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 며 생 각 하 며

국립수목원 풍경산책
유영초/ 본회 집행위원, 숲 해설가

물푸레봉과 소리봉의 녹음은 능선과 계곡을 타고 쉼 없이 흘러내립니다. 풀과 나무들이 저마다의 봄을 쥐고 가쁘게 달려온 지 석 달 남짓, 수천 수만의 질감과 색감으로 제각기 뿜어내던 녹색 경주는 어느새 빠짐 없는 완주로 끝을 맺었나 봅니다. 이젠 풀과 나무 모두가 숲의 이름으로 엎드려 조아리며 광합성을 위한 태양 경배의 나날들을 보낼 것이기에, 호수는 기꺼이 침례의 시간을 마련해줍니다.

얼마전 광릉 국립수목원 육림호에서의 여름 풍경입니다. 풍경은 오감으로 받아들이는 느낌의 결정입니다. 보고, 듣고, 숨쉬고, 만지고, 맛을 봐서 느껴지는 찰나의 아우라를 풍경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때문에 풍경은 인간의 가장 육체적이면서도 심리적인 하나의 현상입니다. 풍경은 단순히 대상의 물리적이고 화학적인 반응이 아니라, 주체와 대상, 시간과 공간이라는 함수를 통해 수없이 만들어지는 상징이자 기호이며 번역되지 않을 신비의 언어이기도 한 것입니다. 그래서 물론 우리는 이 풍경을 통해 비로소 바깥세상과 소통합니다만, 우리는 종종 소통불가의 풍경을 마주하기도 합니다.

나무와 풀들의 치열한 삶의 이야기를, 풀벌레의 합창을, 바람의 아우성을, 숲 탐방객에게 통역하는 것을 '숲 해설(forest interpreting)'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숲은 한번도, 단 한번도 똑같은 상징과 언어와 기호와 텍스트로 탐방객을 맞이할 수가 없습니다. 시간과 공간과 탐방객의 오감에 따라 풍경은 달라질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숲의 풍경은 결국 리뷰 불가의 작품일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니 그렇기 때문에 간단한 산림 생태의 지식을 전하는 일보다는 풍경이야말로 숲 해설의 가장 핵심적인 영역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숲은 그저 식물들과 동물들의 단순한 서식처가 아니라 살아 있는 우주이며, 수많은 상징과 기호와 아름다운 언어와 메시지로 가득 찬 생명의 정신공간입니다. 숲은 때로는 도란도란 속삭이고 때로는 함성을 지르며 아우성치기도 합니다. 혹, 이따금 숲이 만들어내는 실존을 압도하는 적막의 풍경에 주눅들어 본 적이 있습니까? 세포 하나 하나가 곤두서도록 애무해주기도 하고 때로는 소름이 끼치기도 매몰차기도 한, 촉감으로 만나는 숲의 풍경은 또 어떻습니까? 폐부 깊숙이 빨려드는 숲 향기 속에 탈취되어 가는 넋은 이미 내 것이 아닐 때도 있습니다.

풍경에서 가장 일차적으로 느껴지는 것은 아무래도 눈으로 보는 시각적인 측면일 것입니다. 우리는 숲을 보는 것 자체만으로도 커다란 정신적 위안을 얻고 있습니다. 특히 초록 가득한 숲은 생명의 색으로 각인되어 있습니다. 사람은 빨간 파장을 보면 흥분하고 녹색 파장을 보면 편안해지는 정보를 갖고 있습니다. 신호등에서 안심하고 건너라는 지시는 녹색이며, 뇌를 흥분시켜 주의를 자극하는 정지 신호는 붉은 색입니다.

음양오행에서는 오색 중 청녹계열은 간을, 붉은색은 심장을 주관한다고 합니다. 때문에 녹색은 색채치료학에서나 한의학적으로도, 간에 영향을 미쳐 화를 가라앉히고 아울러 뇌파 중에서 알파파의 진폭을 크게 함으로써 심리적 안정에 도움을 준다고 밝혀져 있습니다. 단순히 이런 효과가 아니더라도 주거지에서의 녹색 전망은 하나의 환금성 자산이 된 지 오래 되었고 같은 아파트라고 해도 그 풍경의 가치를 따져 상당한 값을 지불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숲의 풍경에서 얻어지는 심리적 만족감은 부동산가격으로 환산되는 전망 권리금과는 차원이 다른 '그 무엇'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그 무엇'은 그것을 느끼는 이 말고는 아무도 무엇인지 모를 수도 있습니다. 다만, 그 충만한 정신공간, 숲에서 창조되는 '그 무엇'은 일상의 무디고 메마른 오감 육감으로는 보고, 듣고, 읽어내며, 느낄 수 없으리라는 점은 알 수 있습니다.

