녹색신앙 이야기

인간 중심에서 벗어난 정의로운 전환

작성일
2022-09-05 14: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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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 중심에서 벗어난 정의로운 전환

 


아마도 하늘 언저리까지 올라가 버린 집값 덕분일 테지요. 요즘 도시나 시골 가릴 것 없이 전국 방방곡곡 어디에서나 아파트 건설 현장을 만날 수 있습니다. 포크레인이 땅을 파헤치기 시작하고 큰 트럭이 싣고 온 건설 자재를 타워크레인이 옮기기 시작하면 얼마 지나지 않아 뚝딱 높은 아파트가 들어섭니다. 불과 몇 해 만에 산과 들, 논과 밭이었던 땅이 커다란 아파트 단지로 바뀐 놀라운 광경 앞에서 이런저런 생각을 하게 됩니다. 사람들은 이제 새집으로 이사를 와서 편안하고 즐거운 삶을 살아갈 수 있을 테지만, 원래 이곳에서 살고 있었던 수많은 풀과 나무와 벌레와 새와 물고기와 동물들은 다들 어디로 이사 갔을까? 과연 누가 이곳에 살던 친구들에게 갑자기 “미안한데 너 좀 여기서 떠나줄 수 있냐”고 한 번이라도 물어는 봤을까? 황당하다고요?


그런데 사람들이 너 좀 떠나줄 수 있냐고 물어보도록 법으로 규정된 생물이 있습니다. 맹꽁입니다. 양서류인 맹꽁이는 국가가 지정한 멸종위기 야생생물입니다. 멸종위기 야생생물은 국가가 서식실태를 조사하고 서식지를 보호하도록 「야생생물 보호 및 관리에 관한 법률」에 규정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맹꽁이는 다행히도 멸종위기 야생생물답지 않게 우리나라 습지에서 드물지 않게 발견되는 종입니다. 지금 기후 변화로 가장 급격하게 개체가 감소하고 있는 종이 양서류인 것을 생각한다면 맹꽁이의 멸종위기 야생생물 지정은 생명 다양성의 위기에 대비한 현명한 판단입니다. 멸종위기종인 맹꽁이가 살지 못하는 곳이라면 다른 온도 변화와 강수량에 민감한 생물들도 살 수 없는 곳입니다. 그래서 맹꽁이는 기후위기 시대를 살아가는 한반도 멸종위기 야생생물의 지표종인 셈이지요.


전해 들은 이야기로는 요즘 아파트 건설 현장에서 가장 큰 골칫거리를 맹꽁이라고 이야기한답니다. 아파트 건설이 예정된 곳에서 맹꽁이 울음소리가 들리면, 「야생생물 보호 및 관리에 관한 법률」에 따라 다시 환경영향평가를 받아야 하고, 맹꽁이 서식에 관한 실태조사를 해야 하고, 서식지 보존 혹은 이전 대책을 세우느라 설계 변경 비용과 공사 기간이 늘어나 큰 손해가 발생한다는 겁니다. 그래서 못된 마음을 먹은 사람들은 아파트 건설 예정지에서 맹꽁이의 발견을 막기 위해서 미리 맹꽁이가 살고 있을 법한 습지를 흙으로 메워버리고, 심지어는 몰래 독한 화학 약품을 맹꽁이가 살고 있을 만한 곳에 뿌리기까지 한답니다. 가뜩이나 기후 변화로 고생하는 맹꽁이들에게 참 너무 심한 것 같습니다.


하지만 반대로 아파트 건설 현장에서 일하는 사람들에게는 맹꽁이가 너무 심한 골칫거리일 겁니다. 일하는 사람들한테는 맹꽁이 서식 실태조사와 서식지 이전으로 아파트 건설이 지연되어서 당장의 일거리가 사라져 생계에 어려움이 생긴다면, 아무리 멸종위기종이라 해도 맹꽁이가 예쁘게 보이지 않을 테죠. 그리고 아파트 건설 사업에 수백, 수천억 원의 수익을 목적으로 돈을 투자한 사람들에게도 맹꽁이는 투자 비용을 상승시키는 중대한 위험요소일 겁니다. 뭐 무슨 사연인지 잘은 모르겠지만 퇴직하는 청년에게 50억 원 정도는 그냥 막 챙겨주는 분들에게 쓸데없는 오지랖일 테지만요.


