀석들은 아예 논외의 대상이 되어 버린다고 합니다. 그렇게 시장에 나오지 못하고 버려지는 오이들이 못해도 10% 이상이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그렇게 자격 없는 오이들을 씹으며 밤을 보냈습니다.
# 생명 밥상 식재료 구하기
못생긴 오이만 버려질까요? 전 세계적으로 생산되는 농산물의 상당수가 품질 규격에 미치지 못해 버려진다고 합니다. 어떤 조사에 따르면 매년 25억 톤가량의 식품이 유통되지 못한 채 버려진다고 하니, 비단 못생긴 오이만의 문제는 아닙니다. '생명의 길 초록 발자국' 7주 실천 워크북의 첫걸음이 '생명 밥상 만들기'인 만큼, 이번 주는 못났다는 이유로 시장에 나오지 못한 채소들을 밥상 위에 올려 보고자 했습니다.
최근 구독하기 시작한 채소 박스 구독 서비스가 큰 도움이 됐습니다. 2주에 한 번씩 작은 박스에 못난이 채소를 담아 배송해 주는 서비스입니다. 원래라면 아깝게 버려질 채소들이 생산자 위주의 유통 구조를 통해 배송됩니다. 종이 상자에 종이 테이프, 생분해 비닐 등으로 포장된 채소들을 받아 볼 수 있습니다. 2인 가구에 적당한 분량이 담겨 오기도 하고, 매번 다른 채소들을 만날 수 있어 신이 납니다. 평소라면 굳이 사지 않았을 채소가 찾아오기도 하는데, 그럴 때면 걱정 반 설렘 반으로 함께 배송받은 레시피를 천천히 읽어 봅니다.
평소 편하게 찾던 프랜차이즈 마트나, 급한 마음에 죄책감을 안고 이용하던 새벽 배송도 멈췄습니다. 대신 용기를 내어(!) 지역 농산물을 취급하는 친환경 매장에 처음으로 가 보았습니다. '비싸지는 않을까?', '회원 가입을 무조건 해야 하는 걸까?' 같은 여러 생각이 떠올랐지만, 막상 들어가 보니 괜한 걱정이었습니다. 정직한 식재료들을 제값에 팔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대부분 국내산이었고, 어느 지역에서 생산된 채소인지도 쉽게 알 수 있었습니다. 상품의 종류도 다양했고, 1~2인 가구도 부담 없이 살 수 있는 분량의 식재료도 찾아볼 수 있었습니다. 멀리 시장에 가야만 볼 수 있을 줄 알았던 채소들을 집 근처에서도 찾아볼 수 있어 좋았습니다. 그렇게 '유기농-국내산-제철' 채소들을 살펴보다가, 정육 코너 앞에서 잠시 멈칫했습니다. 생명 밥상을 위한 12가지 수칙 중 여덟 번째가 떠올랐기 때문입니다.
"육식보다 곡식과 채소를 즐긴다."
모든 식재료는 생산, 유통되는 과정에서 탄소를 배출합니다. 그중에서도 눈에 띄게 탄소를 배출하는 것이 육류 생산 시스템입니다. 공장식으로 대량 생산되는 축산 시스템과, 그렇게 생산된 육류를 전 세계로 배송하는 유통 시스템 때문에 압도적인 양의 탄소가 배출됩니다. 결국 채식이야말로 개인과 교회 공동체가 할 수 있는 가장 빠르고 강력한 기후 위기 대응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한국에서 채식주의자, 특히 비건으로 살아가는 것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대부분의 식당에서 해산물이나 육류로 만든 육수를 기본적으로 사용하기 때문입니다. 채식 메뉴를 구비한 식당도 많지 않고, 가격이 부담되는 경우도 많습니다. 또 학교나 직장 등의 집단 문화에서 '특별한' 선택을 하는 것도 꽤나 큰 부담으로 다가오곤 합니다. 이런 상황에서 만약 교회 공동체 식사마다 생명 밥상으로서 채식 식단을 준비한다면, 교회라는 공간이 녹색 은총을 담은 동시에 모두에게 열린 공간이 되지 않을까요?
