녹색신앙 이야기

기후위기 대응에 관한  성서의 가르침과 전통

작성일
2022-11-25 15: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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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후위기 대응에 관한  성서의 가르침과 전통

 

창조세계와 인간

창세기는 우리가 살아가는 시공간이 하나님께서 만드신 창조세계이고, 창조세계와 그 안에 살아가는 다양한 생명들 역시 하나님께서 지으신 것이라고 이야기한다. 이렇게 하나님께서 만드신 창조세계는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참 좋은, 풍요롭고, 상호의존적이며, 온전한(integrity) 세계였다. 때문에 창조세계는 경외와 감탄, 감격, 그리고 신비로 가득한 공간이다. 창세기 1장에서는 하나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실 때, 먼저 바다와 땅의 풀과 나무, 물고기, 새, 짐승을 각각의 종류대로 만드시고,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세계에서 살아가는 다양한 생명들을 다스리도록 인간을 만드신다. 성서는 창조세계에서 인간의 본원적 사명이 창조세계의 다양한 생명을 다스리는 일, 창조세계를 맡아서 돌보는 일이라고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다.

성서는 여러 이야기들을 통해 하나님의 지극한 관심이 창조세계의 모든 생명들을 향하고 있다는 것을 이야기한다. 창세기 9장의 하나님께서 대홍수로 많은 생명들이 사라진 것을 후회하시며 다시는 홍수로 생명을 멸하지 않겠다는 약속으로 무지개를 보여주신 이야기, 요나서 4장의 하나님께서 니느웨 성의 수많은 사람들과 함께 짐승들의 생명을 아끼고 계시며 생명을 우선하지 않고 니느웨 성의 멸망을 바라는 선지자 요나의 이야기 등에서 하나님께서는 창조세계가 당신이 창조하신 인간과 생명들이 함께 살아가는 곳으로 여기고 계시며, 인간들이 하나님께서 맡기신 사명을 감당하고 있지 않음을 안타까워하신다.

그리고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세계에서는 예레미야서 12장의 이야기처럼 창조세계에서의 본원적 사명을 잊고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는 인간들의 죄악으로 인해 생명들이 씨가 마르는 참혹한 멸종이 매 순간 일어나고 있다. 성서는 가장 먼서 하나님의 창조세계와 그 안의 인간의 자리를 이야기하면서, 인간이 자신의 죄악을 참회하고 다시 창조세계를 맡아 돌보라고 하신 하나님의 뜻으로 돌아와야 함을 무엇보다 분명히 하고 있는 것이다.

인간의 탐욕

창세기 11장은 사람들이 도시와 꼭대기가 하늘에 닿을 높은 탑을 쌓은 이야기를 전한다. 하나님의 뜻을 떠난 인간들은 집단생활을 통해 문명을 이루고, 땅을 떠나 하늘에 닿을 수 있는 문명을 성장시키려는 욕망을 숨기지 않는다. 바벨탑 이야기는 도시와 높은 탑으로 상징되는 인간 문명에 대한 이야기이다.

인간은 도시와 높은 탑을 쌓기 위해 돌 대신 단단한 벽돌을 빚어서 굽고, 벽돌을 고정할 흙 대신 역청을 사용하기로 한다. 역청은 타르와 같이 자연 상태로 발견되는 탄화수소화합물, 즉 정제되지 않은 석유다. 도시와 높은 탑을 쌓기 위해서는 자연 상태 그대로의 재료보다 높은 수준의 기술, 더욱 많은 에너지가 필요한 재료를 사용해야했던 것이다. 사람들은 바벨탑을 쌓을 벽돌을 굽기 위해 큰 가마를 만들어 주변의 숲에서 나무들을 베어와 불을 지폈을 것이다. 공사 현장은 나무를 태우는 과정에서 발생한 짙은 연기가 가득했을 것이고, 역청에서 나오는 매캐한 유기화합물 냄새가 코를 찔렀을 것이다. 도시와 탑을 쌓던 사람들은 연신 기침을 하며 점점 쇠약해졌을 것이다. 바로 이 연기와 매캐한 냄새가 바로 지금 이 순간에도 해마다 전 세계의 500여만 명의 사람들의 목숨을 앗아가는 대기오염 물질, 화석연료의 연소과정에서 발생하는 미세먼지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도시와 높은 탑을 쌓기 위해서는 설계를 하는 사람, 일을 지시하는 사람, 먹을거리를 준비하는 사람, 나무를 베어오는 사람, 벽돌을 굽는 사람, 역청을 바르는 사람, 그리고 이들의 일을 감시하는 사람 등 다양한 분업이 이루어졌을 것이다. 이러한 분업은 사회의 계층적 분화의 단초가 된다. 결국 지배 계층이 피지배 계층을 다스리는 문명이 당연한 일이 되고 만다. 이 모든 것이 가능했던 것은 도시와 높은 탑을 향한 인간의 욕망이 문명이라는 이름으로 한 자리에 응축되었기 때문이다.

