숲이 주는 감수성
(숲으로부터 감성을 계발해내는 방법)

숲! 여러 분은 숲에 대해서 얼마나 알고 있는가요? 여러 분이 가지고 있는 지식이나 경험을 근거로 '숲이란 이런 것'이라고 마음 속에 한 번 그려 보십시오.

그렇다. 나무들이 빽빽하게 무리를 이루고 있는 곳을 숲이라고 한다. 그러나 이것은 숲에 대한 일반적인 지식이고 숲을 평범하고 일반적인 감정으로 본 것이다. 예민한 감정이 개입되어 있는 것이 아니다. 범상한 감정이다. 그렇다면 범상하지 않은 비범상한 감정으로 숲을 볼 수 있는 것인가? 비범상한 방법으로 숲을 보면 어떻게 보이는 것인가? 비범상한 감정으로 숲을 관찰할 수 있다면 그것은 숲으로부터 감성 개발의 첫걸음이 될 것이다.

어떻게 하는 것이 숲으로부터 감수성을 높이고 감성을 계발할 수 있는 것일까?

관찰과 상상, 연상을 통해서 몰입하여 그 속에 숨어 있는, 평소에 가져보지 못했던 우주같은 세계를 발견하여 보십시오.

여러 분이 만약 나뭇잎을 한 장 그린다면 얼마나 자세하게 그릴 수 있을까요?

자세하게 그릴 수 있고 없고는 그것에 대해 가지고 있는 사전 지식보다 시지각의 경험과 기억이 더 큰 역할을 할 지 모른다. 즉, 시지각이 오랫동안 그 관찰 대상에 머물러 있었다면 자세하게 관찰할 수 있었고 그 기억이 오래갈 것이어서 좀더 세밀하게 그려낼 수 있을 것이다. 시선이 오랫동안 머물러 있었다는 것은 그 시간만큼 감정이 그 대상에 개입되어 있었다는 의미로 설명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어떤 사람들이 관찰 대상에 시선을 오랫동안 머물러 있을 수 있는가? 그런 사람들은 감수성이 예민한 사람들인가? 또 감수성이 예민한 사람들을 어떤 사람들인가?

어떤 사람이 사물에 대해서 갖고 있는 감정이 남달리 독특하고 별나다라고 할 때 감수성이 예민하다고 한다. 그리고 감수성이 높다고 한다. 물론 그 관찰 대상이 선한 것이고 아름다운 것이고 좋은 것이라면 그 사람은 정서 수준이 높다고도 표현한다.

현대인은 왜 감수성을 가져야 하고, 하필 숲으로부터 감수성을 얻어야 하는가? 감수성이 있는 사람은 무엇인가 독특한 사고력을 가지고 있으며 그것이 발단이 되어 창작력을 키우게 된다. 그런 사람들은 범상한 감성을 가진 사람이 아니고 감수성이 예민한 비범성을 가진 사람들이다. 집중적으로 내면으로 관조하며 사물에 몰입한다. 대문호, 화가, 음악가, 철학자들은 모두 그런 부류의 사람들이다.

현대인은 스트레스의 압박에서 헤어나지 못한다. 더구나 더욱 바빠진 일상생활과 감소된 녹지로 인해 우리는 자연과 점점 멀어지고 있다. 자연과 멀어질수록 인간의 감수성은 둔감해지고 인성은 경직되며 인정이 메마른 사회가 된다. 자연생태 체험학습, 환경교육, 숲체험 등은 경직되고 메마른 인성과 둔감해진 감수성 회복을 위해 실시하는 것이다.

숲은 그가 가지고 있는 보건 의학적인 기능으로 인간으로 하여금 스트레스와 오염으로부터 잠시라도 도피할 수 있는 안식처이다. 또한 숲은 여러 가지 복합 작용으로 두뇌활동을 촉진시키고 정신을 맑게 하여 사고력과 판단력을 향상시키는 작용을 가지고 있는 등 감성 계발에 더 없이 좋은 역할을 하고 있는 곳이다.

위와 같은 배경에서 이 글은 숲을 봄으로써 인간의 감정을 자극하여 마음을 순화시키고 순수해지게 하고자 할 목적으로 준비되었다. 또한 어떻게 하면 숲이나 나무를 통해 그 같은 마음의 움직임을 얻을 수 있는가를 터득하는 방법을 알려주고자 함이다.

숲이란 무엇인가

 최고 최대의 것이 모인 곳 - 숲에 대해 감수성을 가지려면 숲이 무엇이고, 언제부터 나타났으며, 그 속에는 어떤 것들이 들어 있으며 그러한 것을 어떻게 관찰하고 감상하여야 하는가에 대한 궁금증을 푸는 것으로부터 시작하여야 한다. 궁금증은 곧 관찰로 이어지고 관찰하면서 상상하고 숲의 세계에 몰입할 수 있다.

숲이란 무엇인가라는 물음에 앞서서 다음과 같은 좀 엉뚱한 듯하지만 가장 흔한 질문을 던져본다.

세상에서 가장 몸집이 큰 것은?

세상에서 가장 오래 사는 생물은?

이 질문에 대한 답을 모르더라도 상상만 해보아도 그것은 이미 지구상에 존재하는 생명체 중의 생명체일 것이다. 인간의 성격상 대부분은 세상에서 제일인 것들을 좋아하거나 그것들이 무엇일까에 대해 알고 싶어 한다. 그에 대한 답은 거의 나무와 관련이 있다.

단일 생명체로서 이 세상에서 가장 큰 몸집을 가진 것은 미국 캘리포니아 주 세쿼이아 국립공원에 있는 삼나무로서 나이는 약 3000년이며 키가 84m나 되고 지름은 11m, 둘레는 31m나 된다. 껍질 두께만도 61cm나 된다. 뿌리를 포함한 무게는 무려 약 2000톤이며, 약 50억개의 성냥개비를 만들 수 있는 부피를 가지고 있다고 한다.

키가 제일 큰 것도 역시 나무이다. 역사적으로 알려진 키가 가장 컸던 나무는 1885년 호주의 바우바우산에 있던 유칼리나무로서 143m 였다고 한다. 현재 살아있는 나무로서는 캘리포니아 레드우드 국립공원의 삼나무이며 약 111m 정도이다.

제일 오래 산 것은 무엇일까. 캘리포니아에 있는 붉은 해안나무라 불리우는 에온나무는 1977년에 죽은 것으로 알려지는데 약 6,200년을 살았으며 당시의 키는 76m 정도였다고 한다.

평면적이 가장 넓은 나무는 인도의 캘커타 식물관에 있는 반얀나무이다. 이 나무의 나이는 약 210년인데 12,000㎡의 땅을 덮고 있다. 한편, 가장 넓은 숲은 북위 55도에서부터 북극으로 이어지는 러시아의 거대한 산림지대인데 면적은 11억 ha에 달한다. 아마존 밀림은 약 3억 3천ha에 이른다.

그밖에, 둘레가 가장 긴 나무는 약 58m의 길이를 가지고 있는 유럽밤나무로서 이탈리아 에트나산에 있다. 가장 빨리 자라는 나무는 열대우림에 있는 나무로서 13개월동안 약 10.7m(1년에 약 82cm)를 자랐는데 이 나무는 말레지아에 있는 팔커타라는 나무이다. 가장 더디게 자라는 나무는 어느 정도일까. 멕시코의 디운 에듈이라는 나무는 연평균 0.76mm를 자라는데 이 정도의 속도라면 10cm를 자라려면 130년 이상을 기다려야 한다.

지구상에서 최고 최대의 것들이 모두 나무이며 숲은 그것들로 이뤄진 집합체이다.

 숲의 어원 - 사전에 나오는 '숲'의 뜻풀이를 보면, 대개 '수풀의 준말'로 되어 있다. 다시 '수풀'의 뜻풀이를 찾아보면, '무성하게 꽉 들어찬 나무 서리', 혹은 '풀, 나무, 덩굴이 한데 엉킨 곳'(「우리말 큰 사전」, 어문각)으로 표기하고 있다. 여기서 '서리'라는 뜻은 많이 모여 있는 무더기를 말한다. 북한에서 쓰이는 「조선말 대사전」(사회과학출판사 간)에도 거의 비슷한 풀이로서 '나무가 우거지거나 꽉 들어찬 곳', 그리고 '풀, 자디잔 나무, 덩굴이 함께 엉켜 우거진 곳'으로 설명하고 있는데, 뒤의 풀이는 큰 나무 없이 '작은 나무들과 풀이 덤불을 이루며 자라고 있는 야산의 숲'을 말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이 '숲' 혹은 '수풀'의 고어는 조선 초기 15세기 중반에 월인석보나 석보상절에 '숳'의 형태로 발견되고 있으며, 이어서 '숩', '수플'로 쓰이다가 오늘날에 이른 것으로 보인다. 여기서 '숳'는 그 다음에 붙임씨 등이 이어지면 '수'와 받침 'ㅎ'이 분리되어 쓰이고 있다.