그래서 생각해봅니다. 먼저 맹꽁이에게도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자신의 서식지에서 살아갈 권리가 있다고 생각한다면, 과연 사람들의 아파트 건설 현장이 자신들의 서식지에 만들어지는 상황에서 맹꽁이에게 정의는 무엇일까요? 가장 먼저는 사람들이 맹꽁이의 서식지를 마음대로 파괴하지 않는 것일 겁니다. 사람들이 아파트를 지어 사는 것은 좋은데 왜 하필 자신들이 대대로 살아온 서식지에 짓는 거냐, 맹꽁이가 살지 않는 땅도 많고 많은데. 나아가 맹꽁이는 이런 일은 애당초 사람들이 자신의 가치를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에 발생한 것이니, 사람들이 맹꽁이의 생태적, 역사적, 문화적, 생물학적 가치를 이해하고 맹꽁이의 권리를 존중하는 것이 정의라고 이야기할 겁니다. 그리고 맹꽁이들이 백 번 천 번 양보해서 자신들의 서식지 근처에 아파트를 짓더라도 사람들이 자신의 서식지를 지켜주도록 보호 구역과 장치를 철저히 마련하는 것이 맹꽁이의 정의임을 이야기할 겁니다.


무슨 맹꽁이 같은 이야기냐고 하시겠지만, 결국 우리가 ‘정의로운 전환’을 이야기한다면 그 정의에는 생태적 정의가 함께해야 온전한 정의로운 전환이 될 수 있다는 겁니다. 정의로운 전환이 인간들만의 정의여서는, 기후위기의 본질인 생태적 위기를 해결할 수 없을 것이라는 거죠. 인간이 지질학적인 힘을 가진 존재가 되었다는 인류세 논의의 핵심은 인간이 그 힘을 인간만을 위해 사용하고 있다는 데 있습니다. 인간이 스스로 인간중심주의를 포기하고 생태계 일부가 되는, 인간의 권리와 맹꽁이의 권리를 동일한 가치로 여기는 생태적 전환이 정의로운 전환의 궁극적인 지향이어야 한다는 이야기입니다.


생각해보십시오. 기실 우리가 정의로운 전환을 이야기해야 하는 상황은 어디에서 비롯되었는가를. 사람들은 가장 먼저 자연을, 다른 인종을, 다른 젠더를, 다른 계급을 향한 폭력과 약탈로 현대문명이란 바벨탑의 토대를 쌓아왔습니다. 하지만 성서의 바벨탑이 무너져버렸듯이 현대문명은 지금 지속가능성의 한계에 봉착해 있습니다. 탄소 중립을 위해 핵발전 르네상스를 이야기하는 식으로 눈앞의 이익에 급급했던 근시안적인 인식이 지금 근본적인 전환이 필요한 현재의 문명적 위기를 만들어낸 것입니다. 때문에 정의로운 전환은 우리 문명의 근본, 뿌리를 새롭게 하는 것이어야 합니다. 정의로운 전환은 우리가 그동안 뿌리내리고 있었던 인간중심주의와 성장주의를 털어내고, 지구 생태계의 존재 양식을 따라 상호의존성의 방식으로 살아가는, 생태적 삶과 탈성장의 새로운 토양에 뿌리를 내리는 일이라는 것입니다. 쉽게 말해서, 일하는 사람들이 서식지를 빼앗기고 있는 맹꽁이와 연대하고, 맹꽁이들을 생태적 주체로 존중하면서, 맹꽁이의 서식지 보전을 위해 우리 사회가 협력하는 것이 정의로운 전환이라는 이야기죠. (그러고 보니 앞에서 썼던 ‘맹꽁이 같은 이야기’라는 표현도 무척 맹꽁이 비하적인 표현이네요.)


제가 일하는 단체는 40년의 역사를 가진 곳이라 아직도 ‘환경운동’이라는 명칭을 사용하고 있지만, 보다 정확히는 ‘생태정의운동’이 우리가 지향하는 운동의 방향입니다. 생태 정의는 모순과 불평등의 가장 깊은 뿌리에서 정의를 만들어가는 일입니다. 지금 여기 사람들의 노동과 삶 역시 지구 생태계의 일부였고 앞으로도 그럴 테니, 맹꽁이들과 사람들과의 정의로운 관계에 대해 앞으로도 계속해서 고민하면서 기도할 뿐입니다. 기왕 맹꽁이 이야기를 시작했으니 조금 더 이야기를 해보면, 대게 맹꽁이들은 환경 변화에 아주 예민한 녀석들이라 보기엔 그럴듯한 서식지라도 맹꽁이를 포획해 옮겨주어도 잘 사는 경우가 많지 않습니다. 누가 맹꽁이 이야기를 하면서 대체 서식지를 잘 만들면 되지 않느냐고 하면, 맹꽁이가 자기 집에 대한 자부심이 크고 고집이 센 친구라 자기가 이사해야겠다 생각하기 전에는 이사하기를 아주 싫어한다고 이야기해주십시오. 우리 주변에도 그런 사람들 많이 있지 않습니까? 맹꽁이나 사람이나 먼 우주에서 바라보면 다 같은 먼지 한 톨, 거기서 거기니까요.




이진형  기독교환경운동연대 사무총장


(이 글은 격월간 비정규노동 9,10월호에 게재된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