성서는 도시와 높은 탑을 쌓으려했던 인간들의 시도가 결국 하나님께서 인간들이 서로의 말을 알아듣지 못하게 하여 온 땅으로 흩어져 중단되었다고 이야기한다. 성서는 인간의 지배적 문명이 곧 창조세계 본연의 상호의존의 관계를 무너뜨리고, 지배와 피지배의 관계를 만드는 것에서부터 비롯되었음을 이야기한다. 성서는 인간의 지배적 문명은 본질적으로 하나님의 창조세계를 거부하고 인간의 질서를 강요하는 시공간이기에 하나님께서는 지배적 문명을, 그리고 지배적 문명의 근원에 있는 인간의 욕망과는 함께할 수 없는 존재임을 이야기한다.

기후난민 아브라함

창세기 11장은 아브라함과 그의 아버지 데라가 고향 우르를 떠나 가나안으로 향하던 길에 머물게 된 하란에 정착하였다고 이야기한다. 고고학자들이 발견한 우르는 유프라테스강의 풍부한 강수량과 주기적인 범람으로 인한 비옥한 토양을 바탕으로 수메르 문명을 이룬 메소포타미아 남쪽의 고대도시였다. 그런데 기원전 2,100년경에 메소포타미아 북쪽 지역의 화산 폭발과 300년이나 이어진 긴 가뭄으로 농사와 목축이 어려워진 북쪽 평원의 유민들이 우르를 비롯한 남쪽의 도시로 몰려든 데다, 오랜 관개농업으로 인해 토양의 염도가 높아져 농업 생산성이 떨어지는 바람에 갑자기 도시가 붕괴하여 우르와 수메르 문명은 역사 속으로 사라지게 된다. 그리고 이 시기에 메소포타미아 지역을 떠나는 수많은 난민들의 대규모 인구이동이 발생하게 된다.

그런데 마침 성서는 아브라함이 수메르 문명의 도시 우르를 떠나 하란으로, 계속해서 가나안으로 이주를 해야 했음을 이야기하고 있다. 또한 성서는 가나안에 정착한 아브라함과 아브라함의 자손들이 가나안의 척박한 기후로 인해 계속해서 어려움을 겪었다고(창 12,13,26,42장) 이야기한다. 그리고 마침내 아브라함의 손자인 야곱과 그의 열두 아들들은 가나안 땅에 몰아닥친 기근을 견디지 못하고 나일강이 주는 풍요로움이 지속되었던 이집트 땅으로 이주하게 되어(창 46장) 이집트 문명에서의 종살이, 노예생활이 시작되었다고 이야기한다. 어쩌면 아브라함 가문의 우르와 하란으로부터의 이주와, 그리고 분명히 가나안에서 이집트로의 이주는 당시의 기후적 요인이 작용하고 있었다. 아브라함은 기후난민으로써 척박한 삶을 살아가야했던, 결국 지배의 문명이 작용하는 폭력에 구속된 인간이었던 것이다.

성서는 야훼 하나님을 향한 믿음이 기후위기로 척박한 삶을 살아가면서도 하나님의 뜻을 찾았던 기후난민 아브라함에게서 시작되었다는 것을 이야기한다. 그리고 여전히 창조세계는 풍요로운 동산이었지만, 인간의 지배적 문명은 기후난민을 자신의 탐욕을 이루기 위한 도구로 삼았음을 성서는 이야기한다.