한자어로 쓰이는 비슷한 말로는 삼림, 임수(林藪), 산림 등이 있다. 삼림은 '수풀'과 '나무가 우거진 숲' 등으로 설명하고 있으며, 산림은 '산과 숲 또는 산의 숲'(「조선말 대사전」),  또는 '산의 수풀'(「우리말 큰 사전」)로 기록되어 있다. 이를 근거로 볼 때, '삼림'과 '산림'을 구분하여 본다면, 삼림은 단지 '나무가 우거진 숲'을 뜻하고, 산림은 '산과 그 안에 있는 숲'을 포함하는 지역을 뜻한다고 볼 수 있겠다.

사전에서는 또 산림을 '벼슬하지 아니하는 숨은 선비'를 일컫기도 한다. 이 뜻풀이는 아마도 조선시대 연산군 시절 사화가 일어난 뒤부터 당파 싸움을 피해 '산림'에 은둔하면서 벼슬하지 않고 글읽기를 즐기던 선비들이 나타나면서 발생한 은어가 아닌가 생각한다. 그의 제자를 산림문하(山林門下)라고 하고 그런 부류를 산림학파라고 하였다.

조금 생소한 낱말인 임수는 '수풀' 혹은 '사물이 많이 모이는 곳'을 말한다. 수(藪)는 '수풀 수'로서 숲에는 갖가지 수(數)많은 풀과 나무와 동물이 모여있기 때문에 나타난 단어가 아닌가 생각한다. 여기서 '수'자는 혹시 바로 위에서 소개한 '藪'에서 따온 것이 아닐까하는 추측도 해본다.

숲을 뜻하는 라틴어는 'Silva'이다. 이 단어의 원뜻은 '특정지역의 산림 속에 있는 나무'의 의미이며 '숲'이란 뜻은 아닌 것 같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대부분 임학의 전문분야에선 '숲'(산림)으로 쓰고 있다. 이 단어로부터 'Silvanus'란 단어도 파생되었는데 그 의미는 '숲의 신'(로마 신화)이다(그리스 신화 faun).

영어식 표현은 'Forest'인데 프랑스 숲의 역사로부터 어원을 찾을 수 있을 것 같다. 프랑스에서는 10세기 경 중세 장원제도와 관련하여 수렵과 벌채권이 영주에게만 제한되던 산림지역이라는 뜻의 'Foresta'가 최초로 등장한다. 오늘날 '숲'을 뜻하는 불어는 For t이다. 영국에 있어서 Forest라고 하는 것은 역사적으로 보면 중세시대(16세기 경), 프랑스에서와 유사하게, 왕들이 사냥을 즐기기 위해서 소중하게 관리하고 있는 땅으로서 일종의 왕실 소유 수렵원(狩獵園)과 같은 것이었다. 그 당시는 나무가 서있지 않은 곳도 이 '포리스트'에 포함될 수 있었다. 오늘 날 독일에서 숲을 뜻하는 단어는 'Wald'와 'Forst'가 있는데, 국경지역, 경계지역을 뜻했던 '마르크'(Mark)가 숲이 우거졌던 특성으로 인해 한 때 숲을 의미하기도 하였다.

Silva라는 단어로부터 'Silviculture' (숲가꾸기, 조림)가 만들어졌다.

또 숲에서의 인간의 활동에 관련된 몇몇 유럽언어 중에는 숲이 '문화'라는 용어와 서로 결합되어 있다: 라틴어 Silvicultura, 영어 Silviculture, 불어 Sylviculture, 이태리어 Selvicoltura. 라틴어에서는 임학이 역시 ars Silvatica 즉, 숲을 만드는 예술(영어 Forest culture, 독일어 Waldkunst)이란 말로 표현된다.

숲의 역사

오늘 우리가 보는 숲은 언제부터 존재하였을까? 과거 초기 숲도 오늘날과 같은 그러한 모습의 숲이었을까? 숲에 대한 이러한 의문을 갖는 것부터 상상력을 동원하게 되며 답을 알면 만족스럽게 되고, 마음은 즐겁고 기쁘게 되니 감정은 순화되고 정서는 함양될 것이 분명하다.

바다의 식물들이 육지로 상륙하고 땅에 적응한 식물들이 나무로 무리를 지어 숲의 형태를 이루게 되기까지에는 오랜 세월이 흘렀다. 지질학적 연대에서는 약 4억 3천만년 전의 일이었으며 창조사역에 나타난 숲의 모습은 제3일째이다.

다음 그림들은 고지질 시대 숲의 모습을 재현해 본 사례이다. 4억 3천만년전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데본기 시대엔 육지로 올라온 식물들이 숲을 만들기 시작하는 시대로서 그림 1과 같은 모습을 보인다. 일명 석탄기라 불리는 카본기 시대는 지름 1m, 나무높이 20~30m의 거대한 양치식물이 울창한 숲을 형성하던 시기였다. 봉인목, 인목, 노목 등은 석탄기 숲을 구성하던 3대 양치식물로서 크기가 장엄하였을 것으로 추측하는데, 이 나무들은 오늘날 높이 30cm 안팎의 보잘 것 없는 쇠뜨기, 속새와 같은 풀로 변해 버렸다.

이어서 침엽수 시대라 불리는 페름기를 거쳐 쥐라기 숲으로, 현화식물-활엽수 시대라 불리는 백악기의 숲으로 발전하여 내려왔다.

성경상 숲의 의미

성경에 하느님은 인간을 창조하면서 에덴 동산에 살게 하였다. 왜 동산에 살게 하였는가? 동산은 숲이다. 하느님께서 인간을, 그가 세상 것 중에서 먼저 만드신 무한한 궁창도 아니고, 저 깊고 푸른 바다도 아니고, 강도 아니고, 저 끝없이 드넓은 들판도 아닌 동산, 숲에 살도록 하셨을까?

한 줌의 흙 속에는 많게는 수 억 마리의 박테리아가 들어있고 또 크고 작은 소동물들이 살아가고 있다. 이들이 살아가면서 흙 속의 유기체와 무기체를 분해하게 되면 그 결과, 땅 속에 뿌리를 박고 사는 풀들과 나무들은 그들에게 필요한 영양물질을 잘 흡수하여 1년, 10년, 100년, 수백년, 수천년을 견디며 때로는 수만년, 수천만년, 수억년을 이어 내려오면서 울창하고도 거대한 숲을 이루면서 살아가게 된다.

이처럼 숲이야말로 세상에서 가장 많은 생명들로 이루어진 완벽한 생명 집합체요 그래서 가장 큰 유기체이다. 숲이 이처럼 생명체들이 살아가는데 완벽한 삶의 공간이었기 때문에, 그리고 인간에게 필요한 모든 식물들을 구비하여 놓았기 때문에, 인간을 그토록 사랑하여 숲에서 살도록 명령하신 것이다.

숲은 생명 삶의 알파요 오메가이다. 인간 삶의 시작이자 인간 삶의 종말이다. 숲에는 창조주의 위대하고도 심오한 인간의 삶에 대한 지혜와 철학이 숨쉬는 곳이었다.

그러나 그러한 값없이 받은 엄청난 은혜를 입었음에도 불구하고, 엄숙한 삶의 진리를 전수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세상의 유혹과 인간의 판단에 의지한 결과, 인간은 그곳으로부터 영원히 다시 돌아올 수 없는 멸망의 길로 쫓겨나 버렸다. 이처럼 에덴동산 숲은 인간의 모든 행복과 질곡의 요람이었다. 그 숲으로부터 삶의 기쁨을 맛보았고 그 숲으로부터 삶의 고통을 겪었다.

숲의 아름다움

숲의 아름다움 - 어느 날 열심히 연구하고 있는 아인슈타인에게 아이가 다가왔다. 아이는 대뜸 묻기를, '할아버지, 죽음이 무엇이에요?' 당돌하고도 뜻밖의 질문이라 잠시 할말을 잃은 아인슈타인은 마침 음악이 흐르고 있어서, '응, 죽음이란 저렇게 아름다운 음악을 더 이상 들을 수 없게 되는 것이란다' 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여러분 죽음이란 아름다운 음악을 들을 수 없게 되는 것일까요? 그럴 수도 있겠지요.