# 공동체에서 생명 밥상 차리기
생명 밥상을 어떻게 공동체에서 차릴 수 있을까요? 올해 8월 말에 진행한 2024년 기독 청년 반빈곤 연대 활동(빈활)에서 생명 밥상 차리기를 시도해 보았습니다. 빈활에 참가한 30명의 청년 중 적지 않은 인원이 채식을 지향하고 있었습니다. 참가 신청을 받는 단계부터 자신의 지향을 선택하도록 했기 때문에 쉽게 알 수 있었습니다. 아침부터 야식까지, 간식과 음료까지, 2박 3일 동안 준비한 대부분의 음식을 동물성 성분이 없는 채식으로 준비했습니다. 과자와 음료수의 성분표를 꼼꼼히 살피고, 육류 대신 사용할 수 있는 채소를 적극적으로 사용했으며, 비건 레시피로 만들어진 여러 음식으로 밥상을 차렸습니다. 프로그램 중 외부에서 식사를 해야 하는 경우에도 특별히 주문한 채식 김밥이나 채식 카레 등을 준비했습니다.
빈활에 참가한 모든 사람이 채식주의자는 아니었지만, 언제나 채식주의자들을 위한 공간을 마련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또 가능하다면 행사 또는 교회 공동체 식사 준비의 기준을 채식으로 맞추는 것을 시도해 보는 것도 큰 의미가 있다고 느꼈습니다. 한 달에 한 번씩이라도 모든 공동체 구성원에게 안전하고, 지구를 위한 밥상을 차려 보는 것은 어떨까요?
# 기후 미식: 모두에게 아름다운 식사를 위하여
미식이란 무엇이고, 미식가는 어떤 사람일까요? 미식은 단순히 맛있는 음식을 먹는 행위만을 일컫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한자어 '미식'(美食)도, 프랑스어 'Gourmet'도 요리나 음식을 대하는 태도를 담고 있습니다. 두 표현 모두 요리나 음식에 대한 깊은 이해와 감각을 바탕으로, 요리가 만들어지는 과정부터 차려지고 먹기까지의 모든 과정과 그 뒤에 있는 요리사의 노력, 그리고 요리가 가진 역사와 맥락을 존중하며 즐기는 것을 뜻합니다.
기후 미식도 마찬가지입니다. 기후 미식은 단순히 탄소 발자국을 줄인 음식을 먹는 행위만을 일컫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물론 모든 재료를 국내산, 유기농, 제철 음식, 채소들로 준비하면 좋은 일이겠지요. 하지만 그보다 더 나아가, 밥상에 차려진 음식마다 담긴 역사와 맥락을 읽어 내는 영성이 있다면 어떨까요?
지구와 비인간 동물을 착취하는 방식으로 이뤄지는 산업 구조에 대해, 인간의 힘으로는 더 이상 제어할 수 없는 시스템에 대해, 그 구조 속에서 스러져 가는 비규격-못난이들에 대해 기억하고 감각할 수 있는 태도와 영성으로 빚어지는 밥상이야말로 "그의 일을 온전히 이루는"(요 4:34) 일의 시작일 것입니다.
"주님,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우리가 당신의 은총을 잊었습니다.
우리에게 평화의 양식을 주소서.
끝없는 허기와 탐심을 제어할 영원한 양식을 주소서.
우리의 생명이 주님을 닮아 다른 이들을 살리는 생명의 양식이 되게 하옵소서.
참 양식이며 음료가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생명의 길 초록 발자국' 실천을 위한 안내_1주: 생명 밥상의 주 수록 기도문 중
김진수 / 한국기독청년협의회(EYCK) 총무, 기독교환경운동연대 집행위원
<생명의 길 초록발자국> 캠페인의 일환으로, 생태적 삶을 구체적으로 실천하며 써내려가는 에세이를 매월 2회 연재합니다. 첫 번째 연재는 "기후미식"을 주제로 기독교환경운동연대 집행위원을 맡고 계신 김진수 총무(한국기독청년협의회)님이 작성해주셨습니다.
기독교환경운동연대에서는 그리스도인들의 창조세계를 지키고 돌보는 생태적 삶을 안내하고자 한국교회 탄소중립 캠페인 <생명의 길 초록발자국>을 진행하고 있습니다. <생명의 길 초록 발자국>은 기후위기의 상황 가운데 그리스도인들의 가정과 교회, 그리고 지역사회에서, 식, 의, 주, 에너지, 교통, 문화, 경제의 7가지 영역에서 탄소배출을 줄여나가는 삶을 실천하는 캠페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