이집트 탈출 사건

출애굽기는 이집트 파라오의 지배로부터 고통을 받던 히브리 사람들이 야훼 하나님을 향한 신앙을 통해 지배의 문명으로부터 정의, 평화, 생명의 문명을 만들기 위해 분투했던 사건을 이야기하고 있다. 이집트는 기근을 피해 찾아온 히브리 사람들의 강제노동으로 도시를 건설하면서도, 자신들에게 잠재적 위협이 될 수도 있다는 두려움으로 히브리 사람들의 어린아이들을 집단 살해하는 폭력을 태연히 자행하는 지배의 욕망에 사로잡힌 사회였다. 이집트의 지배층은 여러 번 반복된 생태적 재앙의 상황 속에서도 히브리 사람들을 향한 지배의 관계만큼은 끝까지 포기하려하지 않는다. 성서는 결국 히브리 사람들의 탄식에 귀 기울이신 하나님께서 히브리 사람들을 이집트로부터 이끌어내어 그들의 조상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셨던 가나안 땅으로의 여정으로 인도하셨음을 이야기한다.

이집트로부터 탈출했던 히브리 사람들은 이제 광야에서 다른 존재를 지배하는 문명이 아닌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문명을 추구하게 된다. 약속의 땅 가나안으로 들어가기 전 광야의 40년은 히브리 사람들에게 지배의 문명으로부터 벗어나 하나님의 창조세계의 풍요로움에 의지하는 문명을 만들어 나가는 문명의 전환기였다. 히브리 사람들은 광야에서 가나안 땅에 들어가기까지 이집트의 고기 대신 매일매일 만나를 먹게 되었다. 하늘에서 내린 만나는 하루를 넘겨 저장할 수가 없었기 때문에 그날 먹을 것만 그날 거두어 먹을 수 있었다. 히브리 사람들은 탐욕으로 이루어진 이집트 문명의 배부름이 아니라, 이미 창조세계에 가득한 하나님의 은총에 만족하며 살아가는 소박한 풍요를 경험하였다. 또한 히브리 사람들은 파라오의 지배가 아니라 정의와 평화를 세우기 위한 율법을 바탕으로, 인간과 창조세계와의 관계를 본래의 모습으로 회복해나가며 그들이 머무는 땅과 그 땅에서 함께 살아가는 모든 생명들과의 상호의존을 통한 생명의 공동체를 이루어야 한다는 것을 배워 나갔다.

결국 출애굽 사건은 이집트의 지배적 문명 가운데 고통을 받던 히브리 사람들이 새로운 문명을 만들어 나가게 되는 이야기이다. 출애굽 사건은 인간의 욕망의 한계를 경험한 이들이 생태적 회심을 통해 창조세계에 대한 인식을 새롭게 하고, 다시 하나님의 창조세계 가운데에서 인간의 본연의 자리에 서기 위해 하나님과 새로운 언약을 맺은 생태적 전환의 사건이었다.

저주의 물질, 역청

역청은 창세기의 노아의 방주를 만드는 이야기와 도시와 탑을 쌓는 이야기, 그리고 출애굽기에서 아기 모세가 담긴 바구니에서도 사용되었던 것처럼 인간은 오래전부터 역청을 채취하여 이를 유용하게 사용하였다. 하지만 역청은 불이 붙으면 짙은 연기를 내뿜는 불길이 쉽게 꺼지지 않으며 이후에도 주변 땅의 강과 흙을 황폐하게 만드는 위험한 것이기도 하였다.

이사야서 34장에서는 하나님을 대적한 자들에게 내리는 저주와 징벌을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다. “에돔의 강들이 역청으로 변하고, 흙이 유황으로 변하고, 온 땅이 역청처럼 타오를 것이다. 그 불이 밤낮으로 꺼지지 않고 타서, 그 연기가 끊임없이 치솟으며, 에돔은 영원토록 황폐하여, 영원히 그리로 지나가는 사람이 없을 것이다.”(9,10절 새번역) 성서는 역청의 꺼지지 않는 불길과 연기를 하나님의 심판으로 이야기하며, 역청을 풍요로운 땅을 황폐하게 하는 저주의 물질로 이야기하고 있다. 탐욕에 눈이 멀어 성서에서 하나님의 저주를 상징하는 역청에서 더욱 고밀도의 연료를 추출하여 사용하는 문명이 인간과 창조세계에 진정한 풍요를 가져다 줄 수 있을까? 창조세계와 문명의 기나긴 시간 속에서 아주 잠시, 대략 200여 년의 짧은 시간 동안 화석연료를 기반으로 한 현대의 산업문명이 반짝하고 풍요를 누린 듯이 보이나 그 풍요 역시 약자들과 미래 세대들의 에너지를 빼앗아 내 것으로 만들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결국 역청을 사용한 현대 산업문명 역시 에돔과 마찬가지로 창조세계를 영원토록 황폐하게 만들어 인간들과 생명들이 살 수 없는 곳을 만들고 있음을 기후위기라는 경험을 통해 우리는 깨닫고 있다.