그러나 사형수는 마지막으로 하늘을 보고 싶어한답니다. 철창 밖의 자연을 보고 싶어하는 것이지요. 우주의 섭리에 따라 변화무쌍하게 변하는 대자연의 아름다운 모습을 더 이상 보지 못하는 것이 죽음일 것이라고 생각한다.

숲은 아름답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것을 택하라면 숲을 택할 것이다.

서양에 있어서 예술철학의 대가라고 일컫는 헤겔은 작가의 정신적인 것이 내재된 예술품에나 아름다움이 깃들어 있다고 보고 그를 예술미라고 불렀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그가 자연미라는 용어를 쓴 이유는 자연의 아름다움 속에는 생동성이 들어있기 때문이다. 어쨌든 작가의 정신적인 면을 고려하여 자연미보다는 예술미를 더 상위의 것으로 본 헤겔의 견해는 완전히 잘못된 시각이다. 우주야말로 창조주(작가) 하느님의 전지전능한 지혜와 설계로 만들어진 것이다. 즉, 자연 속에는 작가로서 창조주의 지혜가 충만하게 내재된 곳이다. 따라서 작가의 정신이 내재된 예술품만이 아름답다라고 한 헤겔의 관점에서 보면 자연은 창작된 예술품 이상의 그 무엇이다. 예술품은 언제나 같은 색채와 같은 모습을 보여주는 물체이며 생명이 없는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다. 그러나 시시각각 전방위로 형형색색의 살아있는 생명의 모습을 보여주는 창조주의 작품 숲처럼 아름다움을 간직한 것은 없다고 본다.

인간의 감정이 표출되는 것은 외부세계의 모습을 봄으써 가능해진다. 외부세계의 좋은 면, 즉 아름다움을 보고 감정이 움직이게 되고 그것에 감탄하여 소리를 내게 되는 것이다. 여러 분은 이제 숲으로부터 그것을 발견해내는 기술을 터득해야 한다. 

 숲의 아름다움은 생명성(生命性)에 있다.

나뭇잎이 떨어진 늦가을부터 숲은 동면의 세계로 들어간다. 북풍으로 살을 에이는 혹한에도 숲은 죽은 듯이 고요하지만 살아 숨쉬고 있다. 이윽고 봄이 되면, 지난 가을에 떨어진 씨앗도, 가녀린 일년생 어린 나무도, 100살이 넘은 고목도 어김없이 새 생명의 눈을 뜬다. 가장 혹독한 추위를 당했을 천년이 넘은 은행나무의 가장 높은 가지 끝에 달린 정수리 눈도 얼어죽지 않고 당당히 생명의 잎을 내보인다. 엄동설한을 이겨내고 피우는 잎과 꽃의 모습을 가만히 들여다보고 있으면 가슴은 금방 거룩함과 신기함과 아름다운 감동으로 고동친다.

 숲의 아름다움은 연출성(演出性)에 있다.

일 년 네 계절동안 나무는 자기 생명을 바쳐 온 몸으로 다양한 각색을 통하여 자신을 연출한다. 때로는 벌거벗은 몸으로, 때로는 연둣빛 적삼으로, 신록과 색동옷으로, 그리고 때로는 하얀 소복차림으로 숲에 등장하곤 한다. 이 세상 그 어느 예술품이 이처럼 사시사철 각기 다른 모습과 아름다움으로 사람의 시선을 끄는 것이 있겠는가. 뿐만 아니라 숲 바닥에 깔린 온갖 기화요초(琪花瑤草)들을 좀 보십시오. 오로지 숲에서만 풀과 나무의 시시각각 변하는 형형색색의 아름다운 모습을 볼 수 있다.

 숲의 아름다움은 영속성(永續性)에 있다.

바다의 생명체가 육지로 상륙하고 이윽고 거대한 숲이 탄생하였다. 수억년, 수백만년의 세월이 흐르는 동안 숲은 자신의 본래의 모습을 많이 잃기는 하였지만 여전히 우리의 곁에 있다. 장구한 영겁의 세월 속에서 찰나에 불과한 인간의 역사를 비웃으며 끈질긴 생명의 영속성을 보이고 있는 것이 숲이다.

 숲의 아름다움은 감각성(感覺性)에 있다.

아름다운 열매, 아름다운 향기, 아름다운 (새)소리, 아름다운 풍경, 신선한 바람과 물로 우리의 오감을 한꺼번에 만족시킬 수 있는 곳은 숲 이외에는 어느 곳도 없다. 뿐만 아니라 오감의 만족으로 정신적인 아름다운 감정을 불러일으킬 수 있으니, 예술미보다도 더욱 미적인(aesthetic) 감흥을 맛볼 수 있는 곳이 숲이다.

 숲의 아름다움은 신성(神性)에 있다.

높고 절묘한 바위산 설산보다도, 깊고 넓은 바다보다도, 그리고 높고 푸른 하늘보다도 숲은 더 아름답다. 이렇게 아름답게 창조할 수 있는 것은 누구일까요. 미술관에 전시된 모나리자나 박물관에 전시된 이조백자를 만든 사람도 아니다. 그것은 바로 자연과 숲의 창조자일 것이다. 고요하고 적요(寂寥)의 분위기에 접어들면 신령스러움을 느낀다. 울창한 숲에 들어서면 신비스러움이 우리의 마음을 지배하는 듯하다. 그런 성스러운 분위기 때문에 숲은 더욱 아름답다.

한 그루 한 그루의 나무는 자연의 예술품이며, 숲은 그들이 살아 숨쉬는 생명체로 정갈하게 진열되어 있는 산 박물관이다.

 숲의 사계

숲은 자연미로서의 특성(생동성과 생명력)을 지니고 형식(규칙성, 법칙성, 조화) 속에서 인간의 육감(六感)을 통해서 '아름다움'을 선사한다. 이 아름다움은 한 시점에 머물러 있지 않고 시시각각 변화하는 과정 속에서 유동한다. '시간의 흐름'이라는 우주만물의 섭리 가운데 나무와 숲이 가진 아름다움도 변화하며 사계절의 변화 속에서 끊임없이 반복된다.

 봄 숲에서는 한 편의 시를 대하는 듯하다.

봄 숲을 생각하면 산사(山寺)로 향하는 산모퉁이 양지바른 곳에 홀로 핀 채 석양에 고요하게 빛나는 산수유나무를 떠올린다. 정적의 숲 속에, 적연(寂然)의 산중에, 노오란 빛으로 홀로 온 숲을 밝히는 산수유가 아름다운 계절이 봄이다. 그러한 정경(情景)을 만날 때마다 가슴은 온통 그리움과 아련함으로 울렁인다. 그같은 설레임으로 가득 찬 시같은 풍경이 봄의 숲이다.

 여름의 숲에선 무슨 별곡같은 느낌을 받는다.

오뉴월 숲에 이어지고, 시원하게 초록빛으로 말끔히 갈아입은 청산같은 숲의 모습을 연상하기 때문이다. 탐욕으로 얼룩진 속세를 떠났던 산림학파가 녹음으로 우거지고 맑고 시원한 계류가 있는 숲 속의 초당에 머물며 별곡을 읊으며 살았던 삶같은 것도 생각나게 하는 것이 여름의 숲이다.

 가을 숲은 대서사시이다.

단풍으로 물들고 낙엽지는 가을의 숲에서는 화려함과 장엄함, 그리고 어떤 영웅들의 역사를 읽는 것같은 웅장한 느낌을 받는다.

 겨울 숲을 바라 보노라면 소설을 대하는 듯한 분위기를 준다.

잎떨어진 겨울 숲을 보면 길고 지리하고 춥고 쓸쓸한 이미지를 연상한다. 산등성이마다 이 골 저 골로 줄줄이 타고 내려오는 벌거벗은 나무들의 행렬이 장편 소설같은 길고도 먼 옛날 이야기 보따리들을 지고 오는 것 같은 느낌을 받는다. 겨울 숲은 소설이다.

오월의 숲, 그것은 수필과도 같다. 어떤 이는 수필의 색깔은 황홀 찬란하거나 진하지 아니하며, 검거나 희지 아니하고 퇴락하여 추하지 않고, 언제나 온아우미하다고 한다. 오월의 숲은 우아한 수필처럼 길지 않게, 맑고 밝고 아름다운 모습으로 잠깐 우리 곁에 머물다 간다.