숲의 풍경은 바라보는 거리에 따라 각기 다른 느낌을 전달합니다. 멀리서 바라볼 때와 가까이서 마주할 때와 그리고 숲 속의 내밀한 곳에서 일체가 되어 느끼는 풍경은 사뭇 다릅니다. 멀리서 바라보는 숲은 포근하고 든든하며 웅장합니다. 능선을 따라 마주하는 산은 마치 인생 항로의 동반자처럼 다정하고 친근합니다. 숲 속 깊은 곳에서, 숲 속의 한 개체가 되어 느끼는 풍경에서는 풀과 나무 하나 하나의 이야기를 가까이서 들을 수 있어 좋습니다. 여기에서 들은 저마다의 생을 열심히 살아가는 풀과 나무들의 이야기는 숲 해설의 레퍼토리가 됩니다.

숲을 거닐다 보면 광신도들의 '통성기도'처럼 태양을 독점하며 뻗어 나가는 키 큰 나무들이 있습니다. 그 나무들 틈에서 시혜처럼 던져지는 조각난 햇살을, 박쥐처럼 숨어서 박쥐 날개같이 가녀린 잎으로 묵묵히 주워가며 의연히 살아가는 키 작은 나무를 볼 수 있습니다. 여인의 귀에 걸면 귓볼이 무색하고, 노리개라면 손이 부끄러울 만큼 아름다운 꽃을 피우며 보석 같은 열매를 맺는 이 박쥐나무가 주는 생명의 경이로운 감동은 아마 숲의 풍경에서 '그 무엇'을 이루는 작은 조각중의 하나일 것입니다.

무디어지고 메말라버린 오감으로 뭇 생명들의 언어를 읽지 못하는 이를 알도 레오폴드는 생태적 장님(ecological illiteracy)라고 하였습니다. 단 한 컷의 숲 풍경이 어느 날 갑자기 내 속에 있는 예민한 오감을 일깨워 심봉사 눈뜨듯 생태맹을 벗어나게 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다만 아름다운 숲은, 일상에서 혹 지나치게 허망한 것에 혈안이 되기 쉬운 안구 건조의 시각에도 약간의 물기가 되리라는 것은 장담할 수 있습니다.

붉은색이 열정과 흥분의 색이라는 것은 붉은 악마들을 통해 다시 한번 톡톡히 학습하였습니다. 이 붉은 색의 보색은 청녹색입니다. 의사들의 수술 가운이 청녹색인 것은 장시간의 수술로 붉은 피의 색을 보게 되면 그 보색인 청록색의 잔상이 환영처럼 나타나기도 하기 때문에 그것이 주는 스트레스를 방지하는 의미도 있다고 합니다.

아름다운 숲은, 행여나 뜨거운 여름 지나친 흥분으로 심장이 상하신 분이나, 천장 혹은 화장실의 하얀 타일에 청록색 잔상으로 환영이 되어 나타나시는 분에게도 다소 안심시키는 처치법이 될 것입니다.

기독교환경운동연대가 함께 하는 "광릉숲 기행"

광릉숲은 세조가 능터를 정한 후 경작과 매장은 물론 풀 한 포기 뽑는 것조차 금지되었던 곳입니다. 세계적인 희귀종 크낙새, 하늘다람쥐 등 20여종의 천연기념물이 서식하고, 천연림을 비롯한 2,900여종의 식물과, 3,000여 종의 동물이 뛰어놀고 있습니다.

남여선교회나 교회학교별로 평일(월~금) 중 방문일을 정하여 연락주시면, 전문숲해설자를 보내어 자연을 이해하고 배우며, 휴식을 취할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특별히 본회를 통해 방문하는 모임에는 일반 식생뿐 아니라 성서속의 식물 등에 관한 설명도 겸할 수 있습니다.

■ 이용 : 평일  (월~금/ 오전 10시·11시, 오후 2시·3시)
*사전예약 필수 (5일전)
■ 문의 : 02-365-8900          유영초(본회 집행위원, 019-624-085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