생태적 성찰

마태복음 6장에서 예수님께서는 근심과 걱정에 사로잡혀있는 사람들에게 ‘공중의 새를 보아라.’, ‘들의 백합화가 어떻게 자라는가 살펴보아라.’라고 이야기를 하신다. 예수님의 시대는 율법이 출애굽의 정의와 평화의 정신이 사라지고, 성전 체제를 굳건히 하기 위한 지배자들의 지배도구로 오용되고 있었다. 예수님께서는 율법을 완전하게 하기 위해 율법이 본래의 정신을 회복할 수 있도록 제자들을 가르치셨다. 예수님께서는 그 방법으로 공중의 새와 들의 백합화와 같은 창조세계에서 함께 살아가고 있는 여러 생명들을 살펴보라고 이야기하신다. 창조세계를 살펴보는 생태적 성찰을 통해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는 것이 삶의 근심과 걱정에서 해방되는 방법임을 가르쳐주신 것이다.

성서는 바로 예수님께서 창조세계를 살펴보는 생태적 성찰의 시간을 꾸준히 가지셨다고 이야기한다. 예수님께서는 공생애를 준비하시며 40일 동안 광야에 머무시며 산짐승, 들짐들과 함께 머무셨으며, 수시로 한적한 곳으로 가시어 창조세계를 살펴보며 기도를 하셨다,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공중의 새와 들의 백합화뿐만이 아니라, 포도나무, 무화과나무, 겨자, 밀, 누룩, 까마귀, 독수리, 양, 이리, 낙타, 뱀, 돼지, 여우, 개, 소, 나귀, 닭 등의 다양한 생명들을 언급하시며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신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창조세계의 모든 생명들을 살펴보며 하나님의 뜻을 깨닫도록 이끄셨던 것이다.

선택의 시간

마태복음 19장은 예수님을 찾아온 부자 젊은이의 이야기를 전하고 있다. 부자 젊은이가 영원한 생명을 얻으려면 무슨 선한 일을 해야 하냐고 묻자, 예수님은 그에게 네 소유를 팔아서 가난한 사람에게 주라고 말씀하신다. 그러자 재산이 많았던 이 젊은이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서 근심을 하면서 떠났다는 이야기이다.

우리는 그동안 화석연료를 기반으로 한 산업문명을 통해 물질적인 풍요를 누려왔다는 착각에 사로잡혀있었다. 하지만 그 사이 엄청난 온실가스의 배출로 인해 기후변화는 지구 생태계와 인간사회의 위기를 고조시켰다. 이제 지속불가능한 삶의 방식은 한계에 봉착했고, 지속가능한 사회를 만들기 위해서 이전의 낡은 방식을 포기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 답은 이미 분명하다. 우리가 그동안 마음대로 사용해왔던 화석연료를 떠나서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총의 재생에너지에 기대어 단순하고 소박하게 살아가는 새로운 삶을 선택하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예수님을 찾아왔던 부자 젊은이가 가진 재산을 나누어 주는 것을 두고 근심했던 것처럼, 아직도 그동안 누려온 화석연료의 풍요를 포기하지 못하고 주저하며 고민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화석연료의 유혹을 내치지 못하는 지금 이 순간에도 기후위기는 가난한 이웃, 창조세계의 생명들, 미래 세대들이 함께 살아가야 할 창조세계가 다시는 회복할 수 없는 마지막 한계점을 향하고 있다. 성서는 안타깝게도 근심 끝에 부자 젊은이는 예수님을 떠나갔다고 이야기하고 있다. 기후위기로부터 창조세계를 회복할 수 있는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이제 선택의 시간이다.

하나님의 뜻을 분별

사도 바울은 로마교회의 성도들에게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로마서 12:2)고 이야기하며 그리스도인으로서 살아가는 새로운 생활을 권면한다. 사도 바울이 이야기한 새로운 생활은 세상의 판단과 기준을 넘어서는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을 따르는 생활이었다. 기후위기 시대를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 역시 창조세계 안에서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을 따르는 새로운 생활이 무엇인가를 깊이 성찰해보아야 한다.