오월은 계절적으로 말하면 늦봄과 초여름의 중간에 자리한 시기이다. 5월 중에서도 상순은 나무의 표정이 가장 잘 나타나는 때이다. 가녀린 잎과 다소곳한 빛깔로, 혹은 침엽수같이 우뚝 솟은 나무들은 자기의 키로 각자의 영역을 분명하게 표시하며 자신이 다른 나무와 다르다는 것을 그대로 연출하는 때가 바로 오월 상순이다. 산비탈에 펼쳐진 그런 숲 속의 나무들을 바라보고 있으면 춘추전국시대의 군웅할거(群雄割據)를 연상케도 한다.

감성 발굴과 숲 감상법

 감성 발굴을 위한 7가지 기본원칙 - 가슴 깊이 내재되어 있는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방법은 범상한 생각을 하지 않고 좀더 비범한 태도를 갖는 것이다. 이를테면 이른 봄에 숲길을 걸어가는데 양지쪽에서 한 송이 꽃을 조우하였다고 하자. '아, 꽃이구나, 진달래꽃이네. 이젠 완연한 봄이구나. 세월은 참 빠르기도 하지' 하고 그냥 지나친다면 이런 식의 감상은 일상적이고 범상한 감상법이다. 감수성을 높이는 데에는 다음과 같은 일곱 가지 방법이 기본적인 것들로서 숲에 들어갔을 때 시도하여 볼 것을 권장해 본다.

 첫째, 시선이 관찰 대상에 좀 더 오래 머물도록 해야 한다.

말하자면 시선이 숲(나무, 꽃, 잎, 열매 등)에 머무는 시간을 길게 가져야 한다는 말이다. 바라본 시간이 짧다면, 즉 관찰대상에 다가가서 관찰하고 상상하거나 몰입하는 시간이 짧다면, 지각 총량이나 감정 발로의 양은 적을 수밖에 없다. 이러한 의미에서 우리나라 등산객이나 숲 탐방객들의 보행 속도는 너무 빠르다. 숲 탐방객들은 그래도 낫지만, 등산객들은 무슨 경보대회에 출전한 선수들처럼 빨리 올라가서 빨리 밥먹고 빨리 내려오는 것이 의무처럼 되어 있다. 무엇을 관찰하는가. 정상에 올라가서 '야호!'(원래 구조신호임) 외치고 내려오는 것이 고작이고, 누가 자기보다 앞에 빨리 올라가고, 내 뒤에서 늦게 따라 올라오는 이는 누군인가를 기억하는 정도에 지나지 않는다.

 둘째, 눈앞에 전개되는 정경을 비범하게 보아야 한다.

시야에 들어오는 것을 무의식적으로 보지 말고 늘 의식을 갖고 보아야 한다. 예를 들어 버스를 타고 갈 때 승객이 되지 말고 운전수가 되어야 한다는 뜻이다. 운전수는 거리에서 교통에 참여하는 모든 것들을 그의 의식 속에 담아 주의를 게을리 하지 않고 있어야 하지만, 승객은 운전수가 데려다 주기만 하면 됨으로 주위 교통에 대해서 아무런 관심을 갖지 않는다. 의식적으로 보행하면 관찰할 것이 보이고 그 속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을 지 모를 놀라운 경이의 세계를 발견할 것이다.

셋째, 관심거리를 발견했을 땐 관찰과 상상, 연상으로 몰입해야 한다.

꽃 한 송이, 나뭇잎 한 잎, 곤충 한 마리를 발견하더라도 먼발치에서 방관하지 말고 가까이 다가가서 경관을 상세히 관찰하도록 한다. 꽃잎의 수, 암술머리의 위치, 수술의 수를 관찰하고 있노라면 벌이 날아와서 꽃잎에 침을 놓거나 꿀샘에 빨판을 찔러 넣는 모습을 관찰할 수 있는 행운도 잡을 수 있다. 또한 꽃의 복잡한 구조를 보면서 과연 이것이 진화의 산물인지, 창조의 산물인지 확신할 수 있는 큰 은혜와 대영광의 순간을 만끽할 수도 있다.

숲의 밤풍경은 상상과 연상의 나래를 펴기에 아주 적합한 장소이다. 깊은 골짜기에서 하늘빛과 어둠에 드러난 산풍경을 보면 갖가지 생각들이 연상된다. 검은 산의 윤곽과 그 밑에 보일 듯 말 듯 숨어 있는 길고 뾰족한 삼각형으로 서 있는 침엽수 무리들, 그리고 스카이 라인 바로 위에 걸려있는 달이 자아내는 풍경은 거의 40여년 전 초등학교 때 처음으로 보았던 크리스마스 카드의 그림을 연상하게도 하였다. 그 시절로 돌아가 보기도 한다. 밤 풍경은 낮의 풍경보다 감정을 자극하고 연상하는데 훨씬 많은 도움을 준다. 주변이 조용해서 집중하기에 좋고 그 만큼 사고력이 증가하기 때문일 것이다.

넷째, 움직일 때는 매직아이 기법으로 감상한다.

일반적으로 인간의 감수성은 정지해 있는 물체에서보다 움직이는 대상에서 크게 작용한다. 따라서 미세한 움직임이라도 시선을 끌게 되기 때문에 관찰자로 하여금 이목을 집중시키게 된다. 만약 관찰 대상이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관찰자가 움직인다면 어떻게 될 것인가? 매직아이 기법으로 숲을 감상하면 정지되어 있던 나무들이 나의 주변으로 몰려드는 느낌을 주며, 숲의 풍경이 입체경으로 보는 듯한 느낌을 주게 된다. 그렇게 된다면 이제껏 경험하지 못했던 새로운 감각으로 숲의 세계를 체험하게 될 것이다. 이 기법에 대해서는 다음의 숲 감상법에서 다시 설명한다.

 다섯째, 감각의 안테나를 총동원하여야 한다.

숲에 들어가서는 인간이 가지고 있는 기본적인 5감각의 안테나를 길게 쭈욱 뽑아 안테나 끝으로 전해오는 정보를 몸 깊숙이 받아들일 준비를 해야 한다. 숲에 있는 모든 것들을 보고 듣고 맛보고 냄새맡고 만져보고 느껴서 각자의 감각이 제대로 작동하고 살아있는가 확인해야 한다. 그를 통해 들어온 외부 세계의 자극들은 경험과 지식의 정보 창고 속에 차곡차곡 채워 넣어야 한다.

 여섯째, 숲이나 나무에 대한 기본지식은 알아두자.

알고 보면 기쁨이 두 배로 증진된다는 말이 있다. 아무런 지식없이는 관찰로부터 얻는 양은 많을지 몰라도 만족감은 떨어진다. 가령 이것이 무슨 나무이고 무슨 꽃이며, 잎 뒤에 흰줄이 있는 특성이 있는 것은 무엇이고, 잎에 털이 나 있는지 없는지, 진달래 꽃으로 빚은 술은 무슨 병에 효험이 있으며, 바늘 잎이 두 개 달린 것은 소나무인지 잣나무인지, 숲 속에 있는 음이온은 인체에 어떤 작용을 하는지, 테르펜과 피톤치드는 무엇이 다른지 등을 가릴 줄 안다면 같이 간 동료에게 설명도 해줄 수 있고, 또 자기가 궁금해하는 것을 들고 간 책을 통해 확인할 수도 있다면 즐거움이 배증됨은 물론이다.

 일곱째, 기록과 읽을거리를 가져가자.

바위틈이나 계곡 개울가, 소나무 그늘 아래, 양지쪽 등지에서 그때  그때 쉬면서 연상되었던 장면이나, 시처럼 아름다운 글귀를 상상해 보았다면 그런 것들은 기록해 두자. 기록된 것은 단순한 문자가 아니라 감정의 기록이며 시간이 지나면 아름다운 영상이오 풍경이며 추억으로 남는다. 또 주변 풍경이나 잎, 꽃 등을 스케치해 놓으면 더욱 좋은 자료가 될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숲에 갈 때 쓸 작고 두터운 노트를 하나 준비해 두는 것이 좋다. 또한 나무나 숲, 자연을 읊은 시집, 수필집은 조용한 숲에서 잠시 쉬고, 숲의 풍경에 푹 파묻히는 데에 도와 줄 더 없이 좋은 친구가 될 것이다.

 숲 감상법

숲은 인간의 감정을 자극하는 독특한 요소들을 가지고 있다. 숲의 빛(색), 향기, 소리, 공기 등이 그것이다. 그것들을 우리의 육감(六感)을 통해 체험함으로써 깊이 잠자고 있는 감성을 깨워 일으키는 데에 도움을 주고자 한다.

요즈음에 등장하는 영상 광고 내용에서 감각적으로 호소하여 구매력을 향상시키고자 하는 장면들을 많이 본다. 특정한 소리를 내어 청각을 자극한다든가, 흑백 화면에 특정 부분만 색깔로 강조하여 시각을 자극한다든가, 양념 광고의 경우 찌개가 보글보글 끓는 소리를 내는 장면을 보여주어 시각과 청각과 미각을 한꺼번에 자극하는 화면을 자주 본다. 이러한 오감을 자극하여 마케팅하는 광고는 구매력 향상에 상승 작용을 한다고 한다. 그것은 빛(색), 소리, 맛, 냄새, 접촉 등 인간이 가진 주요한 다섯 가지 감각인 오감에 호소하는 것이 고객으로 하여금 기억에 오래 남고 더 자극적이기 때문이다. 다른 말로 표현하면 비록 간접 경험이긴 하지만, 마치 현장에서 체험하는 것과 같은 느낌을 받게 되어 짧은 시간 안에 행동으로 옮기게 되는 것이다. 감각에 호소하는 것은 그만큼 효과가 있다.

귀로 한 번 들은 것을 반복하여 머리 속에 저장하지 않으면 3시간 후에는 들은 것의 30%을 잃어버리고 3일이 지나면 90%을 잃어버린다고 한다. 또 눈으로 본 것은 3시간과 3일 후에 각각 28%, 80%을 잃는데 반하여, 듣기도 하고 보기도 한 것은 3시간 후에는 15%, 3일 후에는 35%을 잃어버리게 된다고 한다. 또, 어떤 이는 말하기를 자기 스스로 몸소 해 본 것은 90% 정도를 기억하게 된다고 한다. 실질적인 체험의 중요성을 말해주고 있다.

숲을 찾을 때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한다. 휴양림이나 숲을 단순한 방문이나 휴식 목적으로 와서 지내고, 너도 나도 좋다니까 '산림욕'이라는 것도 해 보면서 그저 '걸어보는' 행위로 끝내서는 안 된다. 우리 몸 속에 있는 감각 기관을 총동원하여 체험해 보아야 한다. 그래야만 감각이 살아있는 것을 느낄 수 있고, 숲이 무엇인가를 이해할 수 있으며, 숲 속의 휴양의 참 맛을 터득할 수 있다.

숲 속에 들어서면 내 몸에 있는 모든 감각기관이 안테나를 뽑아 내는 듯한 느낌을 받는다. 냄새맡기 위해 코를 벌름거리며, 소리를 듣기 위해 귀를 열어 놓고 쫑긋거리고, 무엇인가를 보고 찾기 위해 눈을 두리번거리고, 피부의 모든 숨구멍을 열어 놓고 근육을 움적거려 보고 혀의 미뢰도 자극하여 본다.

형형색색, 식물이 나타내는 수천 수만 가지의 빛깔, 나무와 잎과 꽃이 보여주는 절묘하고 기묘한 오만가지 모양새들. 새, 바람소리, 물소리, 자연의 소리. 코를 마비시키고 정신을 황홀케 하는 숲의 향기. 쓴 맛, 단 맛, 신 맛, 짠 맛 등 우리가 느낄 수 있는 모든 입맛을 제공하는 갖가지 열매와 산나물. 숲 속의 시원한 공기, 계곡 물에서 느끼는 기분. 이러한 무궁 무진하고 변화 무쌍한 숲의 세계가 눈을 통해서, 귓가로, 혀끝에서, 코끝으로, 또 손끝에 전달되어 미로의 신경조직을 타고 뇌 속에 전달되는 쾌감을 느껴보아야 한다. 그것이 숲을 찾는 묘미가 되지 않을까.

숲은 풀, 나무, 곤충 등 살아있는 동식물과 물, 공기, 흙 등 죽은 무생물로 이뤄져 있지만 자연의 변화에 따라 움직이는 거대한 복합 생명체이다. 살아있는 숲은 네 계절을 통하여 다양한 모습을 연출하며 감각을 가지고 있는 우리는 그것을 직접 확인해 볼 수 있다. 살아있는 생명체로서의 숲은 감각을 가지고 있으므로 그를 인간의 감각으로 이해하는 것은 대단히 즐거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눈으로 감상하기 - 시각에 의한 숲 관찰은 눈으로 나무와 숲의 모습을 관찰하는 것이다. 보는 즐거움을 찾아보자. 눈은 몸의 등불이니 눈이 성하면 몸이 밝아질 것이다(마태복음). 앞서 제안한 7가지 기본원칙을 지키면 트인 눈으로 숲을 볼 수 있을 것이며 몸 속에서 잠자던 감정들이 꿈틀대며 요동칠 것이다.

식물이 가지고 있는 눈, 잎, 가지, 줄기, 껍질, 전체 모양새 등을 살펴봄으로써 그 식물이 가진 외부 구조를 알게 된다. 나무의 경우에는 그 나무의 윤곽(둥그런 모습인지, 길쭉한 모습인지, 누운 것인지 등), 가지 뻗는 모양, 잎의 모양새, 각 기관이 가지고 있는 빛깔 등을 파악하게 되고, 숲의 경우에는 숲 전체의 모양과 색깔의 변화 등을 관찰할 수 있게 한다. 시각적 관찰을 통해서 식물의 기관이 보여 주는 각양 각색의 외부 형태와, 계절적인 변화로 연출해 내는, 우리가 구별해 낼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수백 수천의 색깔을 볼 수 있게 한다. 숲을 먼 발치에서 보는 것도 다른 느낌을 주지만 될 수 있는 대로 가까이 가서, 가지, 잎, 줄기, 꽃 등을 자세히 들여다보도록 해야 한다.

봄에 나오는 새 잎을 보면, 갓 태어난 병아리 발가락에 적나라하게 뻗어있는 실핏줄 조직을 보듯이 훤히 드러나 보이는 엽맥을 볼 수 있다. 잎이 가지고 있는 실핏줄이다. 꽃도 자세히 들여다보자. 암술, 수술의 모양새, 색깔, 꽃잎의 생김새, 꽃밥 등 이것저것 꼼꼼히 들여다 보노라면 자연의 신비함과 오묘함에 어느덧 넋을 잃고 말 정도로 황홀감에 빠져들 것이다. 시지각이 아니면 도저히 느껴 볼 수 없는 경험이다.

숲을 찾을 때는 시기도 잘 선택해야 한다. 봄과 가을에 숲이 가진 색깔의 변화를 일정한 시간적인 간격으로 관찰하면 신비로운 숲의 세계를 만끽할 수 있다. 언젠가 한 번쯤 광릉같은 울창한 숲을 대상으로 주기적인 관찰을 꼭 해보기를 독자 여러 분에게 권하고 싶다. 해마다 조금씩 차이가 있기는 하지만, 봄에는 5월초에서부터 5월말까지, 가을에는 10월초에서 11월초까지가 숲을 눈으로 즐기기에 알맞은 시기이다.

낮에만 관찰할 것이 아니라 밤에도 숲의 모습을 보자. 달빛에 물들어 있는 숲의 모습을 본 적이 있는가. 달빛 고요한 밤에, 계수나무의 잎이나 떡갈나무의 잎에 쏟아지는 달빛을 보라. 아니면, 휴양림의 통나무집에 묵고 있다면, 산막 가까이에 흐르는 개울가에 앉아서 물에 쏟아지는 별빛도 한 번 찾아 보라. 그리고 숲의 고요함과 적막감도 느껴보자. 또한 아침나절과 저녁 무렵, 나뭇잎 빛깔들이 뜨는 햇살과 지는 햇살 끝에 비쳐져서 자아내는 눈부시게 아름다운 숲의 정경을 체험해 보자.

 귀로 감상하기 - 숲으로 온 우리는 모두 도회지 문명 세계의 소음 환경으로부터 떠나온 처지이다. 시장의 아우성 소리도, 호프집의 지껄임도, 골목의 왁자지껄하는 소란도, 사무실의 컴퓨터 소리도 이제는 더 이상 들리지 않는 숲으로 들어와 있다. 인간의 소리가 들리지 않는 숲의 소리를 들어보자.

청각에 의한 관찰은 숲 속에서 들리는 바람소리, 새소리, 물소리, 곤충이 나뭇잎 갉아먹는 소리 등을 관찰하는 것을 말한다. 듣는 즐거움을 찾아보자.

겨울에 찾는 소나무 밭에서는 솔잎 사이를 '쏴아, 쏴아' 빠져 지나는 바람소리에 오욕 칠정이 한순간에 가시는 기분이 든다. 오월의 조용한 숲속에서, 이 골짜기 저 골짜기를 타고 들려오는 그윽한 뻐꾸기와 꾀꼬리 울음소리를 듣노라면 고독함과 평화로움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광릉의 봄 숲속에서는 크낙새와 딱따구리의 드럼치는 소리가 일품이다. 여름의 숲속에서는 매미우는 소리와 여치소리, 가을의 참나무 숲속에서는 도토리 떨어지고 구르는 소리가 들을 만할 것이다.