그동안 그리스도인들 역시 기후위기의 원인인 탄소를 거리낌 없이 배출해왔다. 먹고, 입고, 지내는 모든 시공간과 문화와 경제 활동 가운데에서도 우리의 생활이 하나님의 창조세계인 지구생태계에 기후위기를 가져오고 있다는 사실을 온전히 분별하지 못했다. 하지만 이제 더 이상은 탄소를 배출하는 생활에 머물러서는 안 된다. 이제 우리의 무지와 어리석음이 기후위기를 불러왔음을 참회하며 새 하늘과 새 땅을 향한 새로운 생활을 살아가야 한다. 기후위기 시대, 그리스도인들의 새로운 생활은 탄소배출이 없는 생활이어야 한다.

우선 일상의 생활에서 탄소배출을 저감하는 실천에 적극적으로 나서야 한다. 가정에서, 교회에서, 그리고 지역사회에서 탄소배출을 저감할 수 있는 방법이 무엇인지를 고민해야 한다. 특히 교회는 하나님 나라의 표상으로써 이 세상에서 정의와 평화와 생명의 공간으로써 창조세계 회복에 앞장서야 한다. 나아가 우리 사회가 화석연료에 의존하는 경제 시스템으로부터 벗어나, 생명이 중심이 되는 생명의 경제 시스템으로 나아가도록 생태적 전환(metanoia)을 모색해야 한다. 생태적 전환에 나서는 일은 기후위기 시대에 생명을 창조하신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을 따르는 새로운 생활이다.

새 하늘과 새 땅

요한계시록은 계시록이 세계의 종말에 대한 이야기이다. 하지만 이 종말은 앞으로의 시간에 이루어질 예보가 아니라 오늘의 상황 가운데 더욱 절박해진 하나님의 주권적이 도래하는 새로운 시공간을 향한 희망이다. 즉 성서의 종말론은 현세가 사라지고 내세가 도래하는 현실도피적 종말론이 아닌 현실의 근본적인 모순의 전환과 회복을 통한 새로운 체제가 시작되는 예언자적 종말론이다.

성서의 마지막 장인 요한계시록 22장은 성서의 첫 장인 창세기 1장과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창조세계에 대한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요한계시록 22장은 새롭게 창조된 세상을 생명수가 흐르는 강과 강변 양쪽에서 자라는 열두 종류의 열매를 맺는 생명나무가 자라는 동산의 모습으로 이야기한다. 이 생명나무는 달마다 열매를 내고, 생명나무의 나뭇잎은 민족들을 치료하는 데 사용된다고 이야기한다. 성서는 하나님의 창조세계가 종말의 시련이 지난 뒤에 온전한 모습으로 회복하여 다양한 생명이 평화롭게 살아가는 모습이 될 것이라고 이야기한다.

기후위기 앞에서 사람들은 깊은 절망과 우울을 경험한다. 과학적인 자료들은 인천 특별보고서에서 제시한 30년 뒤인 2050년까지 지구평균기온 상승을 1.5도 이내로 통제하는 것은 이미 불가능한 상황임을 보여주고 있다. 기후위기에 대응하기 위해 함께 힘을 모아야할 세계 각국은 오히려 경제 위기의 상황 속에서 자국 이기주의를 내세우며 화석연료의 보조금을 연장하고 화석연료발전을 확대하려고 하고 있다. 기후위기의 직접적인 피해를 입고 있는 기후재난국가를 지원하여 기후불평등을 해소하기 위한 기후금융조성은 차일피일 미뤄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전쟁무기 구입비용은 천문학적으로 증가하고 있다. 사실상 이제 우리에게는 절망만이 남아있을 뿐이다. 과연 하나님의 창조세계는 이대로 끝나는 것일까?

하지만 성서의 예언자적 종말론, 희망의 종말론은 절망 가운데서 새 하늘과 새 땅을 향한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바라본다. 파국과 혼돈은 어쩔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 파국과 혼돈은 수천 년 동안 계속되어온 지배적 인간 문명과 기후변화를 야기한 화석연료에 기반한 현대 산업문명이라는 기후체제의 종말을 가져오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 종말의 자리에서 지배적 문명과 산업문명을 극복하고 창조세계를 온전히 회복하는 새로운 체제로의 생태적 전환이 이루어지게 될 것이다. 임박한 종말의 시기, 성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에 끝까지 온전히 서있는 이들로 인해 결국 새 하늘과 새 땅이 이루어질 것이라는 희망을 전하고 있다.

 

이진형 기독교환경운동연대 사무총장
(이 글은 KCRP 탄소중립과 전환사회 실천을 위한 토론회에서 발표된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