거의 모든 나무가 잎을 떨구고 줄기와 가지만 적나라하게 서있는 활엽수 숲의 늦은 가을날, 아직 아무도 걸어가지 않는 고즈넉한 숲길을 산책할 때, 발치에서 전해 들리는 낙엽 밟는 소리를 듣는 것은 어떨까. '스각 사각 스각 사각' 낙엽 밟히는 소리, 그 소리가 다시 '스아악 사아악' 빈 숲 속으로 바람처럼 안개처럼 들릴 듯 말 듯 울려가는 소리를 들어 보라.

어느 때보다도 밤에 숲의 소리를 들어보자. 낮에 듣는 것은 여러 모로 불편하다. 눈에 보이는 것이 많아서 정신이 혼미하고 집중에 어려움이 있으며, 낮에는 아무래도 소음이 많다. 밤에는 보이는 것이 없고 잡음도 없으려니와 다만 소리를 들을 수 있을 뿐이다. 물론 낮에 우는 새소리는 들을 수 없다.

밤은 고요하고 적막하지만 고요와 적막 속에서 들려오는 자연의 소리, 숲의 소리는 인간으로 하여금 한없이 무아지경의 상태로 이끌어 간다. 들릴 듯 말 듯, 가까이서 혹은 멀리서 가련히 들여오는 이름모를 풀벌레 울음소리를 들어보자. 밤에 운다는 슬픈 사연을 간직한 소쩍새 울음소리도 들어보자. 그러나 통나무 집 앞에 흐르는 계곡물소리는 어떤가.

이제 숲속에서는 더 이상 문명세계의 기계소리는 들리지 않는다. 일상생활에서 늘 귓전에 웅웅거리던 소음은 들을 수 없을 것이다. 도회지의 소음 환경에서 벗어났으니 안심하고 자연의 소리, 숲의 소리를 들어보고, 이윽고 자기 자신의 저 깊은 내면에서부터 들려오는 소리를 느껴보자.

숲을 멀리 바라보면 우선 생명이 넘실대는 역동성에 취하게 된다. 그러나 숲을 가까이 들여다보면 생명이 아우성치는 소리에 감탄한다. 나무에 걸터앉아 지저귀는 새의 울음소리, 곤충의 울음소리와 저작(詛嚼)소리, 잎사귀와 가지를 스쳐 지나는 바람소리, 나무줄기를 타고 내려오는 하늘의 소리, 돌뿌리를 돌아 흐르는 개울 물소리가 한데 어울려 기가 막힌 오케스트레이션을 한 작품을 연주하는 듯, 숲은 마치 음악회를 열어 놓은 연주회장 같다. 천지간의 음악 레퍼토리 중 이처럼 듣기 좋은 음악도 있을까. 나무는 악기, 숲은 콘서트 홀이다.

 입으로 감상하기 - 미각으로 숲을 관찰하는 것은 어렵지 않으며 가장 즐거운 관찰 방법 중의 하나이다. 먹는 즐거움만큼 인간의 생리적인 즐거움을 극대화시켜 주는 것도 드물 것이다. 이것 또한 숲 속에서 얼마든지 찾을 수 있다.

인간이 감지하는 맛은 4가지로 구분한다. 단맛, 짠맛, 신맛, 쓴맛이 그것이다. 밥상에 차려진 음식물 속에만 맛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손으로 만든 음식은 간장, 된장, 고추장, 식초, 설탕, 후추, 부추, 파 등 수없이 많은 양념과 조미료를 사용해야 비로소 네 가지 맛을 고루 낼 수 있다. 그러나, 숲에는 그런 것들이 없을 지라도 봄, 여름, 가을, 겨울에 걸쳐 들녘의 오곡 백과만큼이나, 산해진미로 차려진 밥상만큼이나 많은 먹거리가 풍성하여 언제나 입을 즐겁게 해 준다. 풋풋한 산나물, 산딸기, 버섯, 도라지, 더덕, 머루, 다래, 보리수 열매 등 미각을 자극하는 것들이 무궁무진하다. 얼마든지 있으니 관찰의 기회를 꼭 가져야 한다.

예전이나 지금이나 숲에 가면 늘 소나무나 잣나무 잎을 한 두 개씩 따서 잎에 넣고 짓물어 보는 습관이 있다. 신경끝으로 전해오는 무엇이라 형언하기 어려운 알싸한 쾌감을 느끼곤 한다. 첫 입에 깨물었을 때, 식물세포가 터지면서 쏟아져 나온 즙액이 혀 안에 있는 미뢰에 접촉되면서 이윽고 입안에 확 퍼지는 알싸한 기분. 내 몸의 감각이 살아있는 것을 확인하고 신경이 작동하고 있는 것을 느껴 보라. 숲은 발로 탐방하는 것이 아니며 온몸으로, 온 감각으로 탐방하는 것이다. 습관이 붙으면 숲 탐방하는 즐거움이 절로 날 것이다.

 코로 감상하기 - 후각에 의한 관찰은 코로 식물이 가진 냄새를 관찰하는 방법이다. 냄새는 다른 어떤 종류의 감각보다 가장 자극적이면서 가장 낭만적인 즐거움을 준다. 냄새맡기에 좋은 향기를 내는 방향의 경우에만 그렇다.

맛을 표현할 때는 달고, 짜고, 시고, 쓰고 등 기본적으로 표현하는 말이 있으나, 냄새를 표현하는 데에는 적절한 낱말이 없다. 다만, 식물 자체의 이름을 붙이거나 식물 조직의 이름을 사용하여 무슨 무슨 냄새라고 표현한다. 그래서 소나무 냄새, 참나무 냄새, 더덕 냄새 등 숲의 냄새는 식물 종류만큼이나 많고 다양하다.

숲속에는 피어 있는 꽃만이 냄새를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다. 모든 식물의 기관(줄기, 가지, 잎, 뿌리 등)이 다 자기만의 독특한 냄새를 뿜고 있어서 그것을 관찰할 수 있게 한다. 생강 냄새도 맡을 수 있고(생강나무), 때로는 솔 향기와 더덕의 향기에 취할 수도 있고, 독특한 한국적인 구린내(오대산 전나무)도 맡아 볼 수 있다. 더덕 냄새는 이제 누구라도 구분할 수 있는데, 냄새나는 낌새만 느끼면 더덕을 찾으려 코를 벌름거리는 모습을 보는 것이 참으로 즐겁다.

산림욕의 효과를 극대화시켜 주는 테르펜의 냄새는 어느 문헌을 보아도 적절한 표현없이 '방향' 혹은 '향기' 등으로 표현하여 '이것이 테르펜의 냄새다'라고 말하기가 곤란하다. 다만, 침엽수 숲에 들어가면 느낄 수 있는 상큼하고 시원하며 향기있는 공기를 느낄 수 있다면 그것이 곧 테르펜의 냄새라고 생각하면 될 것이다.

숲 속에 있는 발산물질의 성분 중에는 인체 건강에 유익한 성분이 들어 있는데, 이것은 특히 호흡기와 관련한 질병에 대단히 효과가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특히 테르펜이 많이 발산되는 침엽수림(소나무 숲, 잣나무숲, 편백나무 숲, 삼나무 숲 등)은 요양하기에 적합하여 휴양림이 많이 조성되어 있다. 또, 이러한 휴양림 안에는 향기를 내는 방향성 초본식물(풀)을 이용하여 방향 식물원을 만들어 이용하게도 한다.

 피부로 감상하기 - 촉각에 의한 관찰은 피부의 촉감을 이용하는 것이다. 촉감은 정과 사랑, 미움을 느끼게 하는 감각 중의 하나이다.

 피부로 느끼는 감각의 차이는 온도 차이에 의할 수 있고, 닿는 물체의 질감에 의할 수 있으며, 압박에 의할 수도 있다. 이로써 시원함과 따뜻함, 거칠음과 매끈함, 부드러움과 딱딱함, 연약함과 강함, 가벼움과 무거움을 느끼게 될 것이다. 이런 감각은 숲 속의 물, 숲 속의 공기, 나뭇잎, 꽃, 줄기, 가지에서 다 경험할 수 있다. 숲 속에 흐르는 개울물에 손과 발을 담가 보고, 나뭇잎과 줄기와 가지를 만져보면서 차가움과 따스함, 시원함과 쇄락함을 맛보며, 부드러움과 거칠음, 딱딱하고 말랑말랑한 감촉에 젖어 볼 일이다. 물론 맨발로 숲길을 걸어 보는 것도 참으로 즐겁고 건강에도 좋은 일이다.

그러나, 숲에는 우리의 피부 접촉으로 피해를 입히는 식물이 많이 있으므로 주의할 일이다. 나무가시나 풀잎으로 찔리고 긁혀서 생채기가 나고, 즙액으로 옻오름이나 가려움에 시달리며, 곤충에 물리는 등 예기치 않은 불쾌한 경험을 할 수 있는 위험성이 도처에 도사리고 있다. 이런 것들을 주의하지 않으면 숲 탐방의 묘미를 한꺼번에 나쁜 쪽으로 경험하게 된다. 이런 이유로 숲에 갈 때는 여름철이라도 긴 팔을 입는 것이 바람직하다.

 가슴으로 감상하기(제6감) - 눈, 귀, 입, 코, 피부 등 이 모든 감각기관을 총동원하여 숲을 보고, 듣고, 맛보며, 냄새맡고, 느껴봄으로써 숲과 더 가까워지고 이해하게 되며, 이 과정에서 자기의 감각 기관이 제대로 기능을 발휘하고 있는지를 확인해 볼 수도 있다.

오감에 의한 숲 관찰 과정을 거치면 마지막으로 생명체인 숲을 가슴으로 느껴 보는 이른바 숲을 정서적으로 감상함으로써 숲 관찰을 정리하게 되는 것이다. 숲을 정서적으로 관찰하는 것이란 숲을 관찰함으로써 정신적인 감흥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눈, 귀, 입, 코, 피부로만 숲을 보고 느끼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숲 속을 흐르는 물을 보더라도 '아, 물이 흐르는구나, 시원하고 차갑구나' 하는 따위의 현상과 감각으로만 보고 느껴서는 안 된다. 가령, 오늘 아침 부엌 수도꼭지에서 떨어지는 물이, 내가 며칠 전 잤던 통나무집 앞에 흐르는 계곡물의 일부일지도 모른다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수도꼭지의 물은 저 먼 강원도 산골짜기 휴양림 통나무 집 앞을 흘러 지나가던 바로 그 물일지도 모른다. 숲 속으로부터 나온 물이 없다면 전등 불빛으로 이처럼 밝은 세상을 비춰줄 수 있을까 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역시 드물 것이다.

숲 속에는 나무만 있는 것이 아니고, 꽃이나 새만 있는 것이 아니다. 숲 속 통나무 집 섬돌에 앉아 고고한 달빛 속에 들려오는 숲의 소리를 들어 보라. 밤새소리, 개울물소리, 풀벌레소리. 달빛에 물든 나뭇잎의 일렁임을 보라. 이윽고 내 주위에 깊숙이 깃든 숲의 고요함과 적막감을 느껴 보라. 이것이 진정한 평화요 자유요 행복이고 즐거움이 아닐까.

그뿐이랴, 가을에 물들어가는 단풍이나 묵직하게 익어가는 열매를 보고 있노라면, 그 속에 깃든 깊은 철학적인 의미도 새겨볼 수 있다. 숲의 정경으로부터 얻은 영감으로 작곡된 불후의 명작은 헤아릴 수 없이 많으며, 나무나 숲을 소재로 하거나 배경으로 묘사한 불멸의 시, 소설, 수필도 얼마든지 있다. 그뿐인가, 식물과 숲이 화가의 화폭에 옮겨지는 사례는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이다.

숲에는 인간의 생리적인 양식과 정신적인 양식이 묻혀있다. 잎과 가지와 줄기, 그리고 꽃과 열매로부터 인간의 감각이 균형잡히고, 숲에서 얻어진 그 감각으로부터 사색과 철학이 정리되고 시와 예술이 창조되고 있다. 인간의 의식주를 해결하는 것도 숲이요, 인간을 인간답게 살아가게 하는 정신적인 양식이 되는 철학과 문학과 예술의 시작도 숲이다. 숲의 시작은 곧 모든 것의 시작이며, 숲의 끝은 모든 것의 끝이다. 결국 숲은 인간 삶의 알파와 오메가인 셈이다.

이런 생각을 하면서 숲을 거닐며 하루를 보내는 것은 어떨지. 물론, 어떤 사물에 대해서 느끼는 사람의 생각에는 한계가 있고 또 관점이 다르기 때문에 공통된 인식을 갖기는 매우 어렵다. 그러나 숲을 보는 방법과 요령을 터득하면 숲의 가치에 대해서 자연스럽게 공감하게 되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그렇게 되기 위해선 충분한 시간적인 여유를 갖고 숲을 탐방해야 한다. 숲에 오는 것은 단숨에 정상을 정복하려는 등산이 아니기 때문이다. 사색에 필요한 시집이나 수필집도 필수적으로 지참해야 한다.

 입체적(매직아이 기법)으로 감상하기 - 매직 아이(magic eye)를 가지고 평면 그림을 보면 그 그림이 멋진 입체 그림으로 보인다.

일상생활에서 우리가 보는 대상들은 평면과 입체로 되어 있다. 하지만 입체로 된 물건이라 할지라도 입체감을 거의 느끼지 못하거나 평면으로 인식되는 수가 많다.

숲을 산책할 때도 마찬가지이다. 숲에 들어갔을 때 나무가 서 있는 상황이 비록 입체적이라 할지라도, 즉 숲이라는 공간이 입체적으로 구성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입체적인 느낌을 거의 받지 못한다. 그것은 보행할 때 시점이 보행 속도(보행자의 위치)와 평행하게 움직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매직아이와 같은 방법으로 숲을 관찰하면 입체경을 볼 때와 같은 효과를 얻을 수 있다.

시점(視點)을 숲 안의 어느 한 점에 고정시키고 천천이 걸어 보자. 관찰환경을 원이라고 가정하고 시점을 원의 중심에 고정시키고 원의 중심, 즉 시점을 중심으로 시점을 바라보면서 서서히 움직이면 시점과 눈 사이에 정지된 채 서있던 물체들은 관찰자가 움직이는 반대 방향으로 비켜나가면서 입체경으로 보는 듯한 효과를 느끼게 된다. 이 같은 효과는 숲 안의 풍경이 다채로울 때 더욱 뚜렷하다. 즉, 거의 초록으로 물들어 색깔이 통일적인 여름철보다는 이른 봄철 나무들마다 새잎으로 단장할 때나 가을철 각양각색의 단풍으로 물들었을 때 경험하기 좋다. 숲을 입체경으로 보는 듯한 체험은 실내에서도 가능하다. 숲을 촬영한 슬라이드 사진을 초점이 완전한 지를 검증하는 렌즈인 루페(Lupe)를 가지고 보면 유사한 효과를 얻을 수 있다.

이러한 효과 속에 몸이 묻히면, 즉 입체경 속으로 들어오면(setting), 이제까지 경험했던 숲과는 전혀 다른 숲의 세계를 체험하게 된다. 감탄이 절로 나오고 정서가 고양됨은 물론이다.

 숲 감상 사례 - 감성 발굴 7가지 기본원칙을 지키고 숲 감상법을 터득한다면 이제 어느 숲에 들어가도 만족할 만한 체험을 할 수 있을 것이고 이제까지의 방법과는 전혀 다른 자세로 숲을 바라보게 될 것이다.

소나무를 위와 같은 방법으로 체험하여 보자(사례 설명문 생략).

 감성 훈련

 감성 발굴 훈련/ 작가·예술가들의 감수성 체험

다음에 소개하는 예문들은 작가, 기자, 음악가 등이 숲과 관련된 내용을 담은 글이다. 각각의 작품이나 기록문을 읽으면서 그들 속에 담긴 내용을 설명함으로써 정경을 회화적으로 이해하고 그를 통해 감성을 불러일으키는 훈련을 쌓게 하고자 한다.

나무는 나에게 언제나 제일 감명 깊은 설교자였습니다. 그들이 사람들 속에 섞여 살아갈 때 나는 숲과 임원(林苑)에 있는 나무들을 존경합니다. 그리고 그들이 홀로 서 있을 때면 나는 더욱 더 존경합니다. 그들은 고독한 사람들과도 같습니다. 어떤 허약함으로 인하여 떠나지 않은, 세상을 등진 은둔자가 아니라, 위대한, 고독하게 된 인간들 같습니다, 마치 베에토벤이나 니이체처럼. 나무가지 끝은 세상을 향해 살랑거리고 나무 뿌리는 무한함 속에서 침묵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쇠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생명의 모든 힘을 발휘하여 오로지 하나만을 추구합니다: 그들 고유의, 내재하는 법칙을 이룩하는 것, 그들 고유의 모습을 본 떠 보는 것, 제 모습을 연기해 보이는 것입니다. 아무 것도 거룩하지 않습니다, 아무 것도 한 그루의 아름답고 강인한 나무처럼 귀감이 될 만한 것은 없습니다. 한 그루의 나무가 베어 넘어져서 자기의 다친 상처를 태양에 드러내게 되면, 이윽고 우리는 그의 그루터기와 묘비의 찬연한 원반에서 그의 전 생애를 읽을 수 있습니다: 나이테 속엔, 모든 투쟁과 고통과 병고와 행운과 번영, 근근히 살아온 해와 넉넉히 자라온 해, 극복하여 물리친 침입들, 견디어 이겨낸 풍랑들이 쓰여져 있습니다.(중략)

나무는 성소입니다. 그들과 이야기하고 그들에게 귀 기울일 줄 아는 이,  그는 진리를 경험하고 있는 것입니다.(중략)

우리가 슬프고 그리고 삶을 더 이상 잘 감당해내기 어려울때, 그 때 나무는 우리에게 말합니다: 진정하시오! 진정하시오! 나를 들여다보시구려! 삶은 쉽지 않은 것이오, 삶은 어렵지 않은 것이오.(중략).

밤마다 바람에 윙윙거리는 나무소리들을 들을 때면 여행에 대한 그리움으로 가슴이 찢어질 듯합니다. 조용히 오랫동안 듣고 있으면 이 그리움은 자기의 핵심과 의미를 보여줍니다. (중략)

- Hermann Hesse 『나무들(B ume)』중에서 -

오늘 숲길을 걸었다.

간벌을 위해 닦아 놓은 길을 따라 올라가노라면 여기저기 흙이 무너진 곳, 새로이 흐르는 작은 개울물 간혹 베어진 통나무를 만나곤 한다. 숲 깊이 들어가노라면 어느새 나무들의 향기에 싸이고 이 향기는 어디로부터 오는 것일까. 다시 베어진 통나무 더미를 만나 숨이 멎듯 발걸음을 멈춘다. 진한 향기는 베어진 나무의 생채기에서 퍼져 숲을 가득 채우고 있다.우리의 상처에서도 저렇게 향기가 피어날 수 있을까?

- 김진경의 <숲〉중에서 -

한국의 낙낙장송(落落長松) 그런 소나무는 서양엔 없다. 바위에도 뿌리를 내릴 수 있는 나무는 소나무뿐
일가풍(一家風)이란 말의 뜻을 알려거든 소나무를 보아라
포플러는 시인(詩人)이고 소나무는 철학자(哲學者)
솔잎사이로 새는 달빛으로 목욕을 할까나
뜰에 소나무 서너 그루 있으면, 집은 초가삼간(草家三間)이라도 좋다
오라, 벗이여, 송화(松花) 다식 안주에다 송엽주(松葉酒) 들어보세
청솔방울 따다가 백자(白磁) 접시에 수북히 담아놓다
떨어진 솔잎은 뿌리에 쌓여 솔잎방석 되나니
하루 한 번은 소나무 아래 좌정하여 명상에 잠겨볼 일

- 박희진(소나무 시인) -

   一行詩『소나무에 관하여』

  紅樹映山屛 붉은 나무 병풍처럼 둘린 산에 비치고
  碧溪瀉潭鏡 푸른시냇물 거울같은 웅덩이로 흘러내린다
  行吟玉界中 신선 세계 가운데 거닐며 시 읊으니
  覺心淸淨 갑자기 마음이 맑고 깨끗해짐 느껴진다.

                                                                 - 화담 서경덕(1489-1546)『大興洞』-

   - 중략 -
溪菊花初動  시냇가 국화는 향기 품기기 시작하고 
巖楓紅欲燃  바위 틈 단풍은 불붙는 듯 붉네
行吟林塾底  숲 우거진 골짜기 아래 거닐며 시 읊으니
心慮覺蕭然  마음과 생각 모두 산뜻해짐 느끼네

                                                                 - 화담 서경덕(1489-1546)『金剛山』-   

Not long after I moved with my family to a small town in New Hampshire I happened upon a path that vanished into a wood on the edge of town. ............

                                                               Bill Bryson. <A walk in the woods>

Allmaechtiger im Walde! Ich bin selig, gluecklich im Walde!: jeder Baum spricht durch Dich. O Gott! Welche Herrlichkeit! In einer solchen Waldgegend, in den Hoehen ist Ruhe, Ruhe, ihm zu dienen.

Beethoven (Helmut Schmidt-Vogt<Musik und Wald>에서 재인용)

맺음말

숲은 인간의 출현과 더불어 갖가지 신화와 동화와 전설을 간직한 채 인간과 동거동락 하였고, 그리고 그들의 변화무쌍한 풍광으로 여전히 우리 주변에 살아 숨쉬며, 우리의 정서생활에 깊이 간여하고 있다.

숲을 통해서 감성을 불러일으킬 수 있으려면 관찰에 더 많은 시간을 할애해야 하며, 범상하지 말고 항상 의식적인 자세로 숲을 보면서 오감을 총동원하여 관찰 대상에 몰입해야 한다. 또한 시점을 고정시키면서 숲의 풍경들을 역동적으로 볼 수 있도록 하며, 나무나 숲에 대해서 최소한의 기본 지식들을 습득하고 기록하고 읽을거리를 준비하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숲이 지닌 아름다움을 감상할 때에는 우리가 지닌 오감으로 체험하는 것이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다. 숲의 여러 가지 구성요소들은 인간의 오감(五感)에 걸러져서 갖가지 감흥을 일으키게 된다. 아름다운 꽃, 신록, 단풍, 설경으로부터는 시각적 즐거움을, 각종 산열매와 산채로부터는 짜릿한 미각적 자극을, 꽃향기와 숲 속의 나무와 풀잎의 싱그러운 향내음으로부터는 후각적 도취를, 물소리, 새소리, 쇄락한 바람소리 등으로부터는 청각적 신선함을, 그리고 계곡의 맑은 물로부터는 알싸한 촉각적 흥분을 얻는다.

이를 통해서 숲은 인간의 영혼을 미화하고 정서를 도야하며 인간의 일상활동에 열정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 세계 곳곳의 아름답고 우아한 숲이 있는 곳에는 국민들이 숲을 천성적으로 사랑하여 대문호, 철학자, 시인, 예술가, 학자들이 많이 배출되었다. 세계적 대문호 괴테는 식물학자이자 숲의 위대한 찬미자이다. 핀란드의 국민적 영웅인 작곡가 시벨리우스, 독일과 오스트리아 낳은 대작곡가 베토벤, 슈베르트, 러시아의 쇼스타코비치 등 음악가들에게 있어서 숲은 악상 발굴의 밭이나 다름없다. 그들 주변에 그들의 감정을 자극했던 숲이 있었기에 대작들을 남길 수 있었고, 오늘날 그들의 작품을 감상하면서 위로와 안식, 즐거움을 누리는 혜택을 받고 있음을 부인하지 못한다. 숲의 위대한 힘이오 역량이다.

서부 독일의 초대 대통령이었던 테오도르 호이스는 숲은 한 음절로 된 단어인데도 그 속에는 무궁무진한 동화와 경이의 세계가 숨어 있다라고 말하였다. 그의 말이 아니더라도 숲은 진정 엄청난 보고이며 창조의 비밀이 간직되어 있고 인간의 모든 꿈을 간직한 곳이다. 복잡한 도회지를 떠나서 순한 감정을 동원하여 이러한 것들을 발견하고 그 세계 속에 몰입하는 것은 정서를 함양하는 지름길이라고 본다.

숲을 통해서 얻는 감수성은 삶을 아름다움과 생기로 가득차게 하고, 날마다 더욱 활기차고 건강한 생활을 할 수 있게 할 것이다. 이렇게 되면 비로소 자연으로부터 소외된 감수성을 다시 회복하고 자신의 풍부하고 아름다운 내면의 세계를 키워 나갈 수 있으며, 자신의 행복한 미래에 대한 신념을 증진시킬 수 있을 것이다.

[발제자 소개]
김기원 :국민대 산림자원학 교수로 '숲과문화연구회' 및 '학교숲만들기'와 '교회를 푸르게 하는 일' 등에 참여하여 생활 속에서 숲을 누리고, 삶의 질을 향상시키게 하는데 힘쓰고